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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버금 Mar 16. 2023

피아노(1993)

제인 캠피온 감독 | 홀리 헌터, 하비 케이틀

피아노(1993) | 제인 캠피온 감독 | 홀리 헌터, 하비 케이틀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풍랑과 진창

파도가 달려드는 어느 해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세찬 바람, 질퍽이는 모래톱, 그 위에 내 던져진 짐짝들 사이로 거친 절벽이 우뚝 솟은 낯선 땅을 밟는 모녀의 모습이 보인다. 꼿꼿한 그녀의 태도와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은 공간을 통해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려는 다부짐이 엿보인다. 선장을 향한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으면서도 배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그녀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그녀는 no를 외칠 줄 아는 여자다.


물이 차오르고, 어둠이 내려앉자 그녀는 딸 플로라에게 바람에 관한 동화를 들려주며 밤을 지낸다. 현명한 그녀는 흑빛으로 칠해진 드넓은 공간에 그들 스스로를 내던지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춰진 크리놀린(Crinoline, 치마폭을 넓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 골반에 걸쳐 입는 일종의 틀)을 이용하여 바닷바람을 막아줄 천막을 짓는다. 그리고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새장 같은 그곳에서 무섭고, 막연한 새벽을 비현실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채운다. 궂은 날씨에 대한 원망 없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책 없이.


6살 이후, 말이 아닌 손짓으로 대화하며 살아온 에이다에게 있어 원치 않는 남자와의 혼인은 거절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상대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일임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고요(에이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지 않지만)를 받아들이겠노라 선언하는 상대를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한다. 되려 침묵을 견딜 줄 아는 인내를 가진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이와 같은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에이다는 스스로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 혹은 스스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능력치를 뛰어넘는 오만한 결정을 얼마나 쉬이 내리는지에 대해 상상하지 못한다. 건반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면의 재잘거림을 보듬으며 살아온 그녀가 외부의 사물들(또는 재화)에 반응하는 남자의 감정적 결핍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여러 명의 원주민들 그리고 통역을 맡은 사내(베인스) 하나와 함께 등장한 남편 스튜어트는 그녀의 작은 키를 두고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부터 베인스와 스튜어트의 (에이다를 바라보는) 관점 차이가 극명히 드러난다. 에이다의 첫인상을 묻는 질문에 베인스는 ‘피곤해 보인다’라고 대답한 반면, 스튜어트는 단지 그녀의 외양만으로 그녀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오랜 항해 끝에 도착한 해안가에서 사위의 낯선 것들로부터 딸 플로라를 지키기 위해 곤두세웠을 신경과 소모되어 가는 체력, 그럼에도 버텨야 한다고 위로하며 쌓여갔을 에이다의 여독에 대해 그는 “피곤해 보인다”라는 말로 함축해 표현한다.


스튜어트는 진창과 원주민들의 상태를 고려해 피아노는 가지고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짐은 버려도 좋으니 피아노만은 꼭 가져가야 한다고 고집한다. 먹고사는 생활의 영역보다 심리적 안정이 우선인 에이다는 분신과도 같은 피아노를 버려두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에이다의 청을 단박에 거절한다.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되는 그들의 결혼 생활은 쏟아지는 폭우처럼 순탄치 못하다.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간단한 의식을 치른 후에도 그녀는 비바람을 맞고 있을 자신의 피아노를 걱정한다. 그래서 스튜어트가 집을 비우자마자 그녀는 이웃집에 사는 베인스를 찾아가 피아노가 있는 해변가로 자신을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베인스는 재차 거절하지만, (모녀를 편히 데려다줄) 안장을 말 위에 얹는 것으로 승낙을 대신한다.


해안가에 울려퍼지는 피아노 연주, 딸 플로라의 춤사위, 에이다의 얼굴에 퍼지는 미소와 모래사장 위에 그린 조개껍데기 그림까지.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이 장면은 덩치 큰 악기가 내는 섬세한 감정이 마이클 니먼의 곡과 어우러져 거친 배경을 압도해버리는 명장면이다. 초반부 내내 불안과 긴장으로 자신을 억눌러왔던 에이다가 처음으로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내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의도치 않은 노현은 베인스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을 자처한다.


반면 테이블 위에 피아노 건반을 새겨 넣고, 가상의 음을 상상하며 연주하는 에이다의 모습을 보고 스튜어트는 정신병을 의심한다. 그것이 피아노에 대한 향수일 것이라곤, 그만큼 피아노가 에이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그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 단순하고, 투명한 그는 행동과 말, 이면의 마음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고향을 떠나 원주민들이 사는 땅에서 살아가는 모녀의 낯섦과 불안에 대해 감각하지 못하는 그는 끝내 에이다의 마음을 얻는데도 실패한다.


2. 삼각 거래

베인스는 강 건너 80 에이커의 땅과 에이다의 피아노를 교환할 것을 제안한다. 땅 욕심에 눈이 어두운 스튜어트는 베인스의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레슨을 받아야겠다는 베인스의 말에 에이다를 추천하기까지 하는 그는 정작 피아노의 주인인 에이다에겐 가족이라는 이름의 희생을 강요한다. 레슨을 위해 베인스의 집으로 향한 에이다는 이미 조율까지 마친 자신의 피아노를 마주한다. 그리고 단지 듣기만 하겠다며 마음껏 연주해도 좋다는 베인스의 말에 노했던 마음을 한결 누그러뜨린다.


에이다를 향한 베인스의 마음이 크기를 키워가자 그는 또 다른 거래를 제안한다. 건반 하나에 터치 한 번이 그것이다. 피아노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해 본 적 없는 에이다는 듣기에 무척이나 모욕적인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만 그녀는 '검은'건반 하나에 터치 한 번으로 횟수를 줄이는 방어책을 꾀한다. 피아노를 둘러싼 세 사람은 삼각 모양의 대형을 짜고 각자의 욕망을 취한다. 그러나 피아노라는 실체를 원하는 사람은 에이다 오직 한 사람뿐, 땅(스튜어트)을 원하는 스튜어트와 에이다의 마음을 원하는 베인스에게 피아노는 그저 거래를 위한 교환 대상일 뿐이다.


레슨을 빙자한 은밀한 거래가 시작된다.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고, 베인스가 에이다를 가까이 품는 동안 딸 플로라는 마당에서 개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딸 플로라는 꽤나 영리한 인물로 그 나이 때의 소녀가 가질 법한 악의 없는 잔인함을 말로, 행동으로 거침없이 표현하는 캐릭터다. 개를 괴롭힌 뒤, 아기 다루듯 달래고,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등 어른들이 끌어가는 팽팽한 삼각 구도 내에서도 당당히 요구하고, 뜻하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어리지만, 강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같은 성향으로 인해 그녀는 극이 정점을 향해 가는 길목에 앉아 촉매역할을 톡톡히 한다.


여성들의 표현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말하지 못하는 에이다와 어린아이인 플로라는 연고 없는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남은 생을 살아내어야 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들이 자신들의 발언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움을 살까 두려워하지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도 않는다. 땅과 피아노를 교환했다는 스튜어트의 말에 분노하고, 자신의 것임을 분명하게 표하기도 한다. 이 같은 태도는 베인스에게도 적용된다. 스타킹에 난 작은 구멍에서 팔로, 이후 전신으로 스킨십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건반의 개수를 늘려나가고, 서정적인 선율에서 경쾌한 음악으로 힘 있게 타건함으로써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자신의 불쾌함을 드러낸다.


그에 반해 남편인 스튜어트는 사람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조상들의 강물과 무덤이라는 이유로 매매를 거절하는 원주민에게 총과 담요를 들이밀고, 가격을 올리는 방식으로 흥정하려 한다. 이재에 밝은 그에게 돈이 아닌 이외의 것은 큰 중요도를 갖지 않는다. 그는 피아노 레슨 시간에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다는 베인스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를 인지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도대체 무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의구심마저도 되묻지 않는다.


레슨이 진행될수록 터치는 과감해지고, 감정의 농도 도 짙은 색을 더해가지만, 베인스의 곁에 누운 에이다의 시선엔 피아노만이 걸려있다. 두 사람의 외사랑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연극 공연 관람을 위해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베인스는 에이다의 곁에 앉을 수 없고, 손을 잡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상기한다. 그저 스튜어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에이다를 바라볼 뿐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 베인스는 마지막 레슨에서 건반 10개를 걸고, 전라상태를 제안한다.


3. 도끼(feat. 안팎의 대결 : 찍어내리다)

피아노를 되찾은 에이다는 기쁘지 않다. 그녀는 그제야 삼각 구도의 모양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밑변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다. 며칠의 고민 끝에 그녀는 베인스를 찾아간다. 베인스는 자신의 상사병을 고백하고, 아무런 감정 없이 찾아온 것이라면 돌아가라고 말한다


GO

(움직이지 않는 에이다)

GO.

(움직이지 않는 에이다)

GO-

(움직이지 않는 에이다)

GET OUT!


떠나라는 대사 내내 카메라는 베인스만을 비춘다. 화면 밖의 에이다는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말하지 않고, 떠나지 않는 그녀의 간접적인 대화방식은 오히려 보는 이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삼각형의 꼭짓점에 서게 된 스튜어트는 베인스의 집을 찾아왔다가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다. 분노에 찬 그는 두 사람의 약속을 엿듣고, 베인스를 만나러 가는 에이다를 막아선다. 그는 베인스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에이다를 집안에 가두어버리는 우회적 방식의 태도를 취한다. 꼼짝없이 갇혀버린 그녀는 베인스를 향한 강렬한 마음에 이상증세를 보인다. 기약없는 시간이 흐르고, 베인스가 마을을 떠난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스튜어트는 어찌 됐던 자신의 아내로 살아갈 에이다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집안 곳곳에 걸어두었던 빗장을 푼다.


에이다는 피아노 건반을 빼 자신의 마음을 쓴 편지를 딸 플로라의 손에 쥐어준다. 내키지 않는 편지를 전해야 하는 플로라의 발걸음은 베인스가 아닌 스튜어트에게로 향한다. 산꼭대기에서 에이다의 변심을 확인한 스튜어트는 날 선 도낏자루를 들고 천둥소리와 함께 산길을 내려온다. 집으로 돌아온 스튜어트는 곧장 에이다를 향해 도끼를 휘둘러 에이다의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자신의 믿음을 깨버린 배신감과 분노,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화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폭우 속에 벌어진 참극은 피와 비명과 침묵이 한데 섞여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긴다.


마지막에 이르러야 스튜어트는 에이다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던 감정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귀가 아닌 뇌로, 마음으로 전해지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베인스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진심임을 깨닫는다. 붙잡고, 가두고, 화를 내어도 결코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베인스를 찾아가 에이다와 함께 떠나라고 말한다. 제도로 묶여 있는 자신의 곁이 아닌 그녀의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녀의 바람대로 베인스의 곁에 머무는 것에 동의한다. 상처로 말미암아 스튜어트 역시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해 시선이 이동하는 경험을 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핵이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돈이나 땅과 같은 재화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덕분에 에이다는 베인스와 함께 섬을 떠난다. 비록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만, 자신의 남은 삶을 함께할 동반자를 찾은 에이다는 바닷속 깊이 피아노를 버리며, 베인스와 함께 하는 삶에 가속을 밟고, 상처 주었고, 상처받았던 과거를 내면 깊숙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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