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고칠이가 돈 벌 차례가 됐다. 그는 학창시절 아르바이트 한 건 단지 육체노동, 흔히 '노가다' 였다. 다른 일은 사실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은 번역, 학원 강사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숯불구이 가게에서 서빙 한 것과 공장에서 짐 나른 것, 한마디로 몸 써서 일한 거라서 과연 그가 사무직, 영업 관리 등의 기업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갔다.
고칠이가 처음으로 취업한 곳은 S식품 회사였다. 직종은 영업 직이었다. ‘영업이라서 몸으로 움직여서 하면 되겠지.' 라는 그만의 기대감을 가졌다. '이젠 아빠를 편하게 해드릴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고칠이는 미소를 머금으며 아빠께 취직했다고 자랑스레 전해드렸다.
그런데 아빠는 “그 회사 아는 분이 있는데….” 하시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고칠이 생각도 물어보지 않으셨다. 결국 그는 아빠의 정치적인 부드러운 입김으로 영업직이 아닌 채권 관리부서로 옮겨지고 말았다.
아빠는 사업을 하신 분이라서 여러 회사의 윗분들을 아시는 모양이었다. S식품회사는 큰 회사이고 거기에서 잘 견디면, 나중에 더 좋은 곳으로도 갈 수 있을 정도로 경력을 인정받는 곳이라고 아빠는 말씀하셨다.
BOOK PR 카나리아의 흔적
“고칠씨는 참 운도 좋으시네요. 제 생각엔 채권관리부는 기업의 요직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요, 공정성은 민주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덕목입니다. 공정성은 옳고 그른 것 등을 판단하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인 거죠. 만일 대학입시나 취업할 때,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고향사람이라고 해서 뽑아준다면, 공정성이 결여됐다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무조건 공정성이 옳다고는 볼 수 없답니다. 공정성의 반의어로 쓰이는 연고주의가 있어요. 연고주의는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을 중시하는 태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학연 지연 친척과 같은 혈연 등을 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측면이 많겠지만, 한 집단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제가 공정성을 어긴 게 아니라요, 아빠가 마음대로 한 거예요. 억울하네요.”
“그래서 공정성만이 옳고, 연고주의도 반드시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예요. 따라서 언론사 등 직원 채용시 무조건 공정성을 앞세워 연고주의를 무시하고 뽑을 수는 없을 겁니다.”
어렵게 보이는 채권관리부, 근데 그건 뭐하는 부서일까.
고칠이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일할 것 같은 그 부서에 배치된 것이다. 엘리트처럼 보이는 팀장이란 분이 고칠이에게 다가왔다. 1천 페이지 가량 돼 보이는 두꺼운 민법 책을 한 권 던져 주셨다.
팀장은 이거 공부해야 채권관리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거다. 그러면서 좋은 인연이 됐으면 한다고 여운을 남겼다.
'직장 초년생이라서 뭔지 모르겠지만, 민법 같은 거 공부하기 싫어서 서둘러 영업부서를 뽑는 이 회사에 취업했는데, 이게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