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여주의 구국전쟁기 - 로판, 김미유, 리디북스
"그래도 괜찮아. 볼 수 없다고, 듣지 못한다고 해서 라고슈의 바다가 사라진 건 아니잖니. 나는 그걸 잘 알고 있거든. 그 소리는 내 안에 있어. 내가 기억해. 그러니 나는 괜찮을 거야."
<그림자 없는 밤> 238화 中
안녕하세요, 여러분!
0번 글을 발행한 이후 아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평론을 몇 편 올렸지만, 이렇게 정기 주제 글로 뵙는 건 꽤 되었지요?
이번에 첫 번째로 소개드릴 작품은 김미유 작가의 <그림자 없는 밤>입니다.
해당 작품은 리디북스에서 연재형과 단행본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멋진 그림 작가님과 노블코믹스로도 연재 중이니, '리디 기다리면 무료' 프로모션으로 '찍먹'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연재형 기준, 약 6500명이 평균 4.8점 별점을 주었고 댓글은 총 20,841개가 달린 엄청난 히트작입니다.
265화 완결, 외전 16화를 더해 291화로 연재된 <그림자 없는 밤>은 아주 특이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먹고' 흡수해 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그림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는 죽어가는 '로젤린'의 부탁으로 그녀를 삼키고, '로젤린'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녀는 자기와 로젤린이 케이크의 다른 조각이라고 하기보다, 밀가루와 케이크의 관계라고 얘기하는데요.
이 점이 몇몇 분들께는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일 테지만 읽다 보시면 로젤린'들'을 이해하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더불어, 작가님이 남주인공의 미모 묘사에 진심이신지라 온갖 미적인 찬양을 받는 남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꽤 즐거운 작품입니다.
우직한 콧대와 선명한 이목구비 외에 미모를 묘사할 수 있는 말이 그렇게 많은지 저는 처음 알았답니다.
기사 로젤린과 황자 리카르디스의 일라베니아 구국전쟁기를 지켜볼 준비가 되셨다면,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깊은 숲에 들어가면 그림자에게 잡아먹힌다.
숲의 그림자는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움직인다.
깊은 숲에는 사람을 흉내내는 그림자가 있다.
숲의 그림자는 말을 한다.]
사냥대회에서 적국의 습격을 받고 실종됐던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절벽아래에 큰 부상을 입은채 의식을 잃은 그녀를 간신히 찾아냈지만,
며칠 뒤 깨어난 로젤린은 간단한 언어조차 구사하기 힘든 중증의 기억상실 상태였다.
잠옷을 입은 채 맨발로 집안을 배회하지를 않나, 여기저기 반말을 하고 다니지를 않나.
심지어는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기까지!
아무리 봐도 어딘가 이상한 그녀. 정말 로젤린이 맞긴 한 걸까?
‘그림자 없는 밤’은 두 주인공의 로맨스에 전쟁 요소를 적절히 버무린 로맨스판타지 소설입니다. 작품은 로젤린이 된 ‘그것’ - ‘로젤린’의 적응과 리카르디스와의 만남 – 사절단 파견 – 전쟁 – 축복의 밤 – 해피엔딩으로 진행된죠. 그 과정에서 ‘그것’이 먼 옛날 일라베니아의 마인 학살(제노사이드) 당시 탄생한 새로운 종족임이 드러납니다. 로젤린은 '그것'으로서 가진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리카르디스 2황자를 돕습니다. 두 사람은 적국인 발타가 일으킨 전쟁에서 승리하며 부패의 온상이던 일라베니아를 개혁합니다. 이야기 구조는 의외로 단순한 편입니다.
여주인공 로젤린. 적의 습격에서 실종된 기사 로젤린을 숲의 그림자인 ‘그것’이 먹어 생겨났습니다. 로젤린의 형태를 띠게 된 그것은 인간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그 실력을 증명해 리카르디스 2황자의 직속 호위가 되지요. 리카르디스의 까칠한 태도에 굴하지 않는 엉뚱한 모습으로 그를 뒤흔드는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남주인공 리카르디스. 일라베니아 제국의 2황자. 사실은 황제가 1황자를 견제하기 위해 데려온 생판 모르는 남의 자식입니다. 타고난 미모와 지적 능력 및 피나는 노력으로 1황자와 겨룰 만한 인물로 거듭난 인재입니다. 그는 의붓동생인 세티스티아 황녀의 죽음을 못 막은 로젤린을 원망하나,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로젤린’에게서 호감을 느끼고 계속 혼란을 겪습니다.
‘그림자 없는 밤’은 여러 방면에서 명작이나, 아래 두 가지 사항으로 그 추천 사유를 정리하겠습니다.
(1) 적나라한 욕망
김미유 작가는 욕망이 선명한 여러 인물을 입체감 있게 그려냈습니다. 이름이 있는 인물만 스무 명이 넘지만 하나하나 개성이 뚜렷하죠. 납작하게만 보이던 인물도 나중에 복선을 회수하거나 반전을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예컨대, 제 권력을 지키는 데만 열심이라 바보 같아 보이는 황제는 일전에 자식인 1황자를 견제하고자 길가의 아이인 리카르디스를 2황자로 만든 전략가입니다. 1황자를 황위에 올리는 일에만 집중하는, 전형적인 ‘악녀’로 나오는 황후는 훗날 리카르디스가 일라베니아를 해체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는 '배신자'가 되고요. 적국인 발타의 왕녀도, 전쟁을 일으킨 발타의 왕세자도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어 독자가 맘 놓고 욕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멍청하지도, 지혜롭지도,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은 인물들을 골고루 배치해 독자의 식견을 넓혔습니다. 이로써 읽는 사람들은 현실의 자기를 적대하는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소위, '쟤도 사정이 있겠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용서라는 주제
그림자 없는 밤은 발타의 왕세자 하카브가 마인을 박해해 왔다는 명분으로 일라베니아를 치면서 시작한 대륙 전쟁이 주요 사건입니다. 약 150화 정도 전쟁 장면이 이어지는데요. 일라베니아는 신성한 이델라브힘을 믿는 준 종교국가로, 크레안 티다니온을 믿는 마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했습니다. 많은 마인이 발타로 이주해 보호받았죠. 보통 사람들보다 신체 능력이 빼어난 그들은 일라베니아를 증오하며 발타의 특수군으로 활약합니다.
‘로젤린’의 전신은 일라베니아의 마인 학살 과정에서 탄생한 새로운 종족, 숲의 그림자입니다. 그녀는 종종 꿈으로 당시의 참혹함을 보는데, 이는 그림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고요. 다른 그림자인 ‘미미’는 동족을 죽인 일라베니아의 황자를 돕는 로젤린에게 경고하며 미움을 상기시킵니다. 로젤린은 지난날의 죗값을 치르려는 리카르디스를 지켜보며 오히려 미미를 설득합니다. 마침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은 축복의 밤을 불러, 온 땅에 충만한 힘을 전합니다. 종전 이후 미미는 리카르디스가 다스리는 새 왕국, 리쉬아를 여행하며 그가 제도와 통치로써 전하는 사과를 확인하고요. 또한 황후 역시 리카르디스를 용서한다. 그녀는 1황자의 전사가 리카르디스의 개입 때문이라고 여겨 그를 중오하지만, 결국 그 구도를 만든 자가 다름아닌 남편인 황제임을 깨닫죠. 황후는 제 아들을 죽인 진짜 적으로서 황제와 제국을 배신하고 리카르디스가 새 시대를 여는 것을 돕는 인물이 됩니다.
용서는 다루기가 매우 어려운 주제입니다. 사과에 용서가 따르면 서사가 얄팍하다고 욕먹고, 따르지 않으면 답답하다고 욕먹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가벼운 듯한 문체로 묵직한 주제를 전하면서 이 딜레마를 해결했습니다. 로젤린이나 미미처럼 먼 옛날의 일라베니아를 용서하고 리카르디스를 받아들인 자가 있는 한편, 디에즈처럼 용서하지 못하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자도 있습니다. 작가는 그들의 모습을 모두 비추면서, 용서로 나아가는 길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이 작품은 리디북스에서 연재되고 노블코믹스화되었습니다. 리디북스는 대개 문체와 소재, 로맨스 기류가 무거운 작품을 주로 다루는 듯한데, 그림자 없는 밤은 문체가 다소 가벼워 이 점을 완벽히 아우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그림자가 로젤린을 삼켜 생긴 코믹한 에피소드들이 다소 두서없이 나열된 점, 작가의 소박한 문체나 웃음 포인트가 전쟁 장면 중에도 드러난 점 등은 독자의 집중을 방해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작품 후반부 종전 직전 마지막 전투에서 로젤린이 적장을 여럿 베어내는 장면이 그 예시인데요. 원래 적진의 장수가 아군을 도발해 일대일 결투를 제안하면서 매일 아침 장수를 한 명씩 잃고 시작했다는 묘사가 있는데, 로젤린이 전장에 합류하면서 그 기세가 바뀌지요. 이 장면을 묘사할 때 ‘우리가 당하면 아프지만 남이 당하면 기쁜 것이다.’라는 취지의 익살스러운 문장이 쓰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여주인공의 활약을 압도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데다 이야기 진행상 선악/피아 구분이 확실하게 된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로젤린의 이름을 연호하며 흥분한 구경꾼들을 발랄하게 묘사하기보다는 데굴데굴 굴러가는 적장의 머리나 움츠러든 적군 등을 보여주면서 아군에 승산을 쥐여주는 게 더 나았을 것입니다. 무거운 소재는 무거운 문체 로맨스 기류와 어울리는데, 작가는 무거운 소재를 가벼운 문체와 익살스러운 로맨스 기류와 함께 배치해 그 매력을 완벽히 살리지 못한 듯합니다.
그림자 없는 밤은 소재와 문체가 잘 어우러지지는 않았으나 집단학살과 전쟁, 궁중 암투 등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 로판다운 해피엔딩을 꾸려낸 수작입니다. 가볍고 익살스러운 에피소드들을 틈새에 끼워 넣으면서도 전쟁의 진행과 전략 및 정치적 상황을 묘사하는 것 역시 놓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계관 설명과 코믹한 장면들에 로맨스 장면이 뒤로 밀린 건 로맨스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감을 주었을 듯하군요.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동글점수 5점 만점에 4점을 드리려 합니다.
"저희를 밀어내는 손이 백 명의 것이라면, 그래도 한두 명 정도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별 게 아니라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들은 그 한두 명을평생 잊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이따금, 못 견디게 일라베니아인이 증오스러울 때면 제 손을 잡아 준 사람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림자 없는 밤> 246화 中
제가 무수한 스포일러를 깔아놓긴 했지만, 그게 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랍니다.
발타의 왕녀인 '간제'와 일라베니아의 황자인 '라헤안시'의 캐릭터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주인공 두 사람을 둘러싼 조력자와 대적자들 역시 상당한 서사와 깊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작품을 읽는 수밖에 없겠지요?
다행히, 리디북스는 가독성이 아주 빼어난 플랫폼이랍니다.
전쟁물로는 꽤 명작이라, 같이 읽고 감상을 나누고 싶네요.
*여길 클릭하면 <그림자 없는 밤> 작품 홈으로 넘어갑니다.
다음 편에서는 유폴히 작가의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으로 찾아뵐 것 같습니다.
추정으로 끝맺는 건, 어떤 작품을 먼저 가져올 지 저 역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제 '작가의 서랍'에는 약 23편의 작품들이 리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최대한 빨리 올 수 있도록 댓글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그림자 없는 밤>과 함께, '축복의 밤'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