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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버금 Apr 04. 2023

파고(1996)

조엔 코엔 감독 | 프란시스 맥도맨드, 윌리암 H. 머시

파고(1996) | 조엔 코엔 감독 | 프란시스 맥도맨드, 윌리암 H. 머시, 스티브 부세미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욕망은 단순했다. 장인의 인정과 가장으로서의 체면말이다. 그에게는 썩 괜찮은 투자 계획이 있었고, 사업가로서의 야망, 부양해야 하는 가정이 있었다. 그가 꿈꾸는 보다 나은 미래는 자신이 구상한 사업 계획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에 그는 장인에게 몇 차례에 걸쳐 자본유치를 어필했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당했다. 단칼에 거절당했다. 오늘날의 결심을 견인한 데에는 장인의 태도도 한 몫 거들었다. 사위인 자신에게 약간의 호의만 베풀었더라도 이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형 씨에라를 뒤에 달고 눈 속을 헤치는 제리는 이 모든 것이 가족을 위해서 동시에 가족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부하직원 셉으로부터 소개받은 불량배 칼과 게어에게 자신의 아내를 납치해 몸값을 받아달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받아내야 할 돈은 8만 달러. 한 테이블에 마주 앉은 이들은 수중에 없는 돈을 둘러싸고 제 몫을 가르느라 소리를 높인다. 설명하기 번거롭고, 이해하기 복잡한 가정사는 뒤로 배제한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작은 언쟁 끝에 그들은 씨에라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공모를 약속한다.


그 사이 제리는 자신의 사업 계획(주차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장인은 제리에게 중개 수수료를 얹어주는 대가로 사업에서 배제하겠다고 선언하고, 씨에라를 담보로 대출금을 받은 은행에서는 일련번호가 조회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물 대조 또는 대출금 상환을 요구한다. 공모자들에게 이미 씨에라를 넘겨버린 그는 실물차량을 확인시켜 줄 수도, 대출금을 갚을 수도, 장인의 탐욕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지킬 힘도 없음을 실감한다. 모든 것이 어그러진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제리는 엉망이 된 집안을 보며 아내 진이 납치된 사실을 알게 된다.

폴 번얀 : 캐니다, 미국의 민간전설에 등장하는 거대벌목꾼.

시작은 소박했다. 그들 모두는 돈이 필요했으므로, 돈만 받아낸다면, 모두가 행복할 엔딩이었다. 물론 장인의 잔고가 조금 줄어들겠지만, 그는 충분한 재력가이지 않은가. 게다가 진도 무사할 터였다. 그러나 그녀를 싣고 브레이너드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사건은 갑작스레 폭등하기 시작한다. 번호판을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문을 받게 된 것이다. 신분을 들킬 것을 우려한 게어는 면허증을 요구하는 경찰관을 총으로 쏴 죽이고, 칼은 경찰관의 시체를 갓길 밖으로 옮기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낯선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정면으로 맞는다. 축 늘어진 시체와 놀란 두 눈이 이들을 스쳐 지나가고, 게어는 목격차량을 쫓아 가속 페달을 밟는다. 이윽고, 폭설로 뒤덮인 새하얀 땅 위에 핏빛 자국이 선명히 남는다. 모두 세 구다.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깬 경찰 서장 마지는 남편이 부쳐준 계란 프라이로 식사를 마친 후, 사건 현장으로 출근한다. 미끄러운 눈길 사이를 만삭의 몸으로 누비는 그녀는 범인의 몸집과 공범의 존재, 차량의 상태까지 연이어 꿰어내며 사고 당시의 정황을 명확히 유추해 낸다. 비록 입덧을 삼키며 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녀의 감식능력은 누구보다 예리하다. 납치된 진을 제외한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마지는 남편이 부탁한 지렁이를 잊지 않고 챙기거나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성공들을 큰 목소리로 응원하는 등의 모습을 엿보이며, 제리 일당과 대척점에 서서 영화 전체의 균형을 꾀하는데 일조한다.


반면, 아내의 납치를 두고 세 남자 사이에 설전이 벌어진다. 진의 안위를 걱정하는 표면 아래로 자신의 돈을 건네야 하는 사실이 답답한 장인과 돈 때문에 납치를 계획한 제리의 답 없는 언쟁이 오간다.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시키고 싶은 제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에게 신고를 만류하고, 돈만 받으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는 실체 없는 믿음을 상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인다.


그들은 대면 거래 장소로 트윈시티를 선정한다. 제리는 납치범들에게서 살인과 그로 인해 치솟은 몸값에 대해 전해 듣고, 최종 배팅금액을 100만 달러로 대폭 조정한다. 그러자 짜고 치는 인질극에 장인이 참전하겠다고 나선다. 제리는 적극적으로 만류해 보지만, 장인의 결의는 꺾이지 않는다. 그는 직접 돈가방을 쥐고, 밤길을 나선다.


Where is jerry?

No jin, No money.

Drop the fuxxing money!


돈가방을 둘러싸고 몇 발의 총성이 울린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제리는 죽어 있는 장인과 주차장 직원 그리고 돈가방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한다. 흰 눈과 붉은 피의 대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불길처럼 제리의 삶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100만 달러를 손에 쥔 칼은 약속한 8만 달러를 빼놓고 나머지를 눈 속에 파묻는다. 그는 임시로 머물고 있는 거처로 돌아가 게어에게 반을 건네고, 씨에라는 자신이 갖겠다고 말한다. 게어는 차도 반으로 나누자며 제안을 거절한다.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하던 두 사람, 급기야 칼이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가고, 뒤를 쫓아 나온 게어는 칼의 등 뒤에 도끼를 꽂아내린다.

목격자의 제보를 받고 호수 근처를 순찰하던 마지는 마침내 씨에라를 찾아낸다. 권총을 손에 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시끄러운 분쇄 기계소리가 세기를 더해가면 사람의 허벅다리가 세로로 꽂혀 갈리는 풍경이 이어진다. 마치 정육점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은 적/백의 대비가 높은 해상도로 출력되어 보는 이들을 실색하게 하지만, 느린 듯 담담하게 흘러가는 서사에 강렬한 배경이 되어 몰입도를 상승시킨다. 돈을 좇느라 인간성을 상실해 버린 인물들의 말로는 죽거나 잡히거나 도망치거나 셋 중 하나지만 뭐가 됐든 파멸, 그 자체다.

영화의 여운은 마지의 텅 빈 얼굴에서 왔다. 욕망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 결핍이 없는 데서 발현되는 저 표정 말이다. 영화에서 마지 부부는 먹고, 자고, 먹고, 자는 모습만 반복해서 비춰지는데, 잘 먹고, 잘 자는 것 = 잘 사는 것이라는 만고불변의 법칙은 영화 속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반복적인 일상을 사는 그녀의 무탈함이 되려 인상적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도 그녀의 무사와 안녕함이니, 제리가 꿈꾸었던 무지개 너머의 풍경이 바로 마지 부부의 현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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