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전 네이피어 저, <미야자키 월드>에 대한 서평
그러니까 장소 없는 지역들, 연대기 없는 역사들이 있다. 이런 저런 도시, 행성, 대륙, 우주. 어떤 지도 위에도 어떤 하늘 속에도 그 흔적을 복구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유는 아주 단순히 그것들이 어떤 공간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도시, 이 대륙, 이 행성들은 흔히 말하듯 사람들 머릿속에서, 아니 그들 말의 틈에서, 그들 이야기의 밀도에서, 아니면 그들 꿈의 장소 없는 장소에서, 그들 가슴의 빈 곳에서 태어났으리라. 한마디로 감미로운 유토피아들. 한데 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 우리가 지도 위에 위치지을 수 있는 장소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그리고 명확한 시간, 우리가 매일매일의 달력에 따라 고정시키고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유토피아들이―모든 사회에―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 집단이든 그것이 점유하고 실제로 살고 일하는 공간 안에서 유토피아적인 장소들을 구획하고, 그것이 바삐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유크로니아(유토피아와 대구를 이루는 용어로서, 유토피아가 현실에 없는 장소라면 유크로니아는 현실에 없는 시간을 의미한다)적인 순간들을 구획한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는 순백의 중립적인 공간 안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백지장의 사각형 속에서 살고 죽고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둡고 밝은 면이 있고 제각기 높이가 다르며 계단처럼 올라가거나 내려오고 움푹 패고 불룩 튀어나온 구역과, 단단하거나 또는 무르고 스며들기 쉬우며 구멍이 숭숭 난 지대가 있는, 사각으로 경계가 지어지고 이리저리 잘려졌으며 얼룩덜룩한 공간 안에서 살고, 죽고, 사랑한다. 스쳐 지나가는 통로가 있고, 거리가 있고, 기차가 있고, 기차가 있고, 지하철이 있다. 카페, 영화관, 해변, 호텔과 같이 잠시 멈춰 쉬는 열린 구역이 있고, 휴식을 위한 닫힌 구역, 자기 집이라는 닫힌 구역도 있다. 그런데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그것은 일종의 반공간이다.
이 반(反)공간(contre-espaces),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utopies localisées.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목요일 오후―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튀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반공간은 아이들만의 발명품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이들은 결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른들이야말로 아이들을 만들어냈으며, 그들에게 자기들만의 굉장한 비밀을 속삭여주었다. 그러고 나서 어른들은 이 아이들이 아주 큰 소리로 자기들에게 그것에 대해 다시 말할 때 깜짝 놀란다. 어른의 사회는 아이들보다 훨씬 먼저 자기만의 반공간, 자리매겨진 유토피아, 모든 장소 바깥의 실제 장소들을 스스로 조직했다. 예를 들면, 정원이 있고 묘지가 있고 감호소가 있고 사창가가 있고 감옥이 있고 클럽 메드의 휴양촌이 있고, 그 밖에도 많다.
이상, 미셸 푸코 저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11~14면.
유토피아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실제 지도 위에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 미셸 푸코는 이를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라고 명명한다이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그 밖의 다른 온갖 장소들에 대해 '이의제기' 하고 그것들을 전도시키는 장소, 말하자면 실제로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도 이런 헤테로토피아적인 공간, 그리고 그에 더해 헤테로크로니아적인 시간. 이 둘이 합쳐진 특정 '순간'이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적인 공간과 시간. 이 순간의 전후 기억은 명확치 않다. 하지만 그 순간에 대한 기억, 감정, 느낌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있다. 바로 1998년, 일본 도쿄의 한 장소이다.
1998년, 아버지의 단기 해외연수로 가족 모두가 일본 도쿄 신주쿠의 한 동네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나는 와세다대학교 바로 근처에 있는 '토츠카제일초등학교' 3학년 1반 학생이 되었고, 약 1달만에 일본 친구들과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한국이 따라잡은 부분도 많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이 훨씬 큰 시기였고, 일본과 한국의 갭은 9살 어린아이였던 나의 눈에도 많이 들어왔다. 그 중 몇 가지는 바로 내가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던 공교육과, 티비로 방송되던 애니메이션들이었다.
공교육 중에서도 특히 예체능 교육의 수준이 남달랐다. 한국에서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만 뛰놀던 나에게 우레탄 운동장과, 실외 농구장, 농구장 바닥을 뜯어내면 나오는 수영장, 실내 체육관 등은 신세계였다. 그리고 각종 공구와 장비로 가득한 미술실, 흡사 오케스트라를 방불하는 수많은 악기들로 가득찬 음악실 등... 아마 내가 예술을 즐기고 좋아하게 된 것은 이때의 즐거운 경험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은 음악실에서 다같이 <라퓨타>의 OST '君をのせて'(너를 태우고)를 합창하던 순간이다. 조그마한 일본 음악교과서를 들고, "あの 地平線(ちへいせん) 輝(かがや)くのは~"를 부르던 순간.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생히 남아있는 순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a9y4HbNKcw&feature=youtu.be
우리는 왜 이 노래를 불렀을까? 음악실에서 <라퓨타> OST를 부르기 전, 방송국에서 주말 영화로 <라퓨타> 를 방송해주었고, 그것이 당시 초딩들 사이에서 꽤 회자되었었기 때문이다. 나도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급식을 먹으며 라퓨타 얘기를 했었는데, 하필 그날 점심에 야끼소바가 나와서 아이들과 젓가락으로 야끼소바를 집어들고 "이거 하늘로 날아가는 라퓨타 닮지 않았냐"며 깔깔거리던 기억이 난다. 라퓨타 성이 하늘로 올라가던 순간, 그 순간이 바로 '君をのせて' 노래가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라퓨타>는 곳곳에서 유럽의 영향이 발견되지만, 더 높은 하늘로 떠오르는 성의 마지막 모습은 삶의 허무함이 내재한 슬픔, 다시 말해 '모노노아와레'의 표현이다. 난 이 장면에서 13세기 일본 고시 모음집 <신코킨슈> 중 구슬픈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봄날 밤 꿈속 하늘에 떠 있는 다리
그 다리가 끊어졌다
그러자 산봉우리에 머물던 구름이 떠나더니
허공으로 사라졌네
낭만적인 사랑을 '하늘에 떠 있는' 다리에 비유한 이 시는 결국 '허공으로 사라지고'말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 미야자키월드, 187~188면.
<미야자키월드>에서 저자는 라퓨타가 하늘로 떠어로는 모습이 삶의 허무함이 내재한 슬픔을 표현한다고 한다. 나에게 이 허무함은 '아름답지만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상상은 아니지만 기억 속에서만 남아있는 곳, 함께 이 추억을 나누고 공유할 친구들도 찾을 수 없는 쓸쓸함'으로 다가온다(당시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라인으로 계속 연락을 했을텐데... 1998년의 초딩에게는 친구들과 해외에서 연락을 취할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분명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그때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다르다. 이것이 한 편으로는 삶의 허무함으로 다가온다.
헤테로토피아를 읽던 순간, 그리고 미야자키월드를 읽던 순간 나에게는 일본 초등학교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무 걱정도 슬픔도 없이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게 신기했던 순간. 초등학교 1~2학년때, 4~6학년 때의 기억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그 때의 체험이 나의 뇌에서 강렬하게 인식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후로 나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을 때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찾아본다. 그럼 잠시라도 그때의 걱정 없고 즐거웠던 시간 속에 몸을 풍덩 던져 넣는 느낌이 든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나 말고도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크로니아적인 기능을 하지 않았을까. 아마 나는 죽기 전까지 가끔, 틈틈이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들을 찾아보고 또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게 될 것 같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909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