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를 사는 아이들
오늘도 학교와 가정, 그리고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어른들의 상투적 언어로 말하면 그들은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행복한 내일을 위해, 성공한 어른이 되기 위해. 과연 아이들에게 미래는 현재의 고통을 감내할만한 약속의 시간일까.
교육의 목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장밋빛 미래'를 소환하는 것이다. 한때는 '성공'이 그 자리를 차지했었지만, 지금은 '웰빙(well-being)', 즉 '행복' 혹은 '잘삶'이라는 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성공에 비해서는 교육적 가치를 담은 어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행복을 내세우며 성공을 지향하는 것이 일반적 문법이긴 하지만. 그래서 미래의 행복을 내세우는 논리 역시 같은 문법 위에 서 있다.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면 미래의 행복이 기다린다는 약속.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오래된 말이 세련된 언어로 갈아입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는 왜 하나요?"라고 아이가 물을 때 "지금 힘들어도 참고 하면 나중에 행복해져"라고 어른은 답한다. 당장 해줄 말이 빈곤해서다. 이 말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는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데, 어른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저당 잡으라고 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미래라는 포장지에 싸서 건네는 것, 그것은 교화이고 주입이다. 어른과 아이의 불화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발달하는 주체'. 이 짧은 말 안에는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지향이 담겨 있다. '발달'은 도착점이 아니라 과정이다. 미성숙한 존재가 다양한 방향과 가능성을 향해 펼쳐가는 살아있는 운동이다. '주체'는 그 과정을 스스로 경험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자율성과 의지, 즉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이 두 말이 만날 때 교육은 비로소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실천이다. 오랜 시간 학습자상을 말할 때 '자유의지를 지닌 창조적 주체'라고 했으나 이를 '발달하는 주체'로 간명하게 재정리하고 있다.
'미성숙'이라는 말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흔히 미성숙은 결핍으로 읽힌다. 아직 덜 된 존재, 완성을 향해 채워져야 할 그릇. 그러나 미성숙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아직 굳어지지 않았기에 어느 방향으로든 자랄 수 있는 열린 상태. 듀이가 말한 '가소성(plasticity)'이 바로 이것이다. 아이는 결핍된 어른이 아니라, 아직 닫히지 않은 세계를 가진 존재다.
굳이 '행복'이라는 말을 쓰려면 그 내용을 바꿔야 한다. 미래에 도착할 상태로서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배우는 이 순간에 경험하는 행복이어야 한다. 그것은 학습 방법을 흥미롭게 바꾸거나 동기를 끌어올리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을 이해하고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앎의 기쁨'을 어떻게 줄 것이냐의 문제다. 이 전제가 다르면 교육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여기에 역량교육을 강조하는 분들이 주장하는 오해가 있다. 그들은 종종 지식과 역량을 대립 구도에 놓는다. 지식교육은 암기와 주입으로, 역량교육은 구성과 촉진으로 이루어진다는 이분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의 본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한 실수다. 진정한 지식의 이해는 암기가 아니라 의미의 구성이며, 그 과정에서 학습자는 앎의 기쁨을 경험한다. 이 기쁨이 없다면 역량도 공허하다.
교육사상가들은 이 사실을 각기 다른 언어에 담아 같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듀이에게 경험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었다. 그는 사유를 촉발하는 경험, 즉 문제 상황 속에서 탐구하고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이야말로 교육의 본질이라 보았다. 지식은 그 탐구의 도구이자 결실이었다. 그가 말하는 성장은 '경험의 연속적 재구성 과정'이다.
비고츠키는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주목했다. 그에게 좋은 수업이란 아이가 이미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근접발달영역에서 교사와 또래의 도움으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는 경험이었다. 그 도달의 순간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다.
수호믈린스키는 그것을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아이가 책을 읽고 눈빛이 빛나는 순간, 처음으로 어떤 개념을 이해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 그것이 교육이라고. 그의 학교 파블리시 마을에서 아이들은 자연과 책과 노동 속에서 앎의 기쁨을 몸으로 배웠다.
비에스타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자격화(qualification)', 문화적 관습을 전수받는 '사회화(socialization)', 그리고 고유한 존재로서 세상에 등장하는 '주체화(subjectification)'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오늘날 학교가 자격화에 편중될수록 주체화는 뒤로 밀린다. 아이는 스펙을 쌓는 존재가 되고, 고유한 한 사람으로 세상 앞에 나타날 기회를 잃는다. '발달하는 주체'의 '주체'는 '학습자의 행위 주도성(student agency)'을 넘어서는 현재진행형 인간이다.
학교는 미성숙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소사회다. 그 안에는 기성 사회와 비슷한 작동 논리가 있다. 위계가 있고, 관계가 있고, 갈등이 있고, 협력이 있다. 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은 늘 외부에서 기준을 들이댄다. 아이를 목표를 향해 질주해야 하는 선수처럼 대하고, 현재의 삶은 훈련 과정으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아이의 학교생활은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그 삶의 결을 읽지 못하면 어떤 교육 언어도 아이에게 닿지 않는다.
'발달하는 주체'라는 말은 교육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보다, 학습자는 어디를 바라보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묻는다. 미래를 향해 아이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아이가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행복은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안에 이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