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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77 아이큐77 제5화 04 회사를 그만둬야겠어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by 이윤영

제5화


04


고칠이는 회사 내에서 유명인사 된 지 오래지 않아 다시 찬밥신세가 될 지경에 놓였다. 적응력이라는 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더 이상 옮겨갈 지점도 없었다. 이젠 타 도시로 옮겨가야 할 형편인데, 그렇게 먼 거리를 출퇴근한다는 건, 고칠이로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가 일을 못하는 건 아닌데, 옳고 그른 판단이 너무 융통성 없이 확실하다보니, 주변 동료들과 상관들 사이에 모가 난 모양이다.

처음에는 서로 괜찮은 것 같았는데, 6, 7개월이 지나면 고칠이의 이 같은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거다. 한마디로 융통성이 없어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고칠씨는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알죠. 그것쯤은요.”

“아, 그래요? 고칠씨는 실용주의에 대해 고민해 봤어야 했어요. 직장 상사들은 마케팅 경험이 많아서 도덕적인 명분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미국은 이러한 실용주의 덕분에 세계의 경제를 주름잡는 왕이 되었죠.”

“미국 사상가들 중에 듀이 라는 사람을 들어봤어요.”

“맞아요! 듀이(J. Dewey, 1859-1952)는 실용적인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라는 말까지 남겼답니다. 고칠씨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겠죠. 그는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되거나 비생산적인 지식은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게다가 그는 모든 지식과 생각들은 인간이 실생활에 적응하여 잘 살기 위한 도구라고 봤기 때문에, 도덕도 또한 유용성을 바탕으로 평가해야한다고 말했어요. 그는 시대나 사회에 유용하지 않은 도덕은 의미가 없어 바꾸거나 없애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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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보다 더 큰 고민이 생겼다. 국장급들이 하나 둘 회사를 떠나는 게 아닌가. 40대가 넘으면 대체로 국장이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봐주는 게 없는 실적 위주의 생존경쟁이 된다. 고칠이는 이 같은 사실을 몰랐었는데, 가장 친한 국장이 영업실적에 밀려 회사를 떠나게 되면서 알게 됐다.

그 국장이 떠난 지 한두 달 지났나, 고칠이는 자신의 미래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회사를 떠난 국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 국장은 그의 전화를 받더니 반가운 듯, 자기 회사에 놀러 오라는 거다.

국장은 회사를 그만두고, 모아놓은 돈으로 자동차 '카센터' 를 차렸다. 놀러 가보니, 국장은 예전의 국장이 아니었다. 친절 그 자체였고, 아침 점심밥 걸러 가며 정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국장은 고칠이에게 무시무시한 말을 남겼다. 자신은 잘 된 경우이고, 어떤 국장은 지금 거의 집에서 아기 보며 놀고 있다는 거다. 나이 들어서 세상 밖으로 나오면 정말 할 게 없다는 것이다. 정말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말이었다.

또 그 국장 말 중에 이 말이 기억난다. 회사를 떠난 국장 가운데 가장 잘 된 경우는 현재 크게 모텔 업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엄청난 갑부라서 하게 된 거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나.

교육전문회사에 와서 그만두고 잘 된 경우가 자동차 업종과 숙박업이라니, 고지식한 고칠이에게는 도저히 납득가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도 이제는 이 회사 8년차, 국장이 되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둘 때가 된 거였다. 국장이 되어도 그 험난한 실적위주의 생존쟁탈전을 벌일 심성도 못 된다는 것을 고칠이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게다가 벌어놓은 돈도 많지 않아서 걱정은 태산이었다.


내일이라도 회사중역이 와서, '고칠씨는 이제 그만둬.' 라는 환청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그 와중에도 또 국장 한 명이 영업실적이 모자라 회사를 떠났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렇게 힘이 세어 보였던 국장도 나약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는 자신도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 것이다.

고칠이는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이리저리 알아 봤다. 사교육시장이 넓다보니, 그는 그래도 자신이 생겼다네.


그는 부모님께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고, 설득했으나,

부모님은 회사 그만두는 건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계속 회사를 다녔다가는 회사 국장 꼴 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도 너무 지쳐서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의욕도 상실했고, 의미도 못 느꼈다. 실패의 위험이고 뭐고 무작정 그만두고 나와 쉰 후 일하고 싶어진 거다.

고칠이 동생의 말이면 그래도 귀 기울였던 아빠 엄마여서, 그는 동생을 찾아가 아빠 엄마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형이 회사일로 너무 지쳐서 그럴 수 있고, 한 번 인생을 자영업으로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이 들어."

동생은 고칠이의 말을 들어줬다. 그는 이때만큼은 동생이 너무 고마웠다. 마침내 그는 회사를 그만뒀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의무론적 윤리설은 이성과 사유를 중시하는 흐름에서 동기를 중요시하는 거예요. 반면에 목적론적 윤리설은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흐름에서 결과를 중시하겠죠. 의무론적 윤리는 행위의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동기가 도덕적이면 그 행위는 도덕적인 거겠죠. 그리고 목적론적 윤리는 항상 옳은 법칙은 없지만, 실용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옳은 윤리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도 듀이의 실용주의나 공리주의의 입장일 듯싶어요. 고칠씨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대한 도덕적인 측면을 논한다면, 의무론적 윤리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동기적으로 이건 아니다 싶은 거겠죠.”


“끊임없이 무언가를 도전한다는 게 너무 힘드네요. 지겹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40대들은 개인 사업을 할지, 회사에 남아 승진해야 하는 건지에 대한 고민에 머리카락이 수없이 빠졌을 겁니다. 그런데 많은 중년남자들이 이런 말들을 하더라고요. 승진이요? 회사 동료들 10명이 한두 자리 놓고, 싸울 수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는 거죠. 남들보다 열심히 학교 공부도 했는데, 결국은 회의와 허무가 밀려오는 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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