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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l 02. 2020

미래지향적 교육과정 생태계 상상

국가교육과정 대강화, 교육과정 거버넌스 재구조화, 교과서 자유발행제 확대

더디게 흐르는 자치의 시간

     

2017년 12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와 교육부는 ‘학교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교육자치 정책 로드맵’을 발표하였다. 1995년 5.31 교육개혁안에 따라 각급 학교에 학교운영위원회를 설치·운영한 이래 가장 구체적인 교육자치 정책이었다. 왜 다른 여러 용어를 놓아두고 ‘로드맵(road map)’이란 말을 썼을까. 더 이상 추상적 선언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니 교육자치를 실현할 ‘구체적 경로’를 밝히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이 문서는 유‧초‧중등교육의 지방교육 분권을 강화하고 학교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을 교육자치의 목표로 제시하였다. 나아가 규제 위주 교육정책의 관행과 문화를 혁신하여 유연한 학교 운영과 자율적 교육활동을 통한 공교육 혁신의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그 추진배경을 밝혔다. 
 
이와 함께 초중등 재정지원 사업의 개편, 학교 운영 자율화, 시도교육청 운영‧평가 자율화 등 3대 즉시 이행과제를 제시했으며 교육자치 정책 로드맵 1단계에서 권한 배분 우선 과제 정비, 2단계에서 권한 배분을 위한 법령 개정을 적시하였다. 학교를 관료조직에서 배움과 돌봄의 공동체로, 시도교육청을 교육의 지방자치 실현과 학교자치 지원 기구로 전환하고, 교육부는 시도교육청의 자율적 정책 수립과 학교의 교육활동을 지원하겠다는 큰 그림은 이후 어떻게 진행되어 왔을까. 특히 법령상 근거가 없거나, 불투명한 경우 즉시 폐지 등 우선 조치하고, 명시적 근거가 있는 경우 법령 개정 등 권한을 배분한다는 로드맵의 방향은 어느 정도 구체화되었을까. 현실은 교육부와 시도교육청 간의 권한 배분 우선 과제를 정비하는 것에 그쳤다. 그 마저도 현장에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할만한 것은 없었으며 그저 업무 소관을 다투다 마는 것으로 귀결하였다.

이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교육과정의 자율성 확대는 이를 둘러싼 조건들의 성숙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의 자율성 확대는 그 자체로 다른 영역들의 진전을 견인하는 교육자치의 중심적 과제이자 다른 영역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의존성을 갖는다. 그로부터 2년이 경과한 지금, 호기롭게 선언했던 학교 민주주의 구현이라는 목표는 달성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교육자치의 시간은 매우 더디게 흐르고 있다. 

     

     

교육과정의 생명력 


교육과정의 개념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지식 전수의 입장에서 볼 것인지, 경험의 축적 및 구성의 입장으로 볼 것인지, 문서로 고시되는 규범적 성격으로 이해할 것인지, 교육의 장에서 이뤄지는 총체적 삶의 구현 방식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교육과정은 각기 다른 정체성과 생명력을 갖는다. 자치 혹은 분권과 관련하여 교육과정을 사고하자는 의견, 교육과정 거버넌스의 재구조화를 다시 생각하자는 의견들은 현행 교육과정이 갖고 있는 경직성을 탈피하자고 한다.  


현재 교육과정이 고유의 정체성과 생명력을 확보하지 못한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입시의 덫’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입시 지배력이 기형적으로 큰 탓에 교육기본법에서 말하는 교육이념, 국가교육과정에서 내걸고 있는 추구하는 인간상, 핵심역량 등은 생명력을 잃는다. 과도한 입시 지배력은 자원을 둘러싼 소모적 각축을 부추기며 교육활동을 왜곡한다. 입시를 둘러싼 기계적 공정성 논리는 교육과정-수업-평가의 순환과 연계를 훼손한다. 이 논리는 과정중심평가를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고교학점제, 성취평가제와 충돌한다. 이는 교육과정 개선과 체제 재구조화를 논의할 때 한계를 안고 들어가는 악순환을 예고한다. 


초중등교육법 제23조 1항은 학교는 교육과정을 운영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교육과정의 최종 실행 단위는 학교임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과정 운영의 주체인 학교는 연구‧개발‧고시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다. ‘자치(自治)’는 지역이나 기관의 구성원이 스스로 책임지고 운영하는 민주주의의 한 방식이라는 개념이 어색할 정도이다. 교육과정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독점은 국가교육과정 개편을 긴장과 다툼의 대상으로 만든다. 자치의 과정은 권한 독점을 해소하여 분산하는 것이며, 폐쇄적 체제를 개방적 체제로 만들고 소외를 참여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를 다루는 교육과정이 그 실행 주체의 냉소를 극복하고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내용과 방식, 구조를 제시해야 한다. 


국가교육과정 총론과 각론, 계획과 실행 차원의 괴리가 심각하다. 2015 개정교육과정 총론은 그 첫머리에 교육과정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2015 개정교육과정은 국가 수준의 공통성과 지역, 학교, 개인 수준의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하기 위한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이다. 아울러 학교와 교육청, 지역사회, 교원‧학생‧학부모가 함께 실현해 가는 교육과정이며 학교교육 체제를 교육과정 중심으로 구현하기 위한 교육과정임과 동시에 학교교육의 질적 수준을 관리하고 개선하기 위한 교육과정이다.

추구하는 인간상은 교육기본법 2조에서 정하고 있는 교육이념과 교육목적에 기초하여 전인적 성장을 바탕으로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진로와 삶을 개척하는 자주적인 사람, 기초 능력의 바탕 위에 다양한 발상과 도전으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창의적인 사람, 문화적 소양과 다원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 문화를 향유하고 발전시키는 교양 있는 사람,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세계와 소통하는 민주시민으로서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더불어 사는 사람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길러야 할 핵심역량으로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 등 여섯 가지로 설정하였다. 교육과정 총론은 이밖에 교육과정 구성의 중점, 학교 급별 목표와 교육과정 편성‧운영 기준을 포함하고 있다. 


국가교육과정 총론의 성격과 추구하는 인간상, 핵심역량 등의 가치는 각론에서 구체화되지 못하고, 현장에서 실행되는 방식과는 괴리가 크다. 혹자는 교육과정 총론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설정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이들은 총론을 실행 차원에서 구체화하지 못하게 하는 다른 요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식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상은 교육기본법 2조의 교육이념을 구현하는 인간상이어야 한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창의융합적 인재’는 문이과통합형 인재를 풀어쓴 것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인적 발달과 민주시민’이라는 목표가 교육이념에 더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다수의 교육과정 전문가들은 총론이 실행 차원에서 구체화되지 못하는 요인으로 과도한 입시 지배력, 지역과 학교의 자율성 부족, 경직된 교과서 제도, 교육과정 개발‧고시 단계에서 민주성과 투명성의 결여, 교육과정 운영 주체인 현장의 소외, 충분히 독립적이지 못한 교육정책 등을 꼽는다. 문서상의 규범으로 고착화하면서 생명력을 잃어가는 교육과정, 어떻게 하면 살아 숨 쉬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교육과정 생태계 복원 전략 

     

교육 생태계는 교육과정이 작동하는 장을 이르는 말이다. 교육과정은 국가와 지역 층위에서, 그리고 학교와 교실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작동하는 유기체와 같다. 이 유기체는 뿌리에서 자양분을 흡수하여 각 부위로 나르고,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면서 성장한다. 어느 한 부분이 막혀 있거나, 양분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는다면 성장이 왜곡되거나 퇴행한다. 우리는 그동안 국가-지역-학교를 잇는 교육과정 생태계를 유지해 온 바, 국가 차원의 비대한 개입이 지역과 학교의 순환을 가로막아온 역사를 경험하였다. 추구하는 인간상을 구현하려는 노력은 입시 대응 등 당장의 쓸모를 추구하는 교육과정 실행 앞에서, 수시로 분출하는 사회적 요구 앞에서 무력화되었다. 문서로 고시하는 경직된 교육과정은 학교 차원에서 단순 시수‧편제 방안으로 교육과정의 개념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한편에서는 성취평가제, 고교학점제를 준비한다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정시를 확대하는 등 자기 부정과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5.31 교육개혁안 이후 다양한 방식의 학교 자율화 제고 방안이 도입되었으나 학교는 여전히 자치공동체로 작동하지 않는다. 미래교육 담론이 봇물을 이루고 있으나 정작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 전환에 대한 고민은 없다. 미래지향적 콘텐츠를 구시대의 그릇에 담아 실현하고자 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교육자치는 여러 이유로 더디게 이행하고 있다. 모든 변화는 기회와 위기를 동반한다.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단순히 변화가 더딘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기 국면으로 바뀐다. 개혁을 위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는 이유이다. 아래에 교육과정 생태계를 복원하는 몇 가지 전략을 제시한다.   
 

1. 교육과정 개념의 실질적 확장 

     

권위주의 정권 시대 교육과정은 국가주의적 이념을 재생산하고 정권 차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도구로써 기능하였다. 그러기 위해 교육과정은 학교와 교실을 통제하는 강력한 규범이어야 했다. 교과서는 이러한 기능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제작, 보급하였다. 교육과정은 마땅히 전수해야 할 지식으로, 공식 문서로 작동하였다. 정권이 바뀌면 교육과정도 따라 바뀌는 악순환을 반복하였다. 교육과정이 교육주체를 넘어 시민들의 관심 사항이 된 것은 7차 교육과정 개정 시기였다. 7차 교육과정은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학생 중심 교육과정’, ‘주어지는 교육과정에서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표방하였다.

7차 이후 교육과정은 수시 개정의 대상이 되었고, 2009 개정 교육과정을 거쳐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이르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국가교육과정의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수준별 수업, 집중이수제 도입, 문이과 통합형 등 강조점은 달랐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경직된 교육과정의 성격을 고수하였다. 총론 및 각론과 성취기준, 교과서 집필지침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규정되는 국가교육과정 개입력은 학교 층위에서 생명력을 가져야 할 교육과정을 획일화, 경직화시켰다. 여기에 대학입시 공정성 논란은 교육과정을 표준화된 지식의 전수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포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봉쇄하였다. 
 

만들어가는 교육과정, 삶과 연계하는 교육과정은 학교에서 실질적 작동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미 문서로 주어진 것만 교육과정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또 학생들 사이에, 학생과 교육내용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식의 축적과 구성, 경험의 교환 등은 모두 교육과정의 포괄적 범주 안에 있다. 과정중심평가의 정착을 비롯하여 교육과정-수업-평가 일체화 논리는 모두 교육과정을 현재 진행형의 능동적 구성물로 볼 때 의의를 갖는다.  


2. 대강화와 자율성

     

2017년 서울시교육청은 ‘서울미래교육상상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현장의 정책 제안을 받았다. 많은 학교 구성원들이 ‘학교자율운영체제’의 정착을 첫 순위로 꼽았다. 학교자율운영체제는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 재정운용의 자율성, 인사/조직 운영의 자율성 등을 주요 내용으로 포함한다. 교육과정 운영의 주체는 학교로 명시돼 있지만, 사실상 시수 편제 이외에 학교별 특색 교육과정을 만들어보거나,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를 연계하는 학교 단위의 혁신은 엄두를 못 내는 현장의 실정을 극복하고자 교육과정 운영 주체들이 제안한 정책이었다. 학교 교육과정의 자율성 확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은 ‘경직된 국가교육과정’이다.

특히 국가교육과정에 따라 촘촘하게 제시되는 교과서 집필지침은 모든 교과서를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말만 검정일 뿐 사실상 국정이나 다를 바 없는 교과서는 교사와 학생의 교육과정 여백을 앗아가고 있다. 교육과정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교육과정의 대강화를 주장한다. 국가교육과정의 대강화 속에는 내용 요소의 적정화가 포함돼 있다. 높은 난이도의 많은 분량의 지식을 제시하는 방식으로는 학업 포기자를 지속적으로 양산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한다. 


지금은 대강화의 필요성을 합의하고 대강화의 구체적 성격과 폭을 논의할 때이다. 큰 틀에서 합의를 볼 수 있는 대강화의 수준은 학교급별 교육목표와 발달단계별, 교과별 성취수준 및 최소 이수단위의 명시 정도이다. 다만, 대강화라고 해서 추상적 기술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제시할 수 있는 범위를 최소화하되 명료하게 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밖의 나머지 사항은 모두 시도와 학교로 이관하여 자율성의 정도를 높여야 한다. 사실상 국가교육과정의 대강화와 적정화를 기할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교육과정은 안정성을 회복할 수 있다. 지나치게 촘촘하고 경직된 교육과정을 구성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과정 개정의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교육과정 구성 단계에서 정치논리를 최소화하고 사회적 요구를 적정화하는 것 역시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3. 교육과정 거버넌스의 재구조화 

     

기존 교육과정 체제에서 단위학교는 국가교육과정 및 시도교육과정편성·운영지침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됨으로써 이중의 제약을 갖는다. 교육과정 거버넌스를 재구조화하자는 논리 역시 현행 교육과정이 가지고 있는 경직성, 획일성, 폐쇄성에서 비롯한다. 미래지향적 교육과정 거버넌스 재구조화의 핵심은 교육과정 실행의 최전선인 학교에서 교사들이 충분한 자율성과 평가권을 기초로 하여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구현하는 것이다.  교육과정 거버넌스의 변화는 단순히 권한의 이동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단위학교에서 교육과정 편성·운영과 수업 및 평가에 있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개선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단위학교 교육과정위원회’를 상상할 수 있다. 이 경우 시도 교육청은 단위학교의 교육과정 운영의 지원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단위학교 교육과정위원회의 운영 성과는 학교 민주주의의 진전 정도에 비례할 것이다.

단위학교에서 교육과정 운영의 중심을 유지하자는 제안은 국가교육과정의 대강화와 맞물려 진행돼야 한다. 아울러 국가교육과정의 연구·개발·고시 과정에 현장이 적극 참여하고 이를 통하여 민주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교육과정의 개발, 운영 및 평가의 전 과정에서 국가, 지역, 학교 수준에서 견지해야 할 원칙과 지원 방안을 명시해야 한다. 단위학교를 중심에 놓는 교육과정 거버넌스의 재구조화는 교원의 자율성과 책임성, 그리고 전문성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이를 위한 교원 역량 강화 방안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단위학교에 교육과정 거버넌스의 중심이 놓일 때 생기는 논점은, 국가교육과정 및 지역교육과정 영향력과 비중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의 안은 시도 교육과정을 지원체제로 자리매김하고 (대강화된) 국가교육과정 아래 바로 학교 교육과정이 연결되게 하는 안을 검토해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국가교육과정 대강화의 폭을 크게 하고 자치, 분권의 정신에 맞게 지역 차원의 교육과정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거버넌스 재구조화는 전환 시기에 나타날 수 있는 과도기적 혼선을 극복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4. 교과서 자유발행제 도입

     

교과서 자유발행제 도입은 문재인 대통령의 교육공약 중 하나였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위원회는 교과서 발행 체제 개선을 권고하였고, 교육부가 이를 받아들여 추진 계획을 마련하였다. 현재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국정, 검인정 교과서 체제는 학교 단위 교육과정을 경직화, 획일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교과서 자유발행제 도입의 전제는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동일선 상에서 사고하지 않는 것이다. 교과서는 교육과정을 구현하는 여러 구성물 중 하나일 뿐이다. 경직된 교육과정은 교과서를 절대화하고, 내용 전달 위주의 진도 빼기 수업을 고착화시킨다. 이는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요인이다.

교과서 자유발행제가 제안되는 근본 이유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자율성, 창의성, 다양성을 담기 위해서다. 현재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교과서 자유발행제는 ‘소극적’ 자유발행제라고 할 수 있다. 소극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유발행제의 근본 취지보다는 기능적 필요에 의한 도입이기 때문이다. 전문교과, 예체능교과, 학교장 개설과목을 비롯하여 고교학점제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학생들의 수요가 있으나 검인정으로 충족되지 않는 교과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방식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발행제라기보다는 인정 교과서 체제의 포괄적 범주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교과별 기준은 심사에서 제외하고 공통 기준만 심사하는 것으로 심사 기준을 간소화하는 ‘자유발행의 요소를 적용한 인정도서’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에 반하여 ‘적극적’ 자유발행제는 교사의 수업 자율성을 최대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즉, 교과서 집필지침의 구애를 받지 않고, 반드시 교과서 출판 공급업자를 거치지 않아도 되며, 교사가 교재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교과서의 범주는 디지털 매체를 포함하여 수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자료라 할 수 있다. 적극적 자유발행제는 평가 방식에 있어 ‘교사별 절대평가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자율발행제 계획은 추후 대입시 개선, 학교단위 평가 패러다임 전환과 함께 맞물리며 추진되었을 때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을 갖지 않는다면 자유발행제든 인정 교과서든 큰 차이가 없는 상태에서 자율성과 창의성 신장과는 동떨어진 교과서 체제를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정, 검인정이 교과서 간 차별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교과서 자유발행제의 도입은 교과서의 범위를 정해 놓은 초중등교육법의 개정 등 이를 가능하게 하는 법, 제도의 개선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교과서 자유발행제는 국가교육과정 대강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대강화의 폭은 자유발행제의 성격,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 적극적 자유발행제는 대강화의 폭이 훨씬 커질 것을 전제로 한다. 국가교육과정 대강화, 교육과정 거버넌스 재구조화, 교과서 발행 체제 개선은 분리된 사안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개선의 효과를 높이는 묶음 제안이다. 또한 자치, 분권의 방향 아래 학교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확대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5. 단계별 개선 방안 추진 


다음 교육과정 개정 시기에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개선하는 것이 목표이나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이때 선택하는 전략이 단계별 개선 방안이다. 우선 다음 교육과정 개정에서는 1단계 국가교육과정 대강화 수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고, 연구·개발·고시 단계에서 현장의 최대 참여를 보장하며 이 과정에서 민주성과 투명성, 공정성을 기한다. 시도 교육감에게 승인이 위임돼 있는 인정교과서를 확대하고 시도별 공동 활용 방안을 마련한다. 교육과정이 정한 필수 이수단위를 축소하고 인정 교과서의 집필기준을 완화한다.

이 같은 시도는 교육의 자치, 분권을 진전시키고 지역과 단위학교의 교육과정 자율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교육과정 거버넌스 재구조화 전략의 단계별 추진 방안이다. 단위학교 교원의 역량 강화를 통하여 교육과정의 포괄적 개념 이해,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의 실제, 교육과정 구현물로써 교과서의 위상과 역할, 교육과정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교재 제작 및 기성 교재 선택 방안 등에 대한 활동 기반 교육을 실시한다. 이는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이해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며 단위학교 교육과정위원회 설치 운영의 사전 단계이기도 하다.


다음 단계에서는 실질적인 국가교육과정의 대강화, 단위학교 교육과정위원회 설치 및 운영을 핵심으로 하는 교육과정 거버넌스의 완성 및 교과서 자유발행제 도입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교육과정과 관련한 시도의 역할을 분명하게 정한다. 요컨대 지금까지의 교육과정 개정은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교과·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앞으로는 학교 단위 교육과정의 자율성, 창의성,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큰 전략들을 구체적으로 추진해야 하여, 이 과정에서 국가와 지역은 어떤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거시 전략을 설계하고 그 속에서 단기 과제들을 처리하는 것과 그저 현안 문제에 매달려 졸속 수정을 반복하는 것은 그 효과나 지속성이 확실히 다르다.  



맺는 말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교육과정 정책을 보면, 새로운 교육과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면 전문가에 의한 연구·개발 과정을 거쳐 교육부가 확정·고시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 다음 새로운 교육과정의 성격과 내용을 연수를 통해 현장으로 전파한다. 교과 및 시수 편제는 새롭게 변하지만 수업의 내용과 방식은 큰 변화 없이 이어진다. 이 사이클은 수십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악순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요구의 분석과 연구·개발 시점부터 교육과정 실행의 주체인 현장교사가 참여해야 한다. 의사소통 구조를 상향식으로 전환한다. 이 과정이 미래지향적 교육과정 거버넌스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글에서는 교육과정 생태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들 각각은 사실 새로운 것이 없으며 그동안 지속적으로 제안돼 왔던 것들이다. 다만, 각각의 제안들은 상호의존적으로 얽혀있기도 하고, 전제가 되는 사항이 풀려야 다음 사항으로의 이행이 보장되는 경로 의존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살아있는 교육과정,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통하여 교육과정 생태계를 역동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각 제안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통합돼야 하는지를 밝혔다. 제안의 중심은 교육과정의 개념 확장, 국가교육과정의 대강화와 학교 교육과정의 자율성 확보, 교육과정 거버넌스의 재구조화와 교과서 자유발행제에 두었다.

지난 10년 동안 단위학교에서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 혁신학교와 자유학기(년)제 운영 경험 등은 단위학교 차원의 교육과정 개발 및 재구성 방법을 경험하게 했다. 고등학교 역시 개방형, 연합형 등 선택 교육과정의 확대로 교육과정의 다양화 국면을 경험했다. 또한 고교학점제를 준비하면서 교과서 자유발행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서 다룬 내용 외에 교육과정과 밀접한 연계를 갖는 대입시 개선 방안, 일부에서 제안하고 있는 ‘사회적 교육과정위원회’ 설치, 교육과정 관련 국가교육위원회의 역할 등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나 여기서 다루지 못하였다. 이 글에서 충분히 구체화되지 못한 영역들은 이어서 진행될 교육과정 주제 세션에서 풍부하게 제안되리라 생각한다. 


* 이 글은 2019년 시도교육감협의회 교육자치 포럼에서 발표한 것이다. 인용 방법은 아래와 같다.
함영기(2019). 교육과정 생태계의 미래지향적 복원. 2019 대한민국 교육자치 콘퍼런스 발표 자료 


*커버이미지 https://www.citynews1130.com/2019/11/01/ontario-elementary-school-teachers-vote-overwhelmingly-in-favour-of-strike-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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