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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Aug 18. 2018

그 모든것이 나를 이룬다

<환생동물학교>, 엘렌심, 네이버, 2018 완결

 “이번 생은 망했어” 인터넷 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이번 생은 틀렸으니, 다음 생을 노려보자는 말이기도 하다. 환생이라는 주제는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주제(환생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와는 별개로)다. 단적으로, 2010년대 웹툰의 대표작이 된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 또한 환생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면서 환생을 다룬 작품들을 수없이 만난다. 내용은 환생과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제목에 차용된 경우도 있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도망치는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와의 유사성으로 논란이 된 <이번 생은 처음이라>역시 다음 생을 암시하는 제목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보통 환생은 게임의 업적 시스템이다. 덕을 쌓으면 인간으로 환생하거나,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는(열반) 등의 보상이 주어진다. 반대로 악행을 저지르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동물로 태어나거나, 심하면 지옥에 갇혀 형벌을 받게 된다. 때문에 환생은 보통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 ‘이번 생’에 정해진 일정 규범을 따르지 않으면 ‘다음 생’에 벌을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 삶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민간신앙에서의 환생은 주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민간신앙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대부분의 종교들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도우며, 거짓을 말하지 말 것이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주인(군주)를 섬기라는 이야기는 어린시절부터 우리의 생활 규범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우는 그 보상이 ‘(더 나은) 인간으로의 환생’인 셈이다.


 이런 환생의 중심에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있다. 다른 삶은 겪어보지 않아놓고 일방적으로 인간의 삶-특히 지배자의 삶-이 가장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엔 인간의 삶이 다른 종의 삶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름 붙이고, 다른 종을 ‘악업을 쌓아 불쌍하게 태어난’ 종으로 만든다. 그리고 저렇게 태어나지 않으려면 체제에 복무해야 한다는 원형 구조가 완성된다. 이런 구조는 차별을 정당화하고, 체제의 변혁을 거부한다. ‘하늘’, ‘신’등 더 우월한 존재가 만들어 놓은 완전무결한 시스템은 감히 인간이 도전할 수 없는 시스템임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 밖에는 없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임은 물론, 매우 인간중심적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환생동물학교>를 완결한 엘렌심 작가는 작품에서 이런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가치중립적으로 환생을 다루고 있다. ‘환생동물학교’의 AH-27반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고슴도치, 하이에나, 고양이, 강아지 등 다양한 종이 함께 하고 있다. 마치 각 동물들이 사는 대륙-국가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 속에는 먼저 인간이 되기 위해 교육받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사람도 동물도 모두 환생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기존 민간신앙과 비슷하지만, 작가는 모든 ‘동물’을 동등한 조건에서 다룬다. 물론, 이 동물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작품은 “착한 동물들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등장하는 인물은 인간 선생님이다. 언뜻 보기에 ‘착하게 산 동물들’에게 인간으로 태어나는 ‘보상’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과연 행복한지에 대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지는 않지만,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닐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던진다.


인간의 본질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연을 하나로 묶으면 ‘주인에 대한 그리움’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있던 스카프, 입마개, 뼈다귀 등의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거기서 떨어지는걸 힘들어하기도 한다. AH-27반의 동물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꼬리를 가지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인간을 도구를 사용하며, 서로 연대하고 기록할 줄 아는 고등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환생동물학교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도구를 사용하고, 사회를 이루어 연대하는 동물들은 생각보다 많다. 뿐만 아니라 범고래 등 일부 동물들은 사냥법 등을 전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AH-27반의 동물들은 인간이 되지 못하고 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인간의 본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이야기한대로 AH-27반의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주인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인간이 사용하는 청소기와 같은 기계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앞서 말한대로 애착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주인에 대한 애착이 해소되면 준비가 되는 걸까? 운이 좋아 주인을 만나게 된 저먼 셰퍼드 맷은 스카프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빨간 머플러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마침내 꼬리가 사라진다. 그렇지만 모든 주인공들이 주인을 만날 수는 없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것이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본질은 변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세대가 그 산 증인이다. 현재 살고 있는 인류중 많은 사람들은 플로피 디스켓을 쓰던 시절부터 스마트폰의 시대를 모두 살아냈다. 기술의 변화뿐 아니라 생활양식의 변화, 사상의 변화까지 많은 변화들을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도 극복해내고 있다. 그 변화의 격랑 속에서 진통이 있더라도 변화를 받아들이고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이 작품은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 이들이 인간이 되는 방법의 핵심적 요소다. 이처럼 인간을 타자화하는 작업이 선행되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의 환생이 ‘업적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나은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사고를 넘어


이 작품은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변화의증거로 가장 먼저 꼬리가 사라진 저먼 셰퍼드 맷이 주인과의 이별을 받아들인 후에 꼬리가 사라진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직도 작품 속에서 이 환생의 과정이 착하게 살아온 동물들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의심하는 독자들에게, 작가는 ‘꽁치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고기로 환생을 준비중인 ‘꽁치 친구’는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통조림 신세가 될 수도 있는 꽁치중의 한 마리로 태어난다면, 그건 형벌일 것이다. 꽁치 친구는 아직 잠수하면서 산소통을 메고, 변하지 못하고 있다. 이건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꽁치 친구가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환상. 그리고 꽁치 친구 역시 같은 이유로, 자신이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해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꽁치 친구의 과거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을 따르자면 자살은 큰 죄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꽁치로 환생하는 ‘벌’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환생동물학교에서 ‘환생’은 ‘돌아서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의 환생(還生)이 아니라, 삶을 바꾸어 태어난다는 뜻으로 조합한 환생(換生)이라고 봐야 옳다. 윤회의 고리가 아니라, 그저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의 연속에서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가지 않은 ‘탈 인간중심’ 사고의 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꽁치 친구는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AH-27반의 친구들을 만나고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AH-27반의 친구들은 “꽁치로 환생을 준비하고 있으니 꽁치 친구”라고 불러준다. 그 이후, 꽁치 친구에게는 물갈퀴가 생기고, 물에서 숨을 쉴수 있게 되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꽁치 친구는 본인이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고등한 존재에서 하등한 존재로 태어나는 형벌이 아니라, 그저 삶을 바꾸어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메시지는 꽁치 친구가 자신의 삶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인간 중심의 환생 시스템은 인간의 삶이 더 나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꽁치가 되는 것은 형벌로 보이겠지만, 환생동물학교의 체계에서는 그 삶의 경중을 가릴 수 없다. 그저 똑 같은 하나의 삶일 뿐이다. 꽁치 친구의 사례는 ‘인생’에 대한 타자화를 통한 탈 인간중심주의의 핵심을 그리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의젓하고 ‘인간’에 가까워 보이는 블랭키는 미움받고 버림받는 게 두려워 친절을 연기해야 했던 골든 리트리버였다.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하이에나 비스콧은 주인의 학대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친구들 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건, 누가 봐도 악어임에도 자신을 강아지라고 주장하고, 파충류 반이 아닌 포유류 반인 AH-27반에서 함께 하고 있는 ‘판’이다.


 판은 처음에 “나는 판이야! 그리고 난 강아지야!”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펄럭이는 털모자를 쓰고 그것이 자신의 귀라고 주장하는 판은 수조 안에서 평생을 보내며 수조 밖의 강아지를 동경했던 악어였다. 그리고 판의 존재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학교에서 꽤 높은 위치를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흰색 개는 “판이 스스로 강아지라고 했으니 강아지”라는 입장이고, 검은색 개는 “아직은 다르면 상처받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도 이런 갈등은 일어나고 있다. 일본 삿포로시에서 동성 파트너쉽의 제도화가 논의되던 때, 담당자에게 800건이 넘는 반대의견이 투고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흰 개의 입장과 검은 개의 입장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당시 담당자는 “당사자들은 이런 편견속에서 살고 있구나”하는 자각과 함께 더욱 제도화에 힘썼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차별 때문에 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흰 개의 입장인 셈이다. 본인들이 그렇다면 인정하고,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일은 없다는 입장이다.

 

 이 친구의 이름이 “판”이라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영어에서 접두사 “Pan-“은 “모든”, “전부” 라는 의미를 가진다. 아주 오래전 모든 대륙이 하나의 땅으로 되어있던 초대륙을 뜻하는 “판게아(Pangaea)”등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판은 악어로 태어나서 악어로 길러졌지만, 수조 밖의 악어를 동경했다. 그리고 죽은 후에 자신을 강아지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판은 자신이 강아지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마저도 자신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맥락 속에서, 모든 것을 자신의 속성으로 생각하는 “판”이 만들어진 것이다.

 

 1989년 킴벌리 크렌셔는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개념을 발표한다. 상호교차성은 인간의 존재가 인종, 민족성, 젠더, 지역, 장애여부, 연령, 종교, 이민여부 등 다양한 사회적 위치가 교차하며 구성된다는 개념이다. 인간은 단일 특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특정한 하나의 개념이나 여러 요인들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방법으로는 인간의 경험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사회적 위치는 사회의 구성물이며, 분리 불가능한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이러한 사회적 과정/구조는 시간과 장소에 영향을 받는다는게 상호교차성의 주요 골자다.

 

 앞서 말했던 대로, 판은 악어라는 자각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강아지라고 주장했다. “강아지여야만 강아지가 좋아하는 걸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판은, AH-27반의 친구들이 “강아지다운 것, 악어다운 것, 이런건 다 멍청이 녀석이 지어낸 말”이라고 말해준 것을 듣고 반 친구들에게 다시 찾아와 자신을 강아지라고 소개하지 않고 “난 판이야. 산책과 공놀이를 좋아해”라고 소개한다. 다양한 그 모든 존재의 총합이 자신임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야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

 

 상호교차성의 핵심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사회적 위치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AH-27반의 친구들은 이런 사회적 맥락이 없이 주어지는 것만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학생들이 아니다. 때문에 이 반을 처음 맡게 된 선생은 “애들이 착하고 쉬운 반이라 다행”이라고 말했다가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AH-27반은 바로 그렇기에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환생동물학교>의 학생들은 “자신의 종”을 한계로 받아들이기보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상태가 만들어진 맥락과 함께 변화마저 받아들인다. 서로 다를지라도 모든 것이 자신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셈이다.


 엘렌심 작가는 <환생동물학교>의 주인공들의 경험을 통해 단순히 반려동물이 사람으로 환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물들을 통해 서로 다른 종이 상호간의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시에 흰 개와 검은 개의 모습을 통해 아직 이런 다양성의 문제로 본질을 보지 못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흰 개는 판의 모습을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였고, 검은 개는 “피해자가 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지 않도록 하자는 의견을 냈다. 피해자를 탓하면 일을 해결하기가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필요했던 건, 당사자들이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할 시간이었지 인정해주거나 응원하는 것도, 당사자를 격리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소설가 배명훈은 ‘우리나라는 다름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다름을 응징하는 나라’라고 이야기했다. 앞서 말했던 환생 이데올로기와도 이어지는 문제다. 체제에 복무하지 않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려고 하면 동물로 환생하는 등의 응징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응징하겠다는 메시지로 들린다. 단 하나의 맥락만을 인정하고, 그것에서 어긋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폐쇄주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역할을 한다. 권위나 위계로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질서정연해 보이고,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결국 사회를 경직되게 만들고, 변화를 거부하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사회를 변화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삿포로 시의 사례처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목소리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한발 물러서는 게 아니라 ‘이들이 이렇게 차별받고 있구나’라고 파악하는 감수성이다. 판을 비롯한 친구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선언했을 때, 그 선언이 보호받을 수 있는 공동체, 마치 AH-27반과 같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다양한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타자의 죽음과 취약성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임을 인지함으로써 애도할 때, 슬픔이 복잡한 질서를 가진 공동체를 사유할 기반을 만든다” 고 말했다. 버틀러는 현재의 사회에서 “우리는 개별적으로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의 공동체로서는 모두 폭력의 대상이 된다” 고 말한다. 버틀러는 ‘애도의 힘’을 이야기했다. 변화를 인식할 때 애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환생동물학교>에서 이들은 이미 애도의 시간을 지나왔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자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주인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지난 후에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변화를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사람으로 환생할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동물-들의 눈을 통해 바라는 세상은 결국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 더 이상 약점이 되지 않는 사회, 그리고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이다.


지금까지 <환생동물학교>가 우리의 삶에 시사하는 바를 짚어봤다.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주로 사용되는 “환생”이라는 시스템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등장하도록 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뒤집는 한편, 등장인물들이 대표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다양성에 대한 존중 있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 혐오, 또는 다름에 대한 응징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내재적인 장치로 활용해 우화적 요소를 사용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내비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는 우리는 과연 변화할 수 있을까? “우리”의 죽음과 취약성을 애도하고, 그것이 변화의 가능성임을 인정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을까? <환생동물학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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