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피터팬을 부른다>, 전후치 씀, 동아 출판사
유토피아가 어떤 세상이냐는 물음의 대답은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디스토피아가 어떤 세상이냐는 물음에 나오는 답은 대개 엇비슷하다. 빈곤과 소외, 불평등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아마 불행과 괴로움은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유일한 언어일 것이다. 행복을 모르는 이도 고 통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안다. 안락함은 개개인의 지향이나 열악함은 우리 행동의 가장 깊은 원동력이다. 유토피아를 향해 사는 사람보다는 디스토피아를 피해 사는 사람이 많다는 관점은 꽤 보편적이다. 디스토피아가 정확히 무엇인지 얘기하고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모두에게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어도 불행으로부터의 보호는 약속하는 세상을 만드는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은 으레 실험적이고 체제 비판적인 성향을 띠기 마련이다. 웹소설은 순간의 유행이나 따르는 유 한 이야기라는 오해를 종종 받지만, 사실 이 시점의 사회 문제에 예민한 장르문학이다. 마법적 판타지를 더한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 는 웹소설의 단골 소재고, 보통 주인공의 독보적인 무언가를 부각하는 데 쓰인다. 전후치 작가가 쓴 <우리는 피터팬을 부른다>는 이러한 문법을 독특하게 비껴간다. 계급제 디스토피아로 성장한 가상의 대한민국이 배경이라는 걸 제하면 그 어떤 마법적 판타지도 없다. 작품은 주인공의 선함을 조명하면서도 그 선함이 빛나는 부조리함을 간과하지 않는다. 복잡한 액자식 구성에, 등장하는 이름만 서른 개가 넘어가는 학원물이다.
<우리는 피터팬을 부른다>는 절망과 부조리를 장작 삼아 무모한 희망으로 타오르는 이야기다. 아마 그 점이 마니아층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불꽃 같은 영웅이 필요하다. 설령 그가 가상의 인물이라도 말이다. 작품 속 대한민국은 끝도 없는 ‘벽’으로 되어 있다. 작가는 대입 수험 생활 당시 수기로 이 글을 썼다. 부모 가 몇 번이고 찢어버려도 이 악물고 썼다는 이 소설에 따르면 디스토피아는 무수한 벽이 도미노처럼 줄을 선 세상이다. 툭 건드리면 무 너지겠지만 누구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해 견고해진 도미노의 나열이다. 시작을 끊는 것이 가장 어렵다. 제아무리 단단한 무기도 때때로 힘을 잃곤 한다. 그러나 도미노는 결국 연대와 사랑 앞에서 흔 들린다. 작중 부조리라는 벽에 금을 내는 것은 결국 사소해 보이는 한 사람의 변화였다. 그 작은 변화가 디스토피아 탈출 열쇠 중 하나 라고 작가는 외친다. 그의 주장에 힘을 싣고자 계급, 한계, 투쟁이라 는 단어를 글감으로 이 글을 쓴다.
1계급부터 6계급까지 존재하는 평행세계의 대한민국. 드높고 웅장한 장벽이 상류 계급의 도시와 하류 계급의 생존지를 분리하는 세상이다. 5계급부터는 모든 자격증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합법적인 직업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5계급으로 태어난 아이가 사람다운 삶에 진입하는 길은 한국 특수 평등 미래 고등학교(이하 미래고)에 입학, 졸업해 계급을 갈아치우는 것이 전부다. 1년에 30명을 겨우 뽑는 입시에 하층 계급 아이들은 꼬박 7년을 목숨 걸고 매달린다. 계급을 올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경쟁률이 300:1인 입학시험에 그들은 밥과 국을 섞어 갈아 마시면서 머릿속에 답을 욱여넣는다. 17세 부터 21세까지 나이 제한이 있고 시험 기회는 단 세 번이다. 매달 모의고사마다 한강에 떨어져 죽는 애들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없다. 등장인물들은 13년 전, 미래고에 입학해 ‘D반의 누군가’로 살았던 어른들이다.
그들의 삶은 불순 분자 ’천이플‘의 등장으로 뒤집힌다. 멸시와 차별 이 가득한 학교를 휘젓고 다니는 5계급 여자애. 경계를 흐트러뜨리던 그의 죽음 이후 13년이 지난 시점에, 당시를 선명하게 그리는 웹소설을 익명의 작가가 연재한다. 계급제를 사랑하는 정부가 두 눈을 시퍼 렇게 뜨고 있는 와중 그것이 실화라고 주장하면서. 기자인 아정은 웹소설을 들여다보며 본인이 그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13년 전 일들을 뒤쫓는다. 그가 웹소설의 등장인물들을 실제로 만나 취재하는 게 겉 이야기다. 천이플이 미래고에 입학하고 죽기 직전까지 벌인 사건들을 그의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기록한 웹소설 자체가 액자 속 이야기가 된다. 천이플은 견고한 계급을 휘저어 놓지 만, 악당과 싸우진 않는다. 대신 “악당까지 몰입시킬 만큼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신나지만, 누군가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모험 이야기”라고 어른이 된 누군가는 말한다.
“걸레짝 같던 시간이 그 애를 통과하는 순간 새로워졌는데.”
이 작품은 남은 사람들이 천이플을 기억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그 안에서 견고한 도미노를 간지럽히고 스러진 어린 촛불을 상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손가락을 놀릴 용기를 내겠다. 이 작품의 디스토피아가 특별한 까닭을 네 가지로 추려 얘기 해보려 한다. 굵게 표시한 부분은 작품에서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힌다.
같은 계급들끼리도 서로를 벌레 취급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
입학이 보장하는 건 안전한 불평등이다. A반은 1계급, D반은 4~6 계급. 적어도 바퀴벌레를 씹어먹어야 하는 빈곤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A반 학생들은 결코 D반 아이들을 학우로 보지 않는다. 차라리 벌레로 보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누군가는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 계급은 무수한 투쟁의 역사로 빚어졌다. 큰 싸움으로 계급이 나뉘면 그 계급 안에서 조금 더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계급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세분되었다. 난이도 차이만 있을 뿐, 투쟁은 누구 하나의 것이 아니다. 지나가는 엑스트라도 그 삶의 투사라고 해야 할 것 이다.
이는 비단 D반과 A반 사이가 아니라 A반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네 A반 등장인물을 계급별로 나열해 소개하겠다. 재벌 집 후계자 인 선우중빈, 중빈의 동복동생인 선우홍빈, 홍빈의 배다른 형이자 회장의 혼외자인 곽상현, 홍빈의 친구인 박준서. 그들은 모두 1계급이나 미묘한 높낮이가 있다. 중빈은 상현을 투명 인간 취급하고 홍빈은 상현을 ‘불량 콘돔의 부산물’이라고 모욕한다. 준서는 홍빈의 친구지만 ‘떨어지는’ 집안 출신이라, 친구 잘 만나 신세 편 기생충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신분증에 찍힌 숫자는 똑같이 1인데 그들은 다르게 취급받는다. 계급은 섬세하게 나뉘어 있고 종류도 여럿이다. 그중에는 성별이라는 가림막도 있다.
벽 밖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잇다. 4계급으로 태어난 눈에 띄게 예쁜 여자애와 건장한 체구인 5계급 남자애. 둘 중 누가 더 불행한지는 본인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전자는 오경아, 후자는 백찬영이다. 작중에는 야생적인 성차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중빈은 경아를 강간했 다. 4계급은 3계급 이상 대리인이 있어야 경찰에 신고할 수 있었다. 기적적인 신고에 중빈이 준 대답은 조직폭력배의 위협과 ‘너만 빼고 다 내 편’이라는 조롱이었다. 찬영은 강간의 위험은 피할 수 있었으나 지옥 같은 아동 보호소에서 탈출해 어릴 적부터 폭력배의 부하로 일하며 마약을 날라야 했다. 생살에 칼이 박힌 것도 여러 번이었다. 계급은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이라 입체적으로 얽혀 있다. 경아와 찬영의 불행은 꼬인 위치의 선분이다. 둘은 한 번도 교차한 적 없어도 계급이라는 육면체를 함께 구성한다.
작가는 성별과 계급, 재능과 성적 등 모든 기준을 고려해 줄을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리고 있다.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가장 불행한 사람도 없는 게 디스토피아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자잘하게 나뉜 양말 수납 칸 같은 세상에 홀로 갇힌 상태다. 유별나게 기구한 운명에도 넘치는 재능으로 입학한 5계급 여자애와 7년간 공부해 간신히 벽을 넘은 5계급 남자애 중 누가 더 불행한지 다투는 건 반쯤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그들의 불행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불행으로도 경쟁한다. 그래야 하는 세상이라고 한 다. 3포세대와 빈곤 노인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값을 매긴다. 권리라는 파이가 한정되어 있고, 칼을 든 자가 더 가엾은 자에게 유리하게 굴 것이라는 믿음은 모두에게 조금씩 있다. 다층적 계급 구조는 그 원인이지만 가장 본질은 각 개인의 단절이다. 나는 남보다 불행하다 는 주장은 나와 타인을 완벽히 동떨어진 주체로 보는 데서 시작한다. 벽은 도시와 도시 밖을 구분하는 물리적인 장벽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견고하고 가시 돋친 벽이 있다. 벽은 서로를 밀어내고 고립시키지만, 사람의 근간에 깔린 자기 보호 본능이라 다짜고짜 부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과한 게 문제일 뿐이다. 이플은 그 벽에 난 실금을 발견하고 때려 부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벽에 금 간 것도 마음에 들어. 여기 틈새에는 사진도 붙이고 꽃도 꽂아놓자.”
꽃씨가 뿌리를 내리면서 벽이 서서히 적당하게 낮아지는 것을 기다리자는 게 이플의 답이다. 벽을 낮추면 눈을 보고 소통할 수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오직 한 줄로만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 다다르면 의문이 생긴다. 벽을 낮추지 못하더라도 그 행위는 의미가 있는가?
“아니, 틀리지 않았어. 그런데 의미는 없어. 결국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 나는 몰랐어. 미래고가 그저 네버랜드일 뿐이라는 거.”
17년 전 미래고 D반 졸업생이자 미래고 교사인 은영이 이플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재학 내내 천이플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벌였지만 결국 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어른이 된 은영은 학교는 마법처럼 유연한 공간이라 세상이 바뀐 것처럼 착각하게 하니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라고 충고한다.
현실에서도 곧잘 비슷한 맥락이 보인다. 용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의 스쿨미투 이후 무수한 폭로와 진술이 이어졌지만, 고내 성차별은 여전히 견고하다. 서울시 교육청 통계에 따르면 스쿨 미투는 2018년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 가해 교사 중 44%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정치하는 엄마들’ 김정덕 활동가는 “폭로해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퍼져 운동 자체가 위축됐다”라고 주장한다. 선발대가 총알받이가 된 것을 보고도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뿔뿔이 흩어진 얼룩말은 곧잘 사자의 먹잇감이 된다. 디스토피아는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 적어도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보다는 손쉬운 일이다.
조용히 숨통을 조여 오는, 막막하고 깜깜한 악취. 그건 절망의 냄새였다.
교실 하나가 변한다고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다. 사람 하나가 바뀐 다고 무리가 바뀌지는 않는다. 천이플 같은 인물이 나오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패배는 있어도 승리는 없는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당연하다. 절망의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결과 없는 싸움이 의미도 없을까?
아니다. 승리 못한 싸움도 역사라는 큰 그림에서 유의미하다. 이 점은 무수한 사회운동이 뒷받침한다.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 시민 운동 등 순간의 패배에도 훗날의 승리자로 기억되는 일은 무수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기가 내일의 마중물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선례로 남아 있다. 전봉준 체포 이후 스러진 농민운동 세력이 광복군에 합류해 독립을 앞당긴 게 그 예시다. 미투 운동 이후 ‘말조심’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는 것도 마찬가지다. 즉 승패라는 결과만으로 투쟁의 가치를 정할 수는 없다.
설령 패배라도 그 운동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진 않는다. 부족한 것은 가치가 아니라 뒷받침 제도이기 때문이다. 천이플의 한계는 사회적 제도를 바꾸지 못한 데 있다. 정확히는, 그에게 제도를 바꿀 힘이 없었다는 점이 한계다. 작중 그는 일회용 성냥처럼 타오른 다. 5계급에게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도 허락되지 않는다. 떨어지면 다시 날아오를 수 없게 쫓겨나는 세상이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절벽 앞에 서게 되는 위태로운 처지에서 앞에 나서는 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용기는 지켜야 하는 것 늘수록 작아진다. 특히 부양 가족이 있는 어른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모두가 천이플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침묵시위의 일부분, 서명운동의 한 사람으로서 제도를 바꾸는 식으로 천이플을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은 이런 걸 연대라고 부른다. 자잘한 파도가 정체된 호수, 디스토피아에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결론은 다시금 어느 의문을 건드린다. 물결은 태초의 파동이 있어야 생긴다. 연대도 마찬 가지다. 그럼 최초의 물방울은 어디에서 올까?
제 친구 은채가 죽었습니다. 누가 그 애를 죽였을까요?
해수는 미래고 입시학원 우등생이었다. 원장은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는 룸메이트인 은채가 시험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점심시간에 위 문구로 사거리에 서 1인 푯말 시위를 시작했다. 체제에 의문을 던지는 이 행동은 추모이면서 투쟁이다. 경찰이나 하급 군인에게 총을 맞을 수도 있는 행위다. 그는 원래 매일 체념과 수긍을 되풀이하는 여러 학생들 중 하나 였다. 은채는 살아 돌아오지 않으니 이 투쟁은 얼핏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외침에 이플이 응답하면서 그는 마침내 대규모 침묵시위를 이끌게 된다. 해수의 외침은 은채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해수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천이플이라도 이런 계획을 꾸미지 못했을 것이다. 해수가 이플을 움직였다. 그럼 무엇이 해수를 움직였을까? 그를 움직인 것은 은채의 죽음 자체가 아니다. 만약 해수가 은채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면 의문과 분노를 품는 대신 그저 그런 월례행사로 여겼을 것이다. 그는 죽음을 기리는 연민과 사랑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자매도 아닌 은채와 해수 사이의 벽을 낮추고 경계를 흐리게 만든 본질은 작은 공감과 연대였다. 건강한 애정은 사람을 서로 연결해준다. 누군가가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크기는 달라도, 남이 겪은 일을 내 일처럼 여기고 일어서게 하는 연대라고 답 하고 싶다.
우리는 이 자리를 떠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이 자리를 채우리라. 어둠이 그곳에 있다면, 누군가는 불꽃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투쟁의 근간은 무언가에 대한 사랑이다.
네가 웃으면 내가 발 딛고 있는 구정물에 잠시 별이 다녀간 것 같아.
사랑을 이어가면 세상의 범위가 넓어진다고들 말한다. <온 세상의 세이지>를 쓴 본디소 작가는 사랑이 세계와 세계의 충돌이라고 했다. 맞부딪힌 경계선이 흐려지고 그 자리를 사랑이 연결하면 세계는 딱 그만큼 넓어진다. 상대가 사랑하는 존재까지 제 울타리에 담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스스로 완전히 타인이 었던 사람만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철학 사전> 에 따르면 요한 고트리이프 피히테는 ‘자기가 자기인 것을 거부당하고 본래의 자기에 대립하는 상태’를 소외라고 정의했다. 작품 속 D반 아이들은 모두 세상에 의해 소외당한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주체자이자 당사자인 본인으로 인지되지 못했다.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서로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이 됐다. 공통된 경험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켜 개인을 ’우리‘로 뭉치 게 한 것이다.
세상은 숨 막히게 좁으면서도 이따금 까마득하리만치 넓게 느껴진다. 나룻배에 탄 개인은 가혹한 풍랑에 포위당했으면서도 그 고요한 중심에서 '나는 그나마 나아', 하며 안도한다. 디스토피아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 고립을 깨는 방법은 여럿 있겠지만 <우리는 피터팬을 부른다>는 개중 사랑이 가장 강하다고 주장한다. 천이플은 나룻배가 모이면 바다를 건너는 다리가 되리라 믿는다. 바다 너머에 있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젓는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도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한다. 아마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곧 용기를 낼 것이다.
사랑은 연결하는 힘이고 연결된 약자는 더는 무력하지 않다. 디스토피아는 필연적으로 무력한 약자와 압도적인 강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약자가 없으면 강자도 있을 수 없다.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은 서로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여태 무수한 천이플과 그들의 사랑이 세상을 바꿔왔고 우리는 그곳에 발을 딛고 서 있다. 앞으로도 어딘가의 천이플은 그의 진심으로 부조리에 맞설 것이다. 그의 마음은 세상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천이플도 사람이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디스토피아는 소통의 부재에서 태어나 단절과 미움을 흡수해 자란다. 그래서 어딘가의 천이플에게 또 다른 천이플이 되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쉬운 일이다.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연대하는 것. 세상에 우리 사랑이 가득 찰 때까지, 서로에게 작고 평범한 기적을 더하자. 세상은 무수한 사랑꾼들의 걸음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벽을 무너뜨릴 필요는 없어. 보여주기만 하면 돼. 그 벽에도 금이 갈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