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실밖 Jan 07. 2020

제대로 된 지식교육을 해 본 적이나 있나?

데이지 크리스토둘루의 '일곱 가지 교육미신'에 대한 비판적 논평  

최근 방영되고 있는 EBS의 프로그램 '다시 학교'의 의도가 궁금하다. 이 프로그램은 데이지 크리스토둘루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미신>이라는 책을 기초로 하여 구성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지난해 함께 공부하는 모임에서 이 책을 교재로 공부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EBS 프로그램과 공부 경험을 기초로 하여 느끼는 점은 "제대로 된 지식교육을 해 본적이나 있나?"라는 의문이다. 내가 말하는 지식교육의 원류는 흔히 우리가 지식일변도 교육이라 비판하는 암기위주의 교육이 아니다. 지식교육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하여 인류가 쌓아온 문화유산을 교육적인 방식으로 전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린 본래적 의미의 지식교육도 역량교육도 해 본 적이 없다. 서로 그것의 아류를 놓고 학생 중심이네, 교사 중심이네 논쟁하고 있을 뿐이다.   

데이지 크리스토둘루의 일곱 가지 교육미신에는 저자의 의욕이 넘치는 대목이 많다. 그러나 의욕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는 힘이 부친다. 거기다가 전제의 오류, 의도된 확대해석, 공정하지 않은 비교 등으로 글의 권위는 갈수록 떨어진다. 그렇게 된 이유는, 지식관에 대한 정리 없이 바로 미신 분석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미신을 때리기 위해 유령을 등장시킨다. 정작 지식교육 자체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데, 몹시 부정당하고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세웠다.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양식 있는 자'가 없으니 유령이고 이는 끝까지 꼬이는 이유가 됐다. 시도 때도 없이 4차 산업혁명을 들먹이는 언론 기고글에서 지식교육 무용론 비슷한 것을 읽었다면 마땅히 그 층위에서 비판을 했어야지. 거기다 루소와 듀이와 프레이를 끌어오는 것은 무리였다. 아래는 이 책의 목차이다.

  1장 첫 번째 미신 “지식보다 역량이 더 중요하다”

  2장 두 번째 미신 “학생 주도의 수업이 효과적이다”

  3장 세 번째 미신 “21세기는 새로운 교육을 요구한다”

  4장 네 번째 미신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

  5장 다섯 번째 미신 “전이 가능한 역량을 가르쳐야 한다”

  6장 여섯 번째 미신 “프로젝트와 체험 활동이 최고의 학습법이다”
  7장 일곱 번째 미신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의식화 교육이다”


목차를 중심으로 거칠게 말하면, '지식보다 역량'이라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나? 양자는 너른 교집합을 가지고 있고 상호보완적이지 않나? 학생주도의 수업이 효과적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수업의 맥락과 학습 주제에 따른 수업 설계의 문제가 아닌가? 21세기는 새로운 교육을 요구한다? 새로운 세기가 새로운 교육을 요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나? 누가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나? 정보통신기술교육을 과잉 강조하는 사람이나 할 말이다. 전이 가능한 역량을 가르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프로젝트와 체험 활동이 최고의 학습법이라 누가 말하고 있나? 프로젝트 학습을 선택하든 체험학습을 선택하든 교사와 학생의 의도, 학습 맥락이 중요하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의식화 교육이다? 누가 이런 말을 했나? 학술적으로 반향을 부를 정도로 말이다. 일곱 가지의 미신은 모두 그럴듯하나 이른바 역량교육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했을지 모르는 극단적 사례에 기초하여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듀이가 '경험의 연속적 재구성'으로 성장의 개념을 말했다고 해서 지식교육이나 교과의 존재 의미를 부정했다고 보는 것은 대단한 난센스이다. 듀이는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교과지식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을 넘어 비판적 사고력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요, 지식과 삶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한 것이지, 아동의 흥미와 경험에만 집중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초기 전제가 무논리와 비약으로 빠지다 보니 출구 없는 유령 때리기가 됐다. 아쉬운 점이다.   

역량교육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역량교육이 내세우는 공통 범주인 인지역량(지식), 사회/정서역량(가치), 행동역량(태도)중 인지역량의 핵심이 '지식을 축적 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인지역량은 사실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지식과 새로운 지식을 연결하고, 그를 통해 지식 전반을 의심과 회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즉 지식교육의 중요성을 십분 이해하고 이를 포월하여 한 단계 더 진화하는 개념이다.

특히 저자의 평가관은 협소하기 그지없다. 저자는 지식교육의 효과를 학업성취도로 보고 있고, 이는 기존의 표준화 평가로 측정하는 결과로 보고 있다. 역량교육에서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방식을 피하고 지식교육과 역량교육을 대척점에 놓다 보니 지식교육의 결과는 측정 가능할 만큼 학력의 상승, 역량교육의 결과는 학력 저하의 주범이라는 도식을 세우고 있다. 이 대목은 세밀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표준화평가에 평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한다.

영국인인 저자가 피터스의 저작들을 읽어보지 않았을 리 만무한데, 왜 이렇게 지식관을 근원적으로 탐색하는 것을 과감하게 건너뛰고, 별반 권위 없는 얼치기 학자들이나 시장논리에 사로잡힌 일부 교육가들을 대척점에 세웠을까. 저자는 일부 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지식과 역량은 쉽게 분리될 수 없다고 한다.(199쪽) 내 말이 그렇다. 지식교육이든 역량교육이든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 중 지식과 역량을 분리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

결론적으로 저자는 내용(지식교육)과 방법(암기방식)을 크게 (혹은 의도적으로) 혼동했다. 존재하지 않는 적을 유령으로 세운 다음 진지하게 비판하려 했으나 근거와 논리를 제시하는데 힘이 부쳤다. 뒷부분 학력과 계급에 대하여 언급한 곳도 허술한 대목이 많다. 이른바 역량교육도 여러 결의 접근이 있다. 당연히 지식교육을 중시하는 접근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다. 우리가 토론을 하면서 흔히 저지르는 의도적 악행이 있다. 내가 지지하는 이론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을 예로 들고, 상대의 주장은 거칠고 극단적인 예로 들어 비판의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이런 토론으로는 좋은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아래 글은 2017년 2월 '교사전문성에 대한 압박'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나는 데이지 크리스토 둘루가 이 글의 마지막 세 단락을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사 전문성에 대한 압박>


연수원에 근무하고 있지만, 교사의 전문성을 연수만으로 신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혼자 열심히 노력하여 전문가 교사의 경지에 이르기도 쉽지 않다. 교사의 전문성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무엇인가, 아니면 내적으로 형성되는가에 관한 문제는 오랜 교육계의 논점이었다. 상식적 답은 혼자 공부하고 어울려 공부하는 경험이 충분하고 거기에 적절한 외부의 자극이 붙는다면 좋다는 것이다.

대학입시 등의 선발적 교육관과 이로 인한 경쟁 분위기 때문에 교사가 다양한 수업을 디자인하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그렇다. 현실의 벽이 너무 견고하다는 것이겠지. 물론, 이것이 교사가 입시 과잉에 편승하여 단순 암기식 수업을 반복해도 면피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1970년대에는 10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러던 것이 30만 명 대로 감소했고... 이제 이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서울의 경우 지난 15년 동안 초등생 기준 31%가 감소했다. 이러한 인구변화의 기점에서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접근 방식을 다소 비틀어 볼 수도 있다. 즉, 내가 전문가 교사로 거듭나야 한다는 압박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느냐의 문제인데, 외부로부터의 압력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 남는 것은 내부의 압력이다. 바로 저출산으로 인해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소규모 학습 단위에서 소통의 밀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의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이란 것이다. 초등학교 때 혁신학교의 맛을 보고,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자유학기제(서울은 자유학년제, 탐색학기/집중학기로 나누어 1년 혹은 집중학기/연계학기로 나누어 1년)를 경험한 아이들이(제대로 경험했다면 아이들은 자기표현이 강해질 것임)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교사에게 수업에 관한 요구를 하게 된다는 가정이다.

저출산과 인구절벽으로 인한 입시과열경쟁의 완화는 아이들의 교실 문화에도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한다. 경쟁이 완화되면(물론 경쟁 성격이 변화되는 측면도 경계해야 함) 아이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이것을 내부로부터 압력으로 보는데, 교사 입장에서 외부의 압박에는 저항할 수 있지만 내부의 압력은 저항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고... 일상적인 것이니 이 단계에서 아이들과 의논하고 합의하여 수업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1950년대 후반, 구 소련에서 스푸트닉을 쏘아 올린 후 미국 교육계에 가해진 압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국방교육법, NASA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학문중심 교육과정과 지적 전통주의, 여기에 미국식 행동주의 심리학, 학습내용의 계열화와 과학화, 수업모형의 도입, 평가요소 세분화, 명세적 교육목표 설정 등등 한마디로 사회적 필요에 따른 외부적 압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그럼 이 시기에 교사들의 전문성도 최대로 신장했느냐... 그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육에 스며든 강한 표준화 및 효율성 논리가 교사들로 하여금 보잘것없는 투입으로 강한 산출을 내라는 압박이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지금도 교육에 대한 투입은 저급한 수준이다. 교육비 투입이 OECD 국가와 비교하여 높게 나오는 것은 민간부문(사교육)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고 약 2.8%의 민간 부문 투입을 빼면 정부의 투자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약하다. 외부로부터의 압박은 이렇듯, 교사를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아이들로부터 건강한 압박을 상상하는 이유도 그것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우리가 선망하는 핀란드의 경우를 보면 종합학교 단계까지(우리로 보면 중3) 교사 1인당 학생 수를 적게 유지하며 무학년제 통합교육을 하다가 고등학교 때부터는 교사 일인당 학생 수가 늘어나고(어떤 곳은 한국보다 많다!), 전통적인 방식의 수업을 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이것은 우리 형편에서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을 대립항으로 놓아, 오늘날 교육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지식교육이 문제였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빈약함을 말해준다.

즉 제대로 된 지식교육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일방통행식 암기교육=지식교육'이라는 통념에 빠져 '지식교육보다 역량교육을 해야 한다'는 등의 무리한 논리로 발전해 가는 거다. 하여튼, 아이들로부터 내적 압박을 받아 자극되는 수업 변화와 전문성 신장에 대한 요구는 '지식교육'을 멈추고 '인간교육'을 해달라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며 오히려 '제대로 된 지식교육'에의 요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의 전문성은 오로지 교사 자신의 기점에서만 구인되는 것이 아니고 주요한 존재 근거인 학습자와 붙어서 형성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요즘 미래교육 담론의 홍수 속에서 '기승전 교사가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는 과거 표준화, 효율성 논리의 연장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의 전문성은 외부로부터 압력 따위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형성하는 내적 논리로 개념화되어야 한다.

참고로 지금까지 논의된 거의 모든 역량 개념은 competency 개념이었다. 미래교육 담론에서도 그러하다 그것은 교육의 변화가 국가적 필요에 강하게 매달려있다는 것과 통한다. 그래서 미래사회에서 증폭될 인간소외, 불평등, 격차를 외면하지 않고... 국가가 시민에게 역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국가를 향하여 기회를 요구하는 차원에서 개념화하는 역량(capability)을 상상한다. 주말에 있을 교컴의 미래교육 상상 수련회에서 해야 할 강의를 고민하다가 든 생각이다.  (2017년 2월 함영기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