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누구를 기록하나
김정호의 삶을 전하는 기록은 많지 않다.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수록된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과 「지지변증설」, 신헌의 『금당초고』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김고산정호」에 불과하다.
그 기록을 모두 합해도 현재의 A4 용지 한 장 안팎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양이라 하니, 문득 그의 삶이 궁금해진다. 김정호가 황해도 토산 출신이라든지, 도성 숭례문 밖의 만리재나 약현 부근에 살았다는 등의 일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인생의 대부분을 바쳐 만든 그의 지도 대다수가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렇듯 기록이 없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발달한 조선에서 태어나 산 사람이다. 그런데 가계 기록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일단 양반은 아니었다는 데 이른다. 나아가 중인일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신분이 높지 않은 사람들 중 출중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기록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김정호의 전기가 실렸다는 점, 『지구전후도』, 『수전전도』,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 『대동여지전도』에서 확인되듯이 판각에 뛰어난 각수(刻手)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는 평민출신의 장인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뛰어난 수많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지 않은 것은 그가 평민이었기 때문이며, 이는 전통시대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민사회가 들어서기 전까지 세상엔 왕과 귀족들만 살았다... (고 역사는 기록한다.)
전시회의 마지막 날 찾은 김정호 전시회였다. 그가 제작했다는 지도는 연신 감탄을 부르는 탁월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전시를 보는 중에 내 마음에 머무른 생각은 왜 그의 기록이 충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가 양반도 중인도 아니었다는 점을 빼면 도무지 추측할 수가 없었다.
전시 중인 19판 22층의 모판 대동여지도는 항공사진을 찍은 듯 한반도의 모양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백두산 부근 일부를 제외하면 축척이나 거리, 기호 등등 현대 지도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 지도 제작 도구도 거의 없었을 텐데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천재적인 장인 정신, 한 가지에 무섭게 몰입하는 자세, 극단적 성실함에서 나온 마스터피스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보는 행위는 결국 나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도무지 나는 무슨 삶을 살고 있나. 질은 나중에 생각하고 무엇이든 기록이나 열심히 하자던 다짐도 지금은 희미하다. 백 가지의 핑계도 거대한 장인 정신 앞에선 무의미하다.
이렇듯 훌륭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던 문화국가였던 조선이 그를 기록하는 과정은 너무 소홀하였다. 왕조실록은 꼬박꼬박 기록하고 보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과연 왕조국가답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상것들은 죽은 듯 산 삶이었나. 만약 김정호를 비롯한 미천한 신분의 장인들을 발굴하여 상세하게 기록했다면 후대의 우리 삶은 좀 나아졌을까.
* 사실 관계의 많은 부분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김정호 항목에서 참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