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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l 23. 2019

어떤 방학

한 학기의 마감이 부끄러웠던 날 

오늘 방학식을 했다. 체력과 멘털이 동시에 버거웠던 한 학기였다. 언제나처럼 몇 아이가 다가와 "선생님, 고생하셨어요"라고 말한 후 교실에서 나갔다. 이제 방학을 했으니 적어도 이십 며칠 동안 난 내 세계로,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각자 삶을 살 거다. 이 번 학기엔 화초 기르기와 책 읽기에 집중했는데, 화초는 학기말쯤 되니 다육식물을 빼고는 거의 시들었다. 바람을 덜 쐬어 준 탓이다.  



살아남은 화초들 


학기 초에 내가 열 권 남짓 기증한 책과 아이들이 한 권씩 가져온 것으로 시작한 학급문고는 그런대로 잘 됐다. 학급 책을 다 읽고, 학교 도서관을 드나드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나 두 번이나 다독반에 선정됐다. 부상으로 받은 간식은 맛있었고, 오늘 받은 문화상품권을 어떻게 사용할지 잠시 행복한 고민도 나누었다. 공부 잘해서 받는 상보다 이게 아주 값진 거라고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다.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교실은 아직도 아이들 특유의 소음이 남아 있는 듯하다. 책상 여기저기에 아직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붙어 있다. '이곳에 귀하지 않은 삶은 없다'는 배움터 새김말(급훈)을 정하고 '상대가 말을 할 땐 그의 눈을 보라'는 단 하나의 학급 다짐으로 보낸 한 학기였다. 물론 기대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에너지가 넘쳐, 담임이 한 문장을 온전히 말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적어도 세 놈이 한 마디씩 끼어드니 오죽하면 "얘들아, 나도 좀 존중해줘. 학급 다짐은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야"라고 몇 번이나 읍소를 해야 했다. 그뿐인가? 전교 최고의 식성으로 담임으로 하여금 옆 반으로 수시로 밥을 구걸하러 다니도록 한 배려심 없는 놈들이었다.

배움터 새김말(급훈)


그러나 이제 나에게도 아이들의 더딘 변화, 혹은 밖으로 발견되지 않는 의식의 내면화 같은 것을 읽어내는 잔재주가 생겼음을 믿는다. 이것은 교직 30년 만에 내 안에서 숙성된 스스로의 성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아이들에게 성장이란 말을 하려면 적어도 10년, 20년 앞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학창 시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에게서 '전인적 발달'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조급증이거나 성과주의에 빠져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환경구성의 처음과 끝, '나' 드러내기


하지만 그 더딘 '교육의 효과'에 대한 믿음은 나의 믿음이고, 서울에서도 가장 교육열이 강하다는 이곳에서는 의지와 실천을 통일하기가 참으로 힘겨웠다. 지난 학교에서 방학식날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인사했던 추억이 떠올라 잠시 아쉽고 슬픈 기분을 느꼈다. (창 밖 매운 바람에도 내 가슴은 벅차다 http://eduict.org/_new3/?c=1/23&uid=9890)


텅 빈 교실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아이들이 쓴 자기소개글과 화초들, 낡은 학급문고를 살펴본다. 문득 가르치는 일 30년 만에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를 회의하고 의심한다. 왜 이런 느낌이었을까? 회의와 의심은 내 주특기이지만 그것을 다시 조립하고 재구성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고백하자면 이곳에서 난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기보다 버티는데 급급했다. 한 학기의 마감이 몹시 부끄럽다.

* 5년 전 오늘 필자가 학교에 근무할 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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