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버금 Mar 10. 2023

제7의 봉인(1957)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 | 막스 폰 시도우, 벵트 에케로트

제7의 봉인(1957) |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 | 막스 폰 시도우, 벵트 에케로트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안토니우스 앞에 죽음이 나타난다. 기사는 죽음에게 체스게임을 제안하고, 게임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 코 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유예한다. 영화는 흑사병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14세기 스웨덴을 배경으로 기사 안토니우스와 그의 종자 옌스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과 흉흉한 소문, 굶주림, 대중의 공포, 마녀 처형식을 벌이는 인간들을 차례차례 그려낸다. 전쟁이 남긴 흉터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릴 수 없는 기사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려 애쓴다. 막연한 추측이나 맹목이 아닌 확신을 기대하며 여정의 중간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신의 행방을 묻는다.     


장면으로 만나는 한 편의 철학서 같은 영화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제7의 봉인 역시 삶과 죽음 사이의 세계,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신에 대한 의문을 그리는 작품이다. 흑사병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가 만연한 중세의 사람들의 모습은 코로나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냈던 우리네의 삶과 꼭 닮아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사망자 수를 등에 업고 연일 쏟아지던 자극적인 기사들, 감염자를 향한 눈총과 비난, 동서로 갈리는 전문가의 의견들, 혼란스런 틈을 타 경제적 이득을 누린 자들, 아예 자체 격리를 결정하며 문을 닫아버린 사람들까지. 지난 3년간 우리가 겪어 왔던 상황과 똑같은 풍경이 극 속에 녹아있다.


십자가 앞에 선 안토니우스는 묻는다. 하느님을 직접 느끼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 것이냐고. 왜 하느님은 기적 속에 숨어 있어야만 하느냐고. 문 밖의 현실이 이리도 피폐한데,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냐고. 그러자 죽음이 답한다. “정말 아무도 없나 보지.”     


아무도 없다. 오직 인간들 뿐. 낙원은 없다. 오직 죽음 뿐.

신을 믿지 않는 내겐 이 말이 더 진리처럼 들린다. 무수한 바람들이 만들어 낸 머릿속 세계는 내가 딛고 선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꿈을 이루는 자들도 여럿 있다. 하지만 그들의 결과는 원하는 것을 위해 움직였다는 현실적 행동이 뒷받침된 이후의 일이고, 어찌 됐건,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은 이상으로 남을 때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선 자연스레 신의 존재를 찾게 되는 것 같다. 가령 죽음이나 큰 병과 같은 갑작스레 다가온 재앙 같은 운명을 체념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때를 기다려라. 때를 준비하라는 말은 무수히 들어왔지만, 실제로 크나큰 고난이 닥쳤을 때, 담담하기엔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창조해 낸 우상일지도 모른다는 안토니우스의 대사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종교적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다가올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구원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특히 뒤숭숭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밝은 빛을 띠는 요프와 그의 아내 미아는 어두운 바탕색으로 칠해진 영화 전반에 희망의 기운을 선사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거리 공연을 하며 살아가는 요프는 정직하고 익살스러운 인물로서, 타고난 밝은 천성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비관의 순간 역시 곁가지로 밀어내 준다. 또한 아내 미아에 대한 사랑과 아들(미카엘)을 향한 애정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줄 아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자신이 품고 또 품김을 당할 수 있는 요람과도 같다. 정직함과 유머, 타인을 향한 배려는 기사 안토니우스에게도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덕분에 안토니우스는 이들 부부를 통해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산딸기와 우유를 대접받은 기사는 이들 부부에게 호위를 약속한다. 인적이 드문 숲길을 지나야 하는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기사와 종자, 둘로 시작한 여정은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로 대거 늘어난다. 함께 지새우는 밤이 지나고, 숲길을 지난 그들은 마녀를 처형한다는 명목 아래 벌어지는 화형식과 맞닥뜨리면서 사회 전반으로 퍼진 불안의 부작용을 체험한다.

  

악마와 접촉했다는 혐의를 받은 마녀는 고작해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이다. 기사는 마지막을 기다리는 이 어린 소녀에게 다가가 악마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신과 대척점에 놓인 악마야말로 누구보다 신의 실존을 강하게 느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녀로 몰린 소녀의 눈에는 신도 악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두려움만이 가득하다. 저항할 힘마저 사라진 듯, 무기력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소녀는 그저 공포에 사로 잡힌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의 희생자일 뿐이다. 허무함에 빠진 기사는 혼란한 마음을 부여잡고 죽음과 체스게임을 지속한다.


영화의 초반에 요프가 성모마리아의 형상을 보았듯, 그는 죽음의 형상을 한 사신의 모습도 발견한다. 오직 요프의 눈에만 보이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은 그들의 곁으로 성큼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기사는 사신을 피해 도망가는 가족을 도와주기 위해 그의 시선을 빼앗으며 시간을 번다. 그의 인간적인 호의는 요프 가족의 목숨을 구하는데 일조하고, 이에 커다란 만족을 느낀다.


폭풍우 속을 뚫고 죽음을 비껴가는 요프 가족과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흡족함을 표하는 기사의 얼굴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희생적 선택이고, 미래라는 시간을 위한 현재의 행동이며, 다음 세대를 위한 기성의 배려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안토니우스의 아내를 포함한 6명의 일행은 죽음의 노크를 받아들여야 해야 했지만, 요프 가족만큼은 죽음이 이끄는 이들 무리를 먼발치서 바라보는 목격자로 남을 수 있게 된다.


다소 어렵고 난해한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는 여러 번 볼수록 또 곱씹어 생각할수록 깊이감을 더 하기에 좋다. 리뷰를 씀에 있어 가장 좋은 점은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 영화보다 봐야 할 영화가 더 많다는 조급함이 들거나 남들 다 본 영화를 나만 못 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때 베르히만의 작품을 보면, 밀도와 내실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된다. 느리게 진행되는 스토리와 철학적인 대사, 캐릭터 간의 갈등이 부딪히는 지점을 따라가다 보면, 촘촘히 짜인 실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재미도 낙낙하다.


비록 안토니우스는 신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목격한 사건들, 진실들이 모여 그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지난 그가 다시 태어날 때(나는 윤회사상을 믿는다) 인간의 삶을 선택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적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동시에 조금 나아진 인간사를 기대하고, 역병 이후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다시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양들의 침묵(199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