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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May 10. 2020

그날 새벽

 기억은 아픈데 세상은 그대로다

#01 사진관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차가운 백색의 빛을 쏟아냈다. 사진관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방금 인화된 사진을 찾느라 분주했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무표정하려 애쓰는 듯했다. 가능하면 서로의 얼굴은 보지 않으려 했다. 어쩌면 그것은 팽팽한 긴장을 더는 증폭시키지 않겠다는 묵시적인 약속과도 같았다. 뒤엉켜 있는 흑백 사진들 속의 얼굴은 누구라고 딱히 확신할만한 것이 없었다. 사진 속의 얼굴은 하나같이 렌즈를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찾고 있는 사진은 군중들 틈에서 소형 녹음기와 마이크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사진 속 인물이 나와 같다고 한다면 그 사진을 챙긴 후 가능한 한 빨리 이 도시로부터 멀리 벗어날 생각이었다.

  밖에선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가는 전투경찰의 군홧발 소리가 또렸해졌다가 멀어지곤 했다. 밤공기를 가르는 호각소리와 병력을 싣고 달리는 트럭의 굉음이 들렸다. 이따금 들리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는 구원이 아닌 도발처럼 들려왔다. 소음은 국방색 담요로 가린 사진관의 허술한 문틈을 비집고, 벽으로 바닥으로 기어들어왔다. 누군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이 방금 인화돼 둥글게 휜 흑백 사진 위로 몇 방울 떨어졌다. 성미 급한 사람이 자신의 사진을 찾느라 사진 더미를 휘졌는 바람에 사람들은 난감해했다. 하지만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그저 성실하고 분주하게 자신이 나온 사진을 골라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내 오른쪽에는 겁에 질린 표정의 경애가 있다. 경애는 흩어진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찾고 싶은 사진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난 확신할 수 없었다. 경애가 이 사진관에 있는 복수의 사람과 동행인지, 아니면 나와 동행하고 있는지 말이다. 잠시 나와 동행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사람과 동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동행이었으면 하는, 지극히 짧은 순간의 바람은 공포감을 약간 덜어주었다. 갑자기 사진관 주인이  빠르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신은 침착하게 또박또박 전달하려 하는 것 같았으나 분명하게 그 목소리에는 공포감이 무겁게 배어 있었다.

  "온답니다. 빨리 피하세요. 저쪽 뒷문으로 나가면 골목이 있어요. 5분 이상 쉬지 말고 길을 따라 뛰세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뒷문으로 급히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진관에 있었던 십여 명 남짓의 사람들 중 남은 것은 나와 경애뿐이었다. 경애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으로 인해 아마 경애는 이곳에 올 때부터 나와 동행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경애가 자신의 안위를 나에게 맡기고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뒷문으로 나가면서 나와 경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5분 이상 쉬지 말고 뛰어야 한다는 사진관 주인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우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뛰었다.


#02 골목

  골목은 안개로 가득했다. 전신주에 힘없이 매달려 있는 가로등은 지면을 향해 희뿌연 빛을 떨구고 있었다. 그러나 자욱한 안개는 가로등의 위치만 확인해 줄 뿐 땅을 밝히지는 못했다. '골목길 따라 5분간...' 사진관 주인의 이 말은 마치도 생존으로 가는 한 장의 티켓처럼 뇌를 맴돌았다. 나는 경애의 손을 움켜쥐고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무슨 말인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령 "내가 지켜줄게"라든지, "이제 조금만 더 뛰면 안전한 곳일 거야"라든지, 어떤 말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은 경애가 자신의 안전을 나에게 맡기고 있다는 그 단 하나의 상황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골목은 길게 이어졌다. 이내 5분이라는 시간은 공중으로 흩어져 의미를 상실한 듯했다. '골목길을 따라서 5분 이상을 뛴 것 같은데... 그다음엔?' 혹시 사진관 주인의 그다음 안내가 있었나?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열을 지어 뛰어가는 전투 경찰의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묘한 공포와 긴장이 경애와 함께 함께 있다는 안도감과 뒤엉켰다. 


  이 뜀박질의 상황이 끝나면 경애의 손을 놓아야 하는지, 아니면 계속 잡고 있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경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꼭 잡고 내가 이끄는 대로 뛸 뿐이었다. 경애의 가쁜 숨소리가 전해졌고, 꼭 잡고 있는 손을 통해서 박동이 느껴졌다. 혼자라도 이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것인지, 나와 함께 벗어나겠다는 생각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조금씩 답답함이 엄습했다.

  갑자기 가로등 불빛이 밝아졌다. 군홧발 소리가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경애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것은 분명 나에 대한 의지였다. 신속하게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초록색 대문의 집이 정면에 있고, 왼쪽에는 높은 담이, 오른쪽에는 작은 쪽문이 있는 담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쪽문을 밀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다시 사력을 다해 문을 밀었다. 


  낡은 나무 질감의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윤곽으로 보아 그곳은 창고로 쓰이고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경애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 냄새는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더 강하게 올라왔다. 문을 안쪽으로 잠그고 보이는 대로 나무 기둥을 덧대어 놓았다. 그리고는 창고의 안쪽으로 가서 앉았다.


#03 창고

  가쁜 숨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밖에서는 전투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분명히 이쪽으로 들어온 거 맞아? 이 쥐새끼 같은 놈들 어디로 사라진 거지? 그쪽 대문 안쪽이랑 담 넘어까지 살펴봐!"

  웅성대는 소리와 욕설, 그리고 지면에 떨어지는 둔중한 군홧발 소리는 점점 더 공포감을 갖게 했다. 갑자기 쪽문 틈을 비집고 창고 안쪽으로 칼날 같은 플래시 불빛이 들어왔다. 숨이 멎을 듯했다. 심장도 따라서 멈추는 느낌이었다. 쪽문 틈 사이로 들어온 플래시 불빛은 곧바로 경애를 향했다. 일직선의 불빛은 경애의 머리에서 미간, 코와 입, 그리고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과 복부까지 비추었다. 


  시간이 정지된 듯했다. 정지한 시간 위로 플래시 불빛은 유영하듯 경애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불빛에 본 경애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 위에 아무렇게나 놓였다. 경애는 공포감을 못 이기고 내쪽으로 더욱 가까이 파고들었다. 숨을 참고 있었지만 그녀의 호흡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투경찰들은 바깥에서 잠시 의논을 하였다.

  "넌 저  쪽문을 열고, 넌 말이지 그쪽 초록 대문 집 벨을 눌러서 방금 누군가 들어왔는지 알아봐!"

  이제 쪽문이 열리면, 우린 잡혀갈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잡혀간 사람들이 당했던 모멸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잡혀간 뒤 소식이 끊긴 사람들도 많았고 어쩌다 풀려난 사람은 존엄성을 훼손당한 얼굴 표정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는 정신줄을 놓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닌다고 했다. 난 거의 체념 상태였다. 경애네 집이 알아주는 부잣집이라는 것도, 그녀의 아버지가 손꼽히는 권력가라는 것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여자를 납치한 파렴치한 운동권으로 몰리는 판국이었다. 난 그게 더 암담했다. 내가 잡혀 가더라도 오늘의 짧은 동행을 경애가 잊지는 않을 거란 막연한 기대뿐이었다.

  경애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겁에 질린 눈으로 몸을 더욱 내게 밀착하고 아주 조용하게 숨을 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한 몸의 움직임이 전해졌다. 그것을 느끼는 일이란 일종의 슬픔과도 같았다. 왜 내가 경애와 여기까지 왔는지, 적어도 함께 동행하기 전까지 그녀의 마음속에 내 존재는 있었던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짧은 순간에도 잡혀간 사람들의 이야기, 경애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나와 함께 있는 것인지 생각들이 뒤엉켜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럴수록 다가오는 공포는 차라리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게 했다. 수색을 하던 전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대장님, 여기 이 쪽문은 안으로 닫혀 있는데요? 여기로 들어갈 방법은 없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마, 좀 흔들어봐. 이렇게..."

  쪽문이 특유의 오래된 나무 질감 소리를 내며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난 거의 포기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가슴에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거 뭐 안 열리는 데? 그럼 아까 그 갈라진 골목, 그쪽이야. 전원 이동해!"

  구원을 알리는 소대장의 명령이었다.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가는 전경들의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다가오는 발소리와 사라지는 발소리는 확연하게 달랐다. 다시, 창고 안엔 나와 경애만 남았다. 짧은 안도의 시간이 찾아들었다.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만약 밖이 안전하다면 이제 각자 제 갈길을 가면 되는 건지. 도무지 경애는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쪽은 잠시 공포를 면하고자 나에게 의지했을 뿐인데 나 혼자 이러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복잡했다. 그렇긴 해도 사진관에 함께 오게 된 상황은 설명이 필요했다.


  사진관에는 왜 함께 있었으며, 그것도 내 옆에. 그리고 골목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왜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손을 잡게 됐고, 창고에 들어와서 더욱 몸을 밀착시키며 의지했을까.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전혀 없는데 그리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왜 나는 어떤 마음이었느냐고 용기 내어 물어보지 못할까. 이 관계는 누가 뭐래도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내가 주도하는 관계는 아니다. 그러면 내가 물어보기 전에 짧게라도 한 마디쯤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경애는 말이 없었다.

  나는 상대방이 마음을 열어준다고 생각하는 딱 그 정도에서 내 감정을 느낄 뿐이다. 이 관계는 대등하지 않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관계에 이토록 집착하고 있을까. 세상에 흔하게 널려 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같은 상투적인 관계에 왜 나는 집착했을까.

  그러고 보니 나와 경애는 오늘 전혀 대화가 없었다. 아니, 그녀를 알았던 지난 2년 동안 우린 의미가 담긴 대화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민기 씨, 어깨 좀 펴고 걸어봐. 사람이 왜 그리 늘 축 처져 있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은 있다. "표정 좀 밝게 해 봐. 입꼬리를 이렇게 올리고..." 이런 말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분명 경애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말처럼 했을 거다. 그런 대화 앞뒤에 이어지는 어떤 연결도 없다. 


  난 동기와 배경을 상실한 채 단지 시혜처럼 온 그 말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애는 매우  짧은 순간 지나가는 말처럼 남기고 친구들과 학생회관 쪽으로, 학교 방송국으로 걸어가곤 했다. 나는 학생기자였고, 그해 봄 시위를 따라다니며 취재했다. 학교 안에서 시작한 시위는 이내 교문 밖으로, 그리고 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있었다.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 직전이란 말이 들렸고, 전국으로 확대된 계엄 상황은 그들이 주도하는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20년 만에 찾아온 봄이라고 했다. 처음엔 매우 소극적으로 학생회관 앞에 짧은 격문이 붙더니 며칠 사이에 학교 안 전역으로 퍼졌다. 학교 안에는 한 개 소대의 전경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경 버스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무료하게 교내 이곳저곳을 순찰하거나 모여서 잡답을 하거나 때로 공 던지기를 하면서 아주 가끔은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수작을 걸곤 했다. 


  학생회관 앞에서 있었던 작은 집회는 바로 세를 불려 대운동장에 모이게 했다. 18년을 집권한 사람이 그 수하의 총탄에 맞은 지 7개월 만이었다. 전경들은 학교 밖으로 철수했고 그들도 세를 불려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진출을 막았다. 그러나 곧 학생들은 교문을 뚫고 시내로 진출했다. 학교 안에서 시내 중심가까지 집회의 연설과 인터뷰를 담은 녹음테이프는 내가 가지고 있다. 긴장과 공포의 시간이 흘렀다. 학교 방송국장 선배는 나에게 오늘부터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헬기에서 찍은 집회 영상에 내가 녹음기를 들고 취재하는 모습이 나왔다고, 경찰에서 그래서 나를 찾고 있다는, 어쩌면 나보다는 녹음테이프를 확보하려 한다는 친구의 전언이 내가 도피하고 있는 이유였다.

  경애와 나는 자주 마주쳤다. 캠퍼스에서, 학생식당에서, 방송국에서 마주쳤다. 우연이었다. 사실 그녀의 집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그녀의 생일날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신기하게도 열두 명 모두 남자였다. 난 그중 하나였다. 내가 왜 그 자리에 끼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우연이었다. 20대 초반 딸의 친구들을 위해 성대한 생일상을 차려주는 세계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난 몹시 주눅이 든 상태에서 거의 처음 보는 음식을 먹고 나왔다. 열두 명 중의 하나. '나를 왜 초대했느냐'라고 묻기조차 민망한 열두 명 중 하나였다. 


  그녀의 호화로운 집과 정갈한 음식, 식구들의 교양 있는 자세 등은 확실히 다른 세계의 그것이었다. 이것이 나와 그녀의 관계 정도였다. 그러므로 어깨를 펴고 다니라든지, 표정을 밝게 가지라든지 이런 말은 그냥 아무 연결도, 기약도 없이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었다. 나는 기억에 선명하게 남겼고 경애는 곧 잊어버린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다.

  이제 경찰들은 완전하게 이곳에서 철수한 듯했다. 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 창고에서 10분, 아니 5분이라도 더 있을 수 있다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었다는 것이 그냥 상황이 준 경험인지, 둘에게만 있었던 특별한 것인지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나는 시종 설렜지만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관계의 끝은 예상할 수 없다. 나에게 좋은 쪽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하여 감정을 절제해야 했다. 나와 경애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고, 삶과 생활, 친구, 대화, 취미 모든 것이 달랐다. 현실에서 우리를 잇는 끈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창고 안을 더욱 허허롭게 했다. 내가 더 강렬한 감정을 느낄수록 수습 불가의 상황이 올 수도 있었으므로, 난 어떻게든 다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04 새벽

  창고에서는 꽤 오랜 시간 있었으나 아무것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린 말이 없었고, 모든 시간은 각자의 방식으로 공포의 뒤끝을 수습하는데 썼다. 손은 잡지 않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없다. 창고 밖으로 나왔을 때 먼동이 트고 있었다. 땀이 식은 목덜미 서늘한 공기가 파고들었다. 오싹한 냉기였다. 창고에서 나온 후엔 큰길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다시 손을 잡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제의 도피 상황과 오늘 새벽의 이 상황은 분명 달라졌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 마치도 먼 과거의 기억처럼 흩어지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무슨 말인가는 하고 싶었으나 입속에서만 맴돌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이 도망 다니니 좋았다'라든지, '좁은 공간에 함께 있으니 기분이 묘했어'라는 말은 얼마나 웃긴가. 단 한 문장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길고 길었던 밤과 달리 새벽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큰 길가로 나왔다. 저편에서 경애를 발견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그녀의 집에서 들었던 교양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경애야, 아니 어디서 밤을 새우고 온 거니. 온 식구가 밤새도록 찾았다..."

갑자기 경애가 여인을 향해 뛰었다.

"엄마, 나 무서워서 혼났어."

"그래, 어디 보자. 다친 데는 없고? 어서 차로 가자."

  나는 경애가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검은 승용차에 올라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와 그녀 사이에 놓인 경계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물어볼 것을 그랬나... 왜 나는 한 마디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지? 질문이야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꼭 나에 대한 감정이 아니더라도 그냥 일상적인 대화는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녀는 내가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경애는 승용차에 몸을 실었고,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기 가득한 새벽안개가 내 몸을 칭칭 감쌌다. 난 멍하니 거리에 서 있었다. 가슴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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