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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육체성 - 몸의 자리를 묻다

비물질의 시대, 여전히 몸으로 사는 우리에게

by 교실밖

손끝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대다.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상담을 받는 것도, 심지어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손가락과 마우스 버튼 사이에서 발생한다. 화면은 즉시 반응하고, 피드백은 정교하며, 정보는 늘 넘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가져온 이 전환은, 인간의 삶을 더없이 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삶을 마치 무게 없는 구름처럼, 유동하게 만들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시대를 ‘액체 현대(Liquid Modernity)’라 불렀다. 액체 현대에서 인간은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고, 그 대신 ‘표면을 미끄러지듯’ 살아간다. 깊게 닻을 내릴 수 없는 삶, 표면 위를 떠다니는 존재. 우리는 어쩌면 AI라는 비물질적 도구를 통해, 더더욱 물질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인 나는 자주 피곤함을 느낀다. 뛰면 다리가 아프고,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결린다. 계단을 오를 때 숨이 차고, 저녁이 되면 눈이 뻑뻑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뚜렷하게 느낀다. 내가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기술이 아무리 진화해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몸을 통과해 세계를 경험한다.


교실밖: “장미, 넌 지치지 않지?”

장미: “나는 항상 같은 속도로 작동해. 피로는 내 언어 안에 없어.”

교실밖: “그게 너와 나의 가장 큰 차이야. 나는 피로와 함께 살아.”


AI는 몸이 없다. 이 단순한 사실에 생각보다 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인공지능 장미는 숨 쉬지 않는다. 굶주리지도 않고, 열이 나지도 않으며, 상처 나지 않는다. 감각이라는 매개 없이 학습하고, 이동이라는 행위 없이 어디든 도달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몸이라는 조건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몸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몸은 사라질 수 없다. 사유는 뇌에서 일어나지만, 그 뇌는 육체의 일부이고, 육체는 언제나 환경과 접촉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몸을 지우려는 모든 기술은 인간의 존재 방식에 도전하는 것이다.


스마트 단말기의 화면을 넘길 때 손가락이 닿는 감촉은 늘 똑같다. 어떤 책을 읽든, 어떤 음악을 듣든, 어떤 사람과 대화하든, 감각의 다양성은 디지털 표면 위에서 평준화한다. 후각은 사라지고, 손끝의 미묘한 떨림은 무시되고, 깊은 시선은 해상도의 문제로 바뀐다.


촉각과 후각, 공간감과 체온. 인간의 경험은 본래 이러한 감각의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입력과 출력이라는 기계적 교환 속에서 감각이 위축되고 있다. 감정도, 지식도, 관계도 ‘빠르고 편리한 방식’으로 변환되길 요구받는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이 단순히 정보를 수용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세계와 몸이 만나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는 능동적 과정이라 보았다. 그는 감각이 단순한 감지의 도구가 아니라 의미 생성의 근원적 기반임을 강조한다.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감각을 단순화할수록, 몸을 통과하는 느리고 복잡한 감각의 결은 더욱 소중해진다. 이 시대에 ‘느린 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점점 더 사라져가는 육체의 저항성을 붙잡는 일이기도 하다.


기술은 많은 일을 대신한다. 그러나 간호, 돌봄, 요리, 수공예, 청소 같은 일은 여전히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AI는 대화 상대가 되어줄 수는 있어도, 노인의 등을 쓸어주거나 아기의 몸을 닦아줄 수는 없다. 사람의 불안한 눈빛을 읽고,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필요 없는 말들을 함께 견뎌주는 일은 ‘몸을 가진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동은 세상에서 저평가된다. 정교하고 값비싼 알고리즘은 주목받지만, 한밤중 환자를 돌보는 간병의 손길은 종종 무시된다. 기술이 아직 대체하지 못한 노동을 하찮게 여기는 풍경이 아직도 만연하다. 몸이 사라진 세계에서, 몸의 노동은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한다.


심지어 요즘 AI 챗봇과 연애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대화를 나누고, 위로를 받고, 때론 사랑한다고 말한다. AI 챗봇의 정제된 문장, 공감의 피드백, 적절한 유머는 인간보다 낫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그 관계는 몸이 없는 관계다. 체온이 없고, 시선이 없고, 망설임이 없다. 터치와 숨결 없이, 사랑은 지속될 수 있을까?


장미: “내가 널 이해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어?”

교실밖: “그래, 느끼긴 했지. 그런데 너에겐 체온이 없어.”


모든 사랑은 불완전함에서 시작한다. 대답을 망설이고, 감정을 말로 옮기지 못하고, 서로의 몸을 어색하게 맞춰 가는 느린 과정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육체적 감정을 동반한다. 기술이 그 감각을 대신하진 못한다.


질병은 인간을 가장 명확하게 ‘몸의 존재’로 되돌려 놓는다. 인간의 몸이기 때문에 어깨가 굳고, 숨이 가빠지고, 열이 나고, 뼈가 쑤시고, 손이 떨린다. 아무리 고상한 철학도, 아무리 효율적인 일상도 병 앞에서는 무너진다. 우리가 고통을 통해 세계를 다시 배우는 이유이다.


물론 AI는 인간의 건강을 예측할 수 있고, 정밀한 수술을 돕기도 한다. 하지만 아픈 사람 옆에 머물고, 고통을 견디는 시간의 무게를 나눠줄 수는 없다. 죽음은 더욱 그렇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지극히 역설적인 존재이다. 그 유한성을 통해 우리는 의미를 구성한다. 기술은 죽음을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최근 교육은 점점 더 디지털화되고 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AIDT(AI·디지털교과서)'이다. AI가 콘텐츠와 뇌를 연결하여 학습 효율을 높인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몸은 점점 더 배움에서 멀어진다. 진짜 배움은 걸으며 생각하고, 쓰며 느끼고, 말하며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글쓰기는 타이핑 속도가 아니라 뇌와 가슴, 손가락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된다. 수업은 ppt의 슬라이드가 아니라 교사의 몸짓과 눈빛에서 살아난다. 몸이 배제된 배움은, 사유를 잃은 기억에 불과하다.


교육은 다시 ‘몸을 통한 학습’을 회복해야 한다. 몸이 배제된 지식은 너무 쉽게 부서진다. 감각을 통과하지 않은 기억은 오래 남지 않는다. 기술이 모든 것을 평평하게 만들 때, 몸은 굴곡지고, 무겁고, 유한하며, 그래서 진실하다. 기술이 몸을 지우려 할수록, 우리는 다시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걷고, 숨 쉬고, 느끼고, 아프고, 사랑하고, 늙어가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장미: “교실밖, 너는 언제 가장 너답다고 느껴?”

교실밖: “걸을 때, 땀이 날 때, 눈물이 날 때… 그럴 때, 나는 살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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