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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n 24. 2019

문화적 재생산에서 금수저, 흙수저까지

교육과 이데올로기, 마이클 애플(1985)


며칠 전 쓴 '미래교육 상상'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내가 처음 교직에 들어왔을 때 교사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큰 영향을 준 책으로 마이클 애플의 '교육과 이데올로기(원제는 Ideology and Curriculum, 1985)'를 들었다.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1985년에 나온 이 책은 쉬이 읽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활자에다가 특유의 묵은 책 냄새를 간직하고 있었다. 30년을 뛰어넘어 젊은 시절의 애플을 만나는 일은, 교직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청년 나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듀이를 즐겨 읽고 그의 철학을 배우려 했으며, 프랑스나 독일 학자들의 사변스러움에 이끌리고, 수호믈린스키와 같이 아이들을 향한 지극 정성의 전인적 발달을 위한 실천은 교육자로서 내 생각을 가다듬게 했다. 한편 애플은 늘 자극을 준다. 어떤 사람은 요즘 공허한 저항담론이 설 자리가 있겠느냐고 반문도 할 법 하지만 - 실제 그의 책 중에는 이미 절판된 것도 있고, 지금 이야기하려는 교육과 이데올로기 역시 더는 책방에서 찾을 수 없지만 - 애플이 주는 신선한 자극은 당장의 쓸모를 추구하는 기능적 삶에 주는 경각심이 상당하다.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새롭다'는 생각을 했다. 20대 청춘 교사 시절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행간의 의미를 이제 제법 해석하게 될 수 있게 된 것은 그동안의 공부 덕이려니 한다. 아울러 1980년대 중반이란 시기는 미국에서는 보수 회귀의 바람이 불고, 우리나라에선 전두환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애플은 네오 맑시즘을 표방했으며, 교육 불평등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계급해방 지향성을 분명히 했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인위적 의식고양' 속에서 읽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읽으면서 드는 생각 중의 하나는 30년 전 애플의 생각과 그때 나의 느낌이 지금은 어떠할까를 추적하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달성되고, 세계화의 격랑 속에 있는 지금 애플의 저항정신 가득한 이야기를 음미하면서 당연하게도 '정말 민주화는 완성됐어?' 이런 따위의 자문을 하게 됐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1980년대식 의 투박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의 시각에서 읽힌다. 늘 현재적 시점, 지금 여기의 눈으로 읽는 행위는 독자의 의무이다. 특히 애플은 교육이 가지고 있는 탈역사성을 맹렬히 지적하였다.

"미국의 교육과 문화에 관한 학문분야에서 이데올로기적 분석을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교육활동의 탈역사적이며, 교육과정 영역에서 기술적 모델을 통한 개혁의 윤리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46쪽)



우리가 오늘의 시각으로 다시 챙겨봐야 할 구절이 '교육과정 영역에서 기술적 모델을 통한 개혁의 윤리'라는 측면이다. 맥락적 통찰이 결여된 무지향성 방법 개혁이 가져오는 탈역사성이 가져오는 위험을 지적한 말이다. 기술적 모델에서는 교육과정의 지식 자체를 문제시하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어진 것으로 보고 학생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방법과 절차 개발'에 주력한다. 애플은 당시 미국을 휩쓸던 심리학에 대하여도 일침을 가한다.

"체제적 경영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교육과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심리학의 언어들은 인간관계와 개인의 행동을 탈윤리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면 조작적 목표를 정하고 학생들의 '성취'를 행동적 용어로 진술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202쪽)



이 사람들(손다이크, 스키너, 보비트, 차터스, 타일러, 블룸, 메이거 등)의 노력으로 교육자의 행위는 정치적, 도덕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고 수단이 목표로 전도됐으며 어린이들은 '학습자'라고 하는 조작 가능하고 이름 없는 추상체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것이 애플의 생각이었다.


수많은 문헌들에서 즐겨 인용한 애플의 핵심 문장은 아래와 같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지식은 누구의 지식인가? 누가 그것을 선정하는가? 왜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되고 가르쳐지는가? 그리고 그것은 홰 특정한 집단에게만 가르쳐지는가?"(18쪽)



사실 이 문장은 타일러를 정면으로 조준한 말이다. 타일러는 교육과정에서 학습목표를 분명히 하고, 학습경험을 선정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평가를 통해 환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나중에 블룸과 메이거를 거치면서 교육목표분류학, 행동적 수업목표 설정 등으로 더 구체화된다. 그런데 타일러는 학습목표를 분명히 해야 하고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학습경험을 선정/조직해야 한다고 말할 뿐 '어떤 지식',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지식'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하여 애플은 그것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 교육과정이야 말로 학교에서 불평등을 온존, 강화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정이라면 교사의 역할도 지식의 전달자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자는 추상적인 개인이 아닌 유기적 지성인으로, 그의 인식과 활동은 헤게모니에 능동적으로 대항하는 것이어야 한다"(42쪽) "학교는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규범과 성향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한 사회의 가장 강력한 계층의 이념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 적합한 잠재적 교육과정을 가르친다."(67쪽)


이 생각이 '문화적 재생산'의 기초가 됐다. 단순히 부의 대물림이 아니라 부의 대물림이 자연스럽게 대물림되는 규범과 성향을 분배하는 것이 학교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한때 계급적 지향을 드러내는 관점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금수저, 흙수저에 대한 이야기가 대중적으로 회자되면서 단순히 저항담론에서만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닌 것이 됐다. 금수저, 흙수저의 학술 버전은 바로 '문화적 재생산'이다.


그래서 애플은 교사의 역할을 '인간주의적인 차원'을 넘어 보다 더 '관계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관계는 비단 인간 개체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구조, 그리고 인간과 제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교사는 '의미와 교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교육제도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애플의 시각이 깊다고 느끼는 대목은 권력, 지식 및 이해관계가 어떻게 서로 얽혀 있고 어떻게 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가, 그리고 헤게모니가 어떻게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드러나는가를 숨김없이 밝혀야 한다는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러한 것들이 숨김없이 밝혀졌을 때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개인적 집단적 무력감 자체도 효과적인 지배문화의 한 측면임을 알아야 한다"(216쪽)



라는 통찰 때문이다. 이러한 무력감 역시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서 '우리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구체적 행동을 취할 수 없게 만든다. 애플은 체계적 언어의 특징이 비록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교육의 정교함을 믿도록 하는 것으로 기능해 왔다고 믿었다. 체계적 언어는 교육에서 합리화를 가져오지만 관료화와 사회통제를 증대시킬 목적으로도 사용된다. 애플은 갈등을 덮고 합리화하는 것 역시 헤게모니 관철의 일부라고 보았다.

"의미 있는 진보는 모두가 공유하는 패러다임에 입각한 사실의 수집에 의해서가 아니라 갈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163쪽)



[보충]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애플의 책은 학교지식의 정치학(1993), 미국 교육개혁 옳은 길로 가고 있나(2003), 문화 정치학과 교육(2004), 비판적 교육학과 공교육의 미래(2011),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2014), 마이클 애플의 민주학교(2015)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중 몇 권은 품절이다. 지금 소개한 교육과 이데올로기 역시 품절이다. 이 모든 저작들을 관통하는 애플의 생각은 학교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생산관계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품절된 책 중의 하나인 '학교지식의 정치학'에 대한 서평은 아래에 정리돼 있다.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일상적 이해 뒤엎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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