조나단 드미 감독 | 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
양들의 침묵(1991) | 조나단 드미 감독 | 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길 위를 살다.
안개 낀 새벽, 숲 속을 달리는 한 여인 클라리스가 있다. 크로포드의 부름을 알리는 남자의 모자에 새겨진 FBI라는 글자. 그것은 그녀가 속한 사회적 집단의 이름이다. 같은 색상의 유니폼을 입은 남성들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 붉은 기운에 한 번, 좁은 공간에 또 한 번 둘러싸인 이 장면은 파놉티콘을 연상케 한다. 사방에서 관찰당하는 이 구도는 이후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엘리트 여성으로 살아가는 클라리스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 챠밍스쿨이 아니라 버지니아 대학을 졸업했어요.”
미제사건 해결을 위해 한니발 렉터의 인터뷰를 맡은 그녀는 닥터 칠턴의 헛소리(미인계, 여자에 굶주린 자들, 사심 섞인 농담)에 이렇게 응수한다. 뛰어난 지력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성(男性)을 가진 자들로 구성된 이 세계에서 그녀는 관찰되고, 호기심을 유발하고, 성적인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로 전락한다. 괴상한 우월주의의 집단화 현장은 권력을 가진 남성들 사이에서 소수인 여성을 대하는 편견이 얼마나 일상적인지, 오랜 시간 축적되어 왔는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들어찬 교도소 복도를 지날 때 더욱 노골적이다.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성적 농담과 괴성, 접근을 위한 몸부림 등은 살얼음판 위를 살아가는 클라리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인가, 수면 아래로 감추어 위장한 것인가의 차이일 뿐 차별, 그 자체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점이 앞으로 등장할 한니발 렉터의 정체성을 빛나게 하는 진원이 된다. 그는 그녀를 인간으로 대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멀끔한 모습으로 클라리스를 맞이하는 렉터. 흐트러짐 없이 빗어 올린 머리카락과 꼿꼿이 세운 허리, 두 다리와 양팔을 가지런히 모아 내린 그는 신사 같은 자태로 클라리스를 맞이한다. 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사회적 지위(학생)와 개인적 취향, 자신을 방문한 이유를 파악한다. ‘식인’으로 유명세를 치른 이 남자는 원초적 동물성과 심미적 취향, 이성적 지성 세 가지 박자를 모두 갖춘 복합적 면모를 가감 없이 발휘한다. 여타 살인범들과 달리 그는 소유하지 않는다. 단지, 탐미할 뿐이다.
“유어 셀프(yourself)를 잘 들여다봐야 해.” 영화는 중의적 표현과 상징적 대사들로 가득하다. 특히 렉터 박사가 내뱉는 대사들의 대부분은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거나 이후에 드러날 사건의 복선을 드러낸다. 똑똑한 클라리스는 렉터 박사의 이러한 말들(혹은 말장난)을 놓치지 않는다. 그녀는 유어셀프라는 이름을 가진 물품 보관소를 찾아내 벤자민 라스페일이라는 이름의 한 남성의 죽음을 알아낸다. 그는 렉터 박사의 옛 환자로 변신을 꾀하려는 버팔로 빌의 실질적 첫 살인 대상자였다.
“성범죄 얘기는 여자가 없는데서 하죠”, “미리 말해 줬다면 렉터가 눈치채고선 자네를 갖고 놀다가 돌려보냈을거야.”
차별은 계속된다. 중요한 대화나 결정적 순간에서 배제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지위를 내세울 권위를 상실한다. 그녀의 상관인 잭 크로포드는 클라리스의 수고를 치하하면서도 공식화하지 않는다. 그는 사적인 공간에서 그저 한마디의 칭찬을 건넬 뿐, 영광을 손에 쥐어주는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대사 안에는 남성적 시각만이 존재하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의 자리에 그녀를 앉혀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교만함까지 갖추고 있다.
검시를 시작하며, 클라리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보안관과 그의 부하들을 향해 자리를 비켜달라는 부탁 같은 지시를 내린 것이다. 감사 인사를 덧붙였지만 이는 FBI소속이라는 직위와 검시를 행할 수 있는 권한을 내보인 것과 다름없다. 이전까지 그녀를 대상화한 눈길로 바라보던 남성들이 그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객관적 상황에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커피를 손에 들고 자리를 뜨는 그들의 뒷모습엔 불쾌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식인 한니발 렉터, 탐미하는 인간의 초상.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흐르는 렉터의 수감방. 가만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시공을 흡수하는 수용(受容)적 인간이다. 전경, 소리, 향, 맛, 느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감각기관을 지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끌어당겨 천천히 음미하고, 그것이 내부로 배어들길 기다리고, 소화시켜 체화하는 이 과정에 스스로를 바친다.
현재를 살라. 철학자들과 명상가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란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를 떠다니는 불안과 잡념을 잠재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느리고, 섬세하며, 원초적인 인간. 어쩌면 렉터는 현재를 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는 본질에 관해 묻는다. 행위가 아닌 이유. 즉, 살인자의 결핍, 상처에 관한 질문이다. 이는 정신과 의사인 그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지만, 근원을 알아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인간 심리를 정공 하는 것이기도 하다.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 그것이 물건이 아닌 그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것이라면 갈망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오랜 바람에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의 지속은 스스로를 분열시켜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낸다. 스스로를 방어하고, 불완전한 상태를 정당화시킬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빌은 그렇게 괴물이 되었다.
괴물은 괴물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렉터가 내뱉는 모든 대사에는 빌과 관련된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 유어셀프의 존재, 상원위원을 향한 마지막 대사 등은 복선이 되고, 렉터의 캐릭터를 강화시키는데 일조한다.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FBI보다 한 발 앞설 수 있다. 그의 동물적 감각은 살인자 빌의 관점을 획득함으로써 사건의 인과를 완성해낸다. 빌과 렉터,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살인은 쾌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들에게도 원인은 있다. 폭력이라는 응달에서 태어난 어린 자아는 성장하기도 전에 고통을 먼저 경험한다. 그들은 햇볕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며, 내외로 입은 상처만이 삶을 이루는 커다란 주축이 된다. 피해와 가해, 학대와 트라우마와 같은 수직적이고, 서열화된 형태의 관계만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점철된 성장 환경은 이해와 공감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자라날 틈이 없다. 있다 치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상처는 안으로 곪아 들어갈 뿐이다.
심연 속에 갇힌 그들의 자아는 시시각각 현실에서의 삶과 충돌한다. 사회규범의 바깥에 위치한 그들의 욕망은 옆으로 자라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생장을 완성해 나간다. 마치 이끼처럼 번짐으로써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내면을 잠식한 어두운 자아는 보다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이전보다 강해진 신체적 힘과 맞물려 세상 밖으로 나설 준비를 마친다. 어린 피해자가 자신보다 약한 피해자를 찾아 가해자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그물에서 벗어나기. (feat. 셀프 구원의 시대)
그들은 갇혀 있다. 물리적 공간에 혹은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있다. 감시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자유가 없는 그들은 그물에서의 삶을 견딜 자신만의 해갈법을 찾아낸다. 렉터는 예술, 클라리스는 운동이 그것이다. 건강함이라는 외피를 두른 두 행위는 결핍에서 오는 연약함을 보해주는 역할을 한다. 남성과 대비해 신체적 우위를 점할 수 없는 클라리스가 매일 달리고, 몸의 무게를 더하는 하루를 보냄으로써 주변부와 수위를 맞추고, 삶의 안정을 꾀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몹시 훌륭한 인간이다.
수위를 맞추는 행동의 선택은 인간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하다. 파고가 높은 환경에 속한 인물일수록 물결을 대하는 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보통 즐길 줄 아는 유연함을 증폭시키거나 댐을 건설해 물의 높이를 조절하는 것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물론, 클라리스는 후자다. 그녀에게 있어 운동은 댐을 증축하는 행위와 진배없다. FBI라는 조직 내에서 그녀는 폭포수를 견딜 장치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녀는 빛나는 지성의 소유자지만, 작고 가녀린 체구는 핸디캡으로 작용했을테니 말이다. 클라리스는 땀을 내고, 근육을 단련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반면, 렉터는 책과 음악, 미술을 보드 삼아 파도를 타는 서퍼형 인간이다. 그는 수면 위를 가로지르고, 수면 속을 유영한다. 감각과 자극이 작용-반작용처럼 그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므로 그는 언제나 물결 속에 존재한다. 그는 높은 파도가 두렵지 않다. 되려 신선하게 느끼고, 스릴을 즐긴다. 감각적인 그는 순간 속에 살며, 현재를 활용한다. 자신의 상황, 자신이 대면하는 사람, 주어진 공간을 활용해 다음번의 현재로 도약한다. 두 명의 경관 중 한 명을 살해 한 뒤, 탈출을 위해 도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이 같은 성향을 잘 묘사한 장면이기도 하다. 살인이 끝난 후에도 바흐를 즐기고, 시체를 이용해 자신을 숨기는 능동적이고, 재기 발랄한 이 남자는 15분 정도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시선을 훔치는데 성공한다.
주인공 클라리스는 양(= 약자)을 대변한다. 아버지(보호자)의 죽음 이후, 집(우리) 바깥으로 내몰린 그녀는 사촌이 하던 목장에서 울부짖는 양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소녀는 도살의 위기에 처한 양들을 탈출시키려 하지만 우리 밖으로 몰아내지도, 힘으로 구출하지도 못한다. 이후, 어른이 된 소녀는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이 되지만, 보호 바깥에서 들었던 그 울음소리를 여전히 기억하며 살아간다. 양이라는 실질적인 대상에 투영되어 있지만, 사실 숨죽여 울었던 어린 시절을 반영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단서 하나에 기억 하나, 빌의 살인을 멈추기 위한 두 사람의 등가교환은 클라리스의 상처와 정의감을 부각하는데 일조한다. 특히 양에 대한 고백 이후 렉터의 눈에 맺힌 눈물은 영화 내내 거리감을 유지하던 그가 공감을 표현한 유일한 장면이다. 물리적 또는 심리적인 외상을 받은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면, 지속적인 자기 극복과 복기의 시간이 오래도록 축적되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적인 경험(아버지의 죽음)을 사회적 영역(연쇄사건)으로 확장시켜 또 다른 피해자의 발생을 막아내려는 정의를 삶의 근간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매우 성숙하다. 비록 자신보다 어리고 삶의 경험치도 적지만, 건강한 방식으로 승화시킨 클라리스에게 렉터는 승진 축하 전화를 걸며,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바야흐로 셀프구원의 시대이다. 주체성 찾기와 자존감 회복은 힐링이라는 명목 아래 오랜 시간 회자되어 왔다. 효율과 경제를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무인기계가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고,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존재의 불안은 여유와 휴식이라는 사이 구간이 끼어들 틈이 없다. 소위 밈이라는 짧고 가벼운 영상과 말들이 유행처럼 번졌다 사라지는 현상만 보아도 일시적이고, 일회적으로 소비해 버리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느낄 수 있다.
살인, 방화, 강간, 폭행 등의 기사가 연일 쏟아지는 뉴스란을 보고 있자면, 거리에 나서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모두들 참지 못해 폭발하고, 배설해 버리는 시대에서 나름의 소화 방식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깨닫게 된다. 피부에 닿는 햇볕, 일상에서 주고받는 소소한 대화, 발 구르며 타는 자전거 등 제 나름의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삶에서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갈등들 또한 무리 없이 지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건강한 사회란 구성원들의 소화 능력이 좋음을 뜻하고, 또 그런 시스템이 갖추어진 사회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유희하고, 놀이하는 문화를 장려하고, 각자의 삶에 존재하는 차집합을 인정한다면 힘든 오늘을 마주하는 마음도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