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거스 플레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에 대한 서평
어렸을 때 책을 참 많이 읽었다. 엄마 손을 잡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던 기억이 많은데, 엄마는 보통 나를 교보문고의 한 코너에 데려다 주신 후 3~4시간 후에 오시곤 했다. 그때 많이 봤던 책들은 청소년을 위한 세계문학시리즈 같은 것들(ex. 삼총사, 해저2만리, 장발장 등등), 즉 문학책이었다. 문학 다음으로는 역사, 과학 도서를 즐겨봤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서점에서 3~4시간 방치된 훈련 덕분인지(?) 9~10살 즈음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크게 어려움 없이 읽었다. 3학년때 일본에서 1년동안 살 때 로마인 이야기 2권 '한니발 전쟁'을 들고가서 수십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로마군과 카르타고 군의 주요 전투 전황을 전부 암기하고, 로마군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뽕에 빠져들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아쉽게도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는 기간에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고등학교 문학도서에서 보이는 문학작품들이 가끔 반갑긴 했지만, 논술 준비를 위한 비문학도서 독서 이외에는 즐겁게 책을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대학 입학 이후에도 문학을 많이 접하지 못했다. 법학도였고, 사법고시를 준비했고, 로스쿨에 입학했고, 변호사시험을 준비했다. 변호사시험을 붙었을 때의 나이가 29살이었다.한마디로 정리하면 내 20대의 대부분은 수험생 신분이었고 마음편히 문학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물론 수험생이라고 책을 아예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법학도라는 정체성 이전에 스스로를 '사회과학도'라고 생각할만큼 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아서 사회과학 서적을 가끔 읽었었고, 대학 3학년 즈음에는 '미셸 푸코'에 대한 수업을 듣고 미셸 푸코 책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기도 했었다. 문학은 그래도 여전히 후순위였다.
20대의 대부분을 문학과 거리를 두고 살았지만, 2016년 로스쿨 3학년 재학 당시 지금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의 '문화산업법'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의 소개로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소설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공감, 상상력, 연민의 감정이 합리적인 공적 판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논증하며, 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정의로운 공적 담론과 민주주의 사회의 필수요소가 되는지를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문학책을 잘 접하지 않은지 1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읽은 <시적 정의>는 나에게 '문학의 필요성과 효용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겼고, 결국 이 책을 읽고 얻은 인사이트를 중간고사 대체 보고서에도 상당부분 인용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도 무언가를 얻고자 문학을 읽었던 적은 없다. 마치 친구들과 게임하는 게 재미있듯이, 재미를 위해 읽었던 것 같다. <시적 정의>는 재미를 넘어서 문학이 내 삶에 실체적인 유익을 줄 수 있구나라는 점을 처음 알게 해준 책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역시 문학이 내 삶에 실체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논증해준다. <시적 정의>는 합리적인 공적 판단, 정의로운 공적 담론,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시민의 역할 등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는 인문학과 신경과학적인 접근을 중심으로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가지 혜택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를 읽고 문학의 매력을 나름대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일단 문학은 제대로 쓰기가 어렵다.
비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책은 논증을 거친다. 어떠한 주장을 하고 실증적 방법이든 해석적 방법이든 근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점을 어필한다.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근거가 풍부하다면, 그리고 그것을 아직까지 아무도 캐치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면? 책 한 권 쓰기가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사회과학자들의 노력을 폄하하는게 결코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정말 뛰어난 문학은 조금 다르다. 소설을 예로 들면, 작가의 인생을 갈아넣은 것들이 많다. 토지 같은 대하소설을 예로 들지 않아도, 단 한권의 소설이라도 작가의 모든 것이 들어간 소설이 있다. 그리고 오래오래 남아서 동시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후세대까지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치는 소설이 있다. 역사 기록과 형식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시대의 어떠한 정신을 후세에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있다.
문학은 사유의 결정체다.
문학은 어쩌면 철학과 비슷하다. 중학생때 아버지 친구분 가족과 샤갈 전시회를 보러간 적이 있다. 아버지 친구분은 독일에서 10년 넘게 헤겔법철학을 전공하신 분이었는데, "아저씨 철학이 뭐예요?"라고 질문하니 "철학은 사유하고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 것"이라는 답을 해주셨었다.
문학도 철학과 마찬가지로 사유의 결과물이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철학은 문학보다 조금 더 직설적이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논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설처럼 철학책을 쓴다면 일반 대중들은 멘붕에 빠지게 된다. 각종 은유로 가득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괜히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철학보다 조금 더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직설적이지 않기 때문에 마냥 쉽지만도 않다. 문학을 압축하면 단 하나의 문장이 남을 수도 있다. 가령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라는 단 한 문장을 남기기 위해 수천, 수만마디의 문장과 스토리와 여러 등장인물들을 내세웠다.
문학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과거의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무슨 말을 했다고 해보자. 당시에는 멋있고 인상깊어도 그 철학자의 '명언'을 틈틈이 되새기지 않았다면 아무리 짧은 단 한문장의 명언이라도 10년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문학은 어떤가. 콩쥐 팥쥐, 흥부와 놀부를 비롯한 수많은 동화, 소설들은 초등학교때 이후로 읽은 적이 없는데 3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그 스토리를 잊어본 적이 없다. 아마 노인이 되어서도 스토리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뇌의 무슨 작용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인상깊게 본 소설의 주인공, 줄거리, 결말 등은 쉽게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탁월한 글쟁이들은 철학적인 논증보다 문학의 형식을 빌어 자신이 진정 남기고 싶은 것을 남기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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