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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Feb 12. 2024

감정과 이성, 통념을 넘어

우리 마음속 이성과 논리에게도 말을 걸자

사람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인 감정과 이성은 자주 흥미롭게 대비된다. 둘 다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비교될 때도 있고 어느 하나가 긍정적인데 다른 하나는 부정적일 때도 있다. 가령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은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분위기에 쉽게 편승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이성적이라는 말 역시 긍정적으로는 '차분하다'라는 뜻을 내포하지만 부정적으로는 '냉정하다'라고 해석된다. 

당신은 감정적인가, 이성적인가라고 묻는 것은 좋은 질문은 아니다. 감정과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 측면일 뿐,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어느 한쪽이 상대적으로 더 노출될 뿐이다. 타자의 의견이나 주장에 귀 기울여 나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을 '공감'이라 한다. 공감에도 감정적 공감과 이성적 공감이 있다. 물론 사람은 양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이 강하게 혹은 약하게 나타난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내가 기대한 것은 분석이 아니라 그냥 공감한다는 말 한마디였어."와 같은 것이 있다. 감정과 정서를 앞세운 상황이다.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냥 들어주는 것"이다. 말하다 보니 풀렸다는 것이 바로 이 경우다. 여기서 한 가지. 그냥 듣는 것과 이해를 동반한 청취는 다르다. 그냥 듣는  단계는 감정적 공감을 위한 첫 단계이다. 화자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래, 그랬구나"를 반복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면 된다. 누구든 약간의 의지만으로도 할 수 있다. 인간 심리의 양 측면 중 먼저 작동하는 것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뇌에서도 이 정서 영역이 먼저 활성화한다니 말이다. 


이해를 동반한 공감을 위해서는 이성이 작동해야 한다. 배가 고프다는 상대의 말을 듣고, '배가 고프구나. 나도 그런 것 같네.'까지는 감정이 반응한다. 한편 이 말을 듣고 '아침 먹은 후 다섯 시간이 지났으니 배가 고플 거야.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까지 나아가는 것은 이성의 단계다. 양 측면의 차이는 바로 실천 의지이다. 누구나 정서적으로는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위한 전략에는 생각이 필요하고, 이 생각을 끌어내는 기제는 이성이다. 실천이 공적 절차에 담기면 참여가 된다. 이성의 작동으로 인한 실천과 참여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MBTI 등과 같이 사람의 심리를 유형별로 나누는 것은 흥미롭지만 때로 위험하다. 상대적으로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 있고, 무엇을 하든 논리적 접근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순 있겠지만, 어느 한 유형으로 재단해 버리기에 사람의 심리는 매우 
복잡하다. 이런 분류는 선입견을 만들어 사람을 '좁게' 보도록 유도한다. 문과형, 이과형으로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어느 한 유형에 가둘 이유는 전혀 없다. 두 가지는 모든 개인의 마음속에 섞여 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어느 한쪽의 심리가 조금 더 외화할 뿐이다. 

위로를 구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은 위로 그 자체에 주목한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은 문제해결에 집중한다. 
따뜻함을 동반한 위로는 곤경에 빠진 사람에게 정서적 편안함을 준다. 문제해결적 접근은 다시 일어설 방향과 의지를 제공한다. 두 가지 모두 빼놓을 수 없는 위로의 방법이다. 물론 사람마다 선호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그저 들어주는 것을 원하는 사람, 적극적인 공감을 선호하는 사람, 한걸음 더 나아가 문제해결의 동기를 제공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따로 떨어져 있는 듯 보여도 이러한 과정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사실은 일어나야 한다는 당위성이 더 크다. 통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듣는 사람'의 역할은 단순하지 않다. 반려동물도 주인의 하소연을 (물리적으로는) 들을 수 있다. 때로 연민의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겠지만 반려동물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이해하고 있어. 그러기에 상대는 풍부한 경험이 있어 보여."라는 느낌은 듣는 사람에게 더 많은 정보를 주고 싶은 동기를 부추긴다. 직관으로 알 수도 있고,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듣는 정보가 풍부하면 문제해결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말하기 훈련 못지않게 듣기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회의를 상상해 보자. 여성은 회의 분위기나 협의 과정을 중시하고 남성은 회의 결과에 집중한다는 통념이 있다. 여성은 과정지향적, 남성은 과제지향적으로 분류하는 이 잘못된 통념은 성역할을 구분하고 좁게 가둔다. 좋은 회의를 위한 준비는 회의장의 환경 구성이나 구성원에 대한 존중과 경청에만 있지 않다. 핵심을 외면하지 않는 분석과 대안 마련에는 남녀가 따로 있지 않다. 회의는 화기애애했으나 과제해결을 위한 진도는 한걸음도 떼지 못했다면 낭비일 뿐이다. 이 모든 구분들이 감정과 이성을 구분하고, 정서와 사고를 구분하며 이것도 모자라 성역할에 갖다 붙이는 이분법에서 비롯한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통념은 늘 합리적일까. 그렇지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통념에 의심을 갖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론과 실천, 감정과 이성, 정서와 논리가 분리되는 순간 우린 제각각의 삶을 산다. 
그것들이 내 안에서 통합될 때 타자에 대한 이해는 깊이를 더한다. 인생은 더 풍부해지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유독 한국에서만 기승을 부리는 문과형 인간, 이과형 인간, 과정 지향, 과제 지향 등의 구분은, 심지어 나와 타자를 선악으로 분리하는 나쁜 용도로 쓰인다. 사회의 각 영역이 양 극단으로 치닫는 소모전은 모두에게 해롭다. 
 
이곳 브런치에는 좋은 글들이 많지만, 내가 느끼기에 '정서 지향의 소소한 감동을 주는 글쓰기'가 많고, 또 많이 읽힌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삶은 아름다워요."라고 자족하기에는 세상이 훨씬 더 복잡하고 얽혀 있다. 
감정과 정서에만 머물러있지 말고 가끔 우리 마음속 이성과 논리에게도 말을 걸자.



커버 이미지 https://philosophynow.org/issues/144/Reason_and_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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