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애가 일부러 사업 실패한 건 아니잖아. 어른이 돼서 한창때인 동생한테 그 정도도 못 해주니? 계좌번호 알려줄 테니까 삼백 정도 보내라. 또 애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스마트폰 너머로 몇 번 대화가 오갔지만, 결론은 같았다.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사립 효영 여자 고등학교 윤리 담당 교사인 수연은 찌르르 울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짚었다. 한숨부터 나왔다. 그의 가족에게 두 살 아래 남동생은 ‘애’고 수연은 ‘어른’이었다. 돈 나갈 일이 너무 많았다. 그중 대부분은 수연의 몫이 아니었다.
서울 강남 대치동에 있는 사립 효영 여자 고등학교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명문 여고였다. 학생들은 교직원 중, 수연만이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잠입한 A와 B도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애들이 떠드는 내용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야, 조용히 해. 수업 시작하잖아. 아이들이 서로에게 속닥거리며 주의 주었다. 수연이 몇몇 아이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며 출석부를 펼쳤다. 그는 침묵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았다. 짧은 침묵과 부드러운 미소 몇 번에 교실은 단번에 조용해졌다. 얼마 되지 않는, 소위 불량 학생들도 수연의 수업에는 조용했다. 수연이 그들을 존중하듯 그들도 수연을 존중했다. 이 학교에 부임한 지 한 달 차인 수연에게 학생들은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사흘 전 스승의 날은 거의 수연의 날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제자들의 호의를 적당한 선에서 거절하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온화하고 지혜로운 그를 아이들은 어미 닭 뒤쫓는 병아리처럼 따랐다.
A과 B도 여느 애들과 비슷했다. 그들은 효영여고 2학년 8반에 무리 없이 스며들었다. 일이 해결되는 대로 전학 가겠지만. A이 갈색 머리칼을 꼬면서 한숨을 폭 내쉬는 걸 보고 B가 어깨에 머릴 기댔다. 딱, 따각. 따다닥. 앞에서 수연의 판서가 한참이었다. 봄기운이 아이들의 눈꺼풀을 무겁게 했지만 졸거나 자세가 무너지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평화로웠다. 수연은 그야말로, 완벽한 어른이었다. 그래서, B와 함께 효영여고에 파견된 이유가 김수연 교사라는 사실은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간계 표준시로 3년 전이다. 만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일어났다. 사내 따돌림으로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회사원이 괴물로 변해, 기물파손 및 상해 등을 저지른 것이다. 저승문을 관리하던 공무원이 깜빡 존 사이, 악귀 몇몇이 몰래 굴러나간 탓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숙주로 했다. 그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먹이로 쑥쑥 자라나, 빠져나갈 즈음 숙주를 괴물로 만드는 것이다.
저승 수뇌부는 해당 문지기를 파면했다. 관련자 기억을 지우고 피해를 복구하는 데만 무수한 자원이 들어갔다. 이승 정부에서 항의한 건 당연한 순서였다. 이후 염라대왕은 숙련된 차사들을 파견해 악귀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큰 인간을 밀착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물지 않은 악귀를 억지로 뽑아내면 영혼이 다친다. 회수꾼의 임무는 악귀가 활동을 시작할 때, 가능한 한 피해 없이 사로잡아 저승문 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악귀 회수는 9할 8푼 정도 완료되었다. 수연에게 붙은 악귀는 크게 해가 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베테랑들에겐 귀찮은 수준이었다. 초짜 회수꾼인 B와 A에게 이 일이 내려온 이유였다.
“아, 기분 더럽네. 우리 아까 체육이었잖아.”
“으…. 진짜 싫다. 고생했어.”
“귀 뚫으면 술집 여자래. 남자친구 허락받으라나? 그렇다고 남자친구 사귀면 걸레니, 뭐니 할 거면서.”
“웩. 진짜 글러 먹은 놈이다.”
금요일 7교시 윤리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 시간이었다. A와 B은 지난주인 3월 넷째 주에 전학을 왔다. 그들은 대치동 담당 차사의 조작으로, 무수한 경쟁률을 뚫고 수연의 또래 상담부에 가입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크고 둥근 흰 탁자에 모여앉아 조잘조잘 떠들었다. B는 그들 사이에 껴 뒷담화를 고스란히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입을 꾹 다문 A의 손을 잡은 채였다. 분노가 한계에 다다른 A이 ‘한 방에 엄마 곁으로’를 외치는 순간, 이번 임무는 똥이 될 게 분명했다. B는 A이 그 문장을 외칠 때 일어난 참사를 똑똑히 기억했다. A은 딸바보 염라대왕의 수양딸이었다.
B가 A를 진정시키는 중, 전화를 마친 수연이 상담실로 들어왔다. 또래 상담부는 수다로 시작해 눈물로 끝나곤 했다. 수연은 내면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재능이 탁월했다. 애들은 담당 선생을 부모 이상으로 믿었다. 수연은 오늘따라 자기들끼리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을 보며 고갤 갸웃거렸다. 그들은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고 손을 꼼지락거리기도 했다. 당당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울, B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쌤, 체육2쌤 좀 이상하지 않아요?”
효영여고는 체육 교사가 둘인데,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5반부터 8반을 담당하는 멀끔한 남자를 떠올렸다. 생긴 것만 멀끔하지, 하는 짓은 잡배나 다름없는 자였다. 여선생들 사이에선 상종 못 할 인간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팽배했다. 다소 경솔해 쎄한 것은 사실이나, 아이들이 그것만으로 이런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수연이 차분히 이유를 묻자,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발을 시작했다. 수연은 경악을 누르고 차분히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은 분노에 차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하고 누가 들을까 봐 주위를 살피기도 했다. 거짓말이라기엔 증언이 일관적이었다. 애들이 이런 일로 장난을 칠 철부지도 아니었다. 수연의 낯빛이 심각해지자 애들이 모든 증언에 한 치 거짓이 없다고, 걸 수 있는 모든 걸 걸고 맹세했다. 어느 아이는 자기 말이 거짓말이라면 체육2에게 자기를 일러바쳐도 된다고 했다.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은 야간자율학습 교실로 이동했다. 쳇바퀴 도는 일상에 변화는 없었다.
평소처럼 시간이 지났고, 이제 시간은 4월 말이었다. 초보 회수꾼인 두 사람의 일상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틈날 때마다 A의 어깨를 주물럭거리는 체육만 빼면 큰 문제가 없었다. 날카롭게 생긴 B보다 맹하게 생긴 A이 만만한 모양이었다. B는 체육이 A에게 천박한 농담을 지껄일 때마다, 그의 콧구멍에 대왕 두리안을 집어넣는 상상을 했다. 염라대왕 프리패스로 지옥 풀코스를 돌게 할까, 고민도 했다.
쾅!
A과 B가 동시에 고갤 번쩍 들었다. 숙주가 괴물로 각성할 때 나는 소리였다. 벌떡 일어난 A의 뺨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자다 깬 것이다. 저 급똥 때문에 화장실이요! 저도요! B와 A은 각자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달려 나왔다. 손목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달렸다. 교장실이었다. 뒤늦게 도착했더니 부서진 문짝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트로피나 상패 따위가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정수리 가발이 벗겨진 교장은 구석에 엎어진 채 의식이 없었다. B가 재빨리 맥박을 확인했다. 살아있었다. A이 품에서 붉은 실을 꺼냈다. 길이에 제한이 없는 염사(炎絲)였다. B의 손에 바늘을 닮은 창이 쥐어졌다. 그가 바늘귀 부분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둘의 옷이 수습 회수꾼 전용 학창의로 바뀌어 펄럭였다.
A의 염사가 학교 울타리를 감싸고 영역을 선포했다. 깨진 창문 너머로 길쭉한 괴성이 들렸다. 난생처음 보는 괴물의 등장에 체육 수업 중이던 6반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A이 민첩한 몸놀림으로 운동장에 뛰어내렸다. 바늘창을 쥔 B도 마찬가지였다.
수연은 높이 약 5미터에 이르는 인간형 괴물이 되었다. 초록색 피부에 상어 같은 이빨을 한 채,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 동화에 나오는 마녀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쿵, 하고 땅이 패었다. B가 사람들을 학교 울타리 쪽으로 피신시킬 동안 A이 괴물의 시선을 끌었다. 가느다란 붉은 실이 마녀의 발목을 붙잡아 묶었다. 시뻘건 실이 덩굴처럼 기어오르며 움직임을 속박했다. B가 민간인 보호 술식을 펼칠 동안 버텨야 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음습하게 심령현상이나 일으키는, 잡된 악귀와 맥이 달랐다. 그가 한 번 포효하면 전교의 유리창이 깨져나가고 땅이 우르릉 울었다.
염사는 벨지언정 끊어지지 않는다. A은 염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몇 안 되는 자였다. B가 경악했다. A이 밀리고 있었다. 마녀가 실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A은 속절없이 끌려 날아가 흙바닥에 굴렀다. A아! B가 달려 나가지 못한 건, 겁에 질린 체육2가 옷자락을 붙잡은 탓이었다.
“유, 윤B…!”
“아오, 이놈은 도움이 되는 일이 없어!”
그를 발로 차 구석으로 던져넣었다.
B가 A을 일으키는데, 곧장 마녀의 공격이 이어졌다. 날카로운 쇠사슬이 바로 지척에 내리꽂혔다. 두 사람은 몸을 굴려 가까스로 피했다. 미간을 좁혔다. 검은 사슬이 보호 주술 쪽을 향했다. 겁에 질린 나머지 주술을 벗어나 허위허위 달려오는 체육2가 표적이었다. 두 회수꾼이 달려 나갔으나 늦었다. 체육2의 팔다리가 검은 사슬로 묶여 있었다. 꼭두각시 같았다. A이 이마를 짚었다. 쇠사슬에 체육2가 맥 없이 끌려갔다. 그가 오리처럼 소리를 질렀다. 체육2의 사지에 마녀의 쇠사슬이 감겼다. 그 틈을 타 A이 마녀의 팔다리를 묶었다. 힘차게 잡아당기자 마녀의 손목과 발목에 금이 갔다.
“A아, 그만!”
B가 새된 소리로 외쳤다.
마녀의 몸에 금이 가는 만큼, 체육2의 팔다리를 묶은 사슬이 조여들었다. 멱 따는 듯한 비명이 인상적이었다. 마녀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가 체육2를 내던졌다. A이 받기 무섭게, 쇠사슬이 쇄도했다. B가 창을 가로로 들고 막아섰다. 캉, 하는 소리가 울리고 B가 뒤로 밀렸다. A이 체육2를 보호 주술 쪽으로 던져넣으려 했지만, 그는 탱탱볼처럼 튕기더니 철푸덕 쓰러졌다.
“미치겠네, 사슬이 악귀 거라서 주술이 밀어내나 봐!”
B가 신속하게 원인을 파악했다. B에게 쿵쿵 다가서는 마녀를 A이 염사로 묶어 당겼다. 마녀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발목에 금이 가 있었다. 체육2의 비명을 듣고 실을 풀었다. B가 몸을 피한 뒤였다. 괴물이 된 수연은 제자를 대하는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쌤! 정신 차려요!”
두 사람이 몸을 굴려 사슬을 피했다. 벌떡 일어나는 둘의 얼굴에 누군가가 모래를 뿌렸다. 사소해도,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B가 눈을 비빌 때 마녀가 주먹을 휘둘렀다.
“B 언니!”
B가 저만치 날아가는 꼴을 보고 A이 외쳤다. 그들에게 모래를 뿌린 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체육2였다. 눈알이 맹한 게 무언가에게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체육2의 뒷목을 후려갈겨 기절시키려 하는 시도가 실패했다. B가 일어선 뒤로도, 그는 좀비처럼 끈질기게 방해를 이어나갔다. 성가신 모기가 왱왱거리는 것 같았다.
“윤리쌤! 잡술에 흔들리면 안 돼요!”
A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악귀에 잠식된 자는 자기 욕구를 최우선으로 여기게 된다. 괴물의 모습은 그가 품은 욕망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였다. 그들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자기가 깨우쳐 악귀를 이기거나 물리력으로 의식을 잃거나. 대개 후자였다.
윤리쌤이라고? 보호 주술 안에 있는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바깥의 난리에, 학교 안에 있던 사람들도 뛰쳐나왔다. B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 보호 주술을 걸기도 전, 쇠사슬이 어른들을 휘감았다. 아이들이 놀라 흩어졌다. B는 아이들 쪽에 있던 주술을 해제하고 몇 남지 않은 어른들에게 걸었다. 마녀가 된 수연에게 조종당하는 이들만 서른 명이 넘었다. 그들의 방해 공작이 거슬려, 수연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주는 게 쉽지 않았다. 조종당하는 이들을 사지가 찢겨 죽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B와 A이 밀어붙이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효영여고 아이들은 뭣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직감적으로 알았다. 마녀를 닮은 저 괴물은 윤리쌤인 수연이고, 두 회수꾼을 도와야 이 상황이 끝난다는 사실을. 때론 비현실적인 현실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B와 A을 방해하는 어른들을 서너 명끼리 붙들고 늘어졌다. 어른들이 허수아비 꼴이 된 채 떼쓰는 꼬마처럼 발버둥 치는 꼴을 언제 또 보겠는가. A이 이리저리 날아가 처박힐 때마다 힉, 하고 숨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마녀의 사슬은 아이들을 피해갔다. 우연이 아니었다. 검은 쇠사슬은 B와 A, 어른들만 노리고 있었다. 아이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비틀비틀 일어나 기침하는 A과 B를 또래 애들이 둘러싸 끌어안았다. 그들을 노리던 사슬이 길을 잃고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고양이 꼬리처럼 땅을 쨍강쨍강 두드리는 꼴을 보고 학생 한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괴물의 표면에 금이 갔다. 꼭두각시 어른들은 괴로워하지 않았다. 틈새에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보였다. 쇠사슬은 애들을 감싼 채 우왕좌왕했다. 마녀에게 간 금이 더욱 선명해졌다. 유리가 깨지듯 날카로운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A의 염사가 파편을 쳐냈다. 두 회수꾼은 그 틈에서 희망을 보았다. 짧은 희망이었다. 금 간 곳에서 나온 바람이 두 사람을 끌어다 틈으로 욱여넣었으니.
어두웠다. A은 손에 닿는 온기로 B가 곁에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B도 마찬가지였다. 적막하고 기운이 사방을 덮은 어둠에 도사리고 있었다.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조차 알 수 없었다. 그들을 빨아들인 균열이 급하게 닫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잠깐, A아. 염라대왕님 부르지 마. 선배들이 오겠지.”
“바깥 상황을 모르니까 불안해.”
“내 생각인데, 우리 처지를 좀 더 불안해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중간계 표준시를 가리키는 손목시계가 말썽이었다. 내장된 나침반 기능도 엉망이 됐다. B가 창을 휘둘러 공간을 베었다. 이 검은 공간은 양파 같은 구조인가 보다. 한 겹 한 겹을 썰어도 도저히 밖이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 된 수연의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의미 없이 두리번거리기를 멈췄다. A이 염사를 하나로 뭉쳐 불꽃을 피워냈다. 아른아른한 불빛은 주변을 흐릿하게 밝혔다. 무수히 많은 문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각자 다른 모양이었다. 하나는 장난감 집처럼 작은 문이고 하나는 여느 방문 같은 문이고 다른 건 교실 문처럼 미닫이고…. B는 그것들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가는 문이길 바라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으나, 이미 A이 문짝 하나를 열어버렸다. B가 경악할 때 그는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B가 후다닥 쫓았다.
“어쩌자고 문을 열었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A이 변명했다. B는 그의 다혈질을 익히 알았으므로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널찍한 아파트 안에 있었다. 명절인지 여자들이 전을 부치고 있었다. 남자들은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다고 불평했다. 달력을 보니 10년도 더 전이었다.
아, 윤리쌤이다. A이 가리켰다. 수연을 작게 축소해놓은 것 같은 고등학생 소녀가 가스 버너에 불을 붙이고 프라이팬에 명태전을 올렸다. 기름 냄새가 과해서 속이 느글느글했다. B와 A은 바삐 오가는 여자들이 자기들을 통과하는 걸 보고 이 상황이 수연의 기억이나 환상이라고 추측했다.
어린 수연이 가방을 둔 방으로 가 종종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 A4보다 약간 큰 종이가 들려 있었다. 기웃거리며 보니, 만점짜리 수학 시험지였다. 그는 여자인 가족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에게 가서 시험지를 슬쩍 내밀었다.
“할머니, 저 이거 수학 다 맞은 거예요.”
어투가 조심스러웠다. 전반적으로 할머니가 경제력을 가진 듯했다. 모두가 그에게 굽실거리면 노파는 슬그머니 봉투를 밀어주었다. 어쨌든, 노인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수연의 시험지를 보고 다시 전을 부치는 데 열중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그러는데, 의대도 충분히 갈 수 있는 성적이라고…. 수능 점수도 그렇고요.”
수연의 어머니로 보이는 자가 딸애의 작태를 보고 도끼눈을 떴다. 수연은 기어코 할머니 손에 시험지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소릴 꽥 지르며 시험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계집애가 대학은 무슨! 아주 간이 부었구나. 빨리 회사 들어가서 우리 수현이 뒷바라지할 생각은 안 하고. 이 년이 동생한테 갈 머릴 싹 다 훔쳐 나와서 우리 수현이 고생하는 거 아니냐! 여자애가 이렇게 드세서야…!”
노인이 소리 지르다 말고 콜록콜록 기침했다. 이른 새벽부터 기름 냄새를 맡느라 무리한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남자들의 시선이 주방으로 쏠렸다. 지긋지긋하다는 눈치였다. 수연의 남동생인 수현이 귀찮다는 기색으로 일어나 다가왔다.
“할머니, 괜찮아요?”
노인은 귀한 손자가 주방에 출입하는 일이 없도록 입을 다물었다. 손자는 쯧, 혀를 차고 다시 남자들이 있는 거실로 돌아갔다.
“어멈아, 이거 쓰레기 치워라.”
수연의 어머니가 후다닥 와서 찢어진 시험지 조각을 주웠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딸애를 데리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수연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했다. 저만치서 문이 닫히는 경첩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B와 A은 다시 검은 공간에 있었다.
사방에 문이 가득했다. 그들이 들어간 문은 이미 사라진 채였다. 두 사람은 이 문들이 수연이 품은 한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의 형상화는 회수꾼 교육 때 드문 경우라고 배운 기억이 났다.
“B 언니, 원래 보기만 해도 한이 사라지나?”
“어쩌면, 그냥 알아주길 바란 걸지도 몰라. 다른 거 열어보자.”
대개 비슷한 상황이었다. 시간선이 제멋대로였다. 수연은 네 살배기가 되기도 하고 훌쩍 큰 어른이 되기도 했다. 그는 무얼 하든 동생과 비교당했고 마땅히 달고 태어나야 했을 게 없다는 이유로 홀대받았다. 수연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회사에 회계사로 취직했다. 가족들은 그에게 최초로 관심을 보였다.
연봉이 얼마데? 괜찮은 남자는 있고? 수현이 학비 좀 보태라. 할머니께서 아주 편찮으셔. 할머니 병원비 좀 도와다오. 누나, 나 용돈 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연은 그들의 관심이 자기 쓸모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사범대에 입학해 교원 자격증을 땄다. 둘러싼 인간들이 그 돈으로 가족이나 도우라고 몇 번이고 꾸짖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남들이 말하길 다소 늦은 나이에 그는 사립 효영여고에 당당히 들어왔다. EBS에서 강사로 이름을 떨친 덕에, 사립학교에 그 흔하다는 로비 하나 없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화장 좀 하라고 잔소리하는 학년 부장과 돈 받느라 바쁜 교장, 기타 여러 쭉정이 사이에서 수연은 단연 발군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기의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돌보는 아이들은 수연의 모든 것이었다. 효영여고 학생들은 그를 존중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들은 단번에, 수연을 구성하는 핵심에 자리 잡았다.
마지막 문이 남았다. B와 A은 수연이 받은 비인간적인 대우에 씩씩거리면서 문을 열었다. 익숙한 장소였다. 효영여고 교장실이었다. 수연은 어마어마한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게 다 증언이에요. 피해자인 졸업생도 많습니다. 체육 선생님이 한 행동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입니다.”
교장의 시큰둥한 반응은 수연이 교육청 얘길 꺼낼 때가 되어서야 그쳤다.
“김선생님, 이런 일로 교육청 공무원을 피곤하게 하면 학교가 욕먹습니다. 체육 선생님이 애들 자기소개서나 스펙 잘 봐준다고 소문난 거 아시잖습니까. 이 정도는 애들이 감수해야지요. 인서울 대학 가려는 애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서울에서 학교 이미지가 중요한 거 다 아시면서 왜 이러시는지….”
수연은 끈질기게 교장에게 의견을 피력했다. 교장이 봉급을 올려줄 테니 적당히 굴라고 할 때, 수연은 폭발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처한 환경이, 악귀의 싹을 틔웠다.
마지막 문이 사라졌다. A과 B는 문 너머에 숨어있는 악귀를 발견했다. 귀신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것은 작은 씨앗이었다. 이미 싹을 틔워, 거대한 가지를 이루고 있었다. 말라 비틀어진 떡잎이 줄기 밑동에 붙어 있었다.
악귀는 이미 뿌리가 깊어 보였다. 맺힌 열매에서 끈끈하고 검붉은 진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농축되어 시각화한 분노였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파괴력이 강한 악귀는 땅에 상처가 나는 것을 감수해도 뿌리를 뽑는 게 원칙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땅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자아 존중이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고갤 끄덕였다. B가 나무 밑동을 단번에 베었다. A이 염사로 그 단면을 꿰었다. 우지끈 넘어간 나무가 빛으로 조각나 사라졌다. 이제 나무는 더 가지를 뻗지 못할 것이다. 가지를 뻗지 못한 나무의 뿌리가, 알아서 사라지거나 하길 바라야 했다. A이 뿌리 일부를 잘라 허리춤에 달린 가방에 넣었다. 공간이 천천히 부서졌다. 시야가 눈 깜빡할 새 바뀌었다.
그들은 엉망이 된 운동장 한가운데 있었다. 껍질만 남은 마녀 괴물은 공격을 멈췄다. 효영여고 아이들이 괴물이 된 수연을 다 같이 끌어안고 있었다. 빈틈없는 포옹에, 수연은 공격할 의지를 잊고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사그라들며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고깔모자가 사라지고 초록색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그때까지 수연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A아! B야! 공간의 틈이 열리고 선배 회수꾼들이 우당탕 달려 나왔다. 그들은 엉망진창 먼지투성이인 후배들을 보고 목 뒤를 잡았다. 얘들아, 미안하다. 위험 등급이 잘못 측정됐다더라. 다친 곳 없냐? 아니, 이미 다쳤구나. 많이 다쳤냐? 부러진 데는 없고? 그들이 쉴 틈 없이 조잘거리면서 두 사람의 안녕을 살폈다. 악귀는? A이 뿌리 조각을 내밀었다. 팀장이 배송 스티커를 붙여 공간 틈으로 던져넣었다. 지옥문 안으로 곧장 배송될 것이었다. 뿌리 다 뽑았지? 아, 당연하죠. 완전 깔끔하게 뽑았어요. 거짓말 못 하는 A을 대신해 B가 답했다.
“B야, A아.”
정신을 되찾은 수연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다가왔다. 두 사람의 학창의가 펄럭이더니, 원래처럼 교복으로 바뀌었다.
“윤리쌤.”
“너희가 날 되돌려 줬구나.”
“음, 아마도요.”
회수꾼들이 공간을 복구하고 목격자들의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다. 괴물로 변한 자의 기억은 담당 회수꾼이 지우는 게 관례였다. 수연이 두 사람을 끌어당겨 안았다. 흔들림 없이 단단한 팔이 따스했다.
“쌤, 기억을 지워야 해요. 저희는 원래부터 없던 일로 될 테고요. 중간계 사람들은 저희 존재를 알면 안 되거든요.”
A이 우울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수연이 조용히 웃었다. 당장의 분노가 걷힌 그는 한결 후련해 보였다. 회수꾼들이 효영여고 아이들을 교실로 옮기고 있었다.
“근데 우린 안 그럴 거예요.”
“B 언니?”
A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B가 A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A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꿈으로 남게 할게요. 깜빡 졸다가 꾼 꿈이요.”
수연이 하하 웃었다. 그가 품에 안긴 두 제자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회수꾼들이 이제 슬슬 가 봐야 한다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수연이 제자들을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수연을 잠재우고 교실에 데려다 놓았다. 선배 회수꾼들이 허공을 딛고 서 있었다. 문제 있어? 아뇨, 없어요. A이 답했다. 팀장이 공간에 금을 냈다. 중간계 표준시에 맞춘 손목시계가 이제 똑바로 작동했다. 그들은 자박자박 걸어 틈새로 들어갔다. 틈이 닫혔다. 자는 척하던 수연이 눈을 떴다. 이렇게 특별한 제자들은 다신 없을 것이다.
야, 조용히 해. 수업 시작하잖아. 아이들이 서로에게 속닥거리며 주의 주었다. 수연이 몇몇 아이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며 출석부를 펼쳤다. 애들이 따라서 교과서를 넘기는 걸 보면서, 수연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애들이 좋은 일이 있냐며 재잘재잘 물었다. 수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짐 싸던 교장이 그를 보고 흠칫 놀라 눈을 깔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말해줄까 말까 즐겁게 고민했다. 체육 선생 고발 사건이 지나가고, 체육과 교장을 비롯한 몇몇 이가 파면당했다. 그들의 업보는 고작 그만한 징계로 청산될 게 아니었으나, 아이들은 전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학교에 다녔다.
수연이 분필을 집어 칠판을 두드렸다. 딱, 따각, 따다다닥.
2022,06.13. 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