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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회문화

만들어지는 뉴스

한 번 더 걸러 보고 듣겠다는 태도로 뉴스 생태계를 바꿀 수 있을까

by 교실밖

보도는 신문이나 방송으로 나라 안팎의 '새로운 소식'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다. 이 새로운 소식이 바로 '뉴스'다. 그러니 소식을 전하는 것이 바로 뉴스 본연의 의미다. 물론 지금 뉴스의 본래 의미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뉴스는 만들어진다.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가공된다. 특히 온라인 뉴스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 뉴스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진다.


요즘 사실 관계를 정확히 알고 싶은 사람의 뉴스 소비 욕구는 과감하게 무시된다. 레거시 미디어와 유튜브는 요즘 뉴스의 생산 기지이다. 제각각 사실에 충실한 공정보도를 표방하지만, 최근 흐름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면 뉴스는 길을 잃는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2024년 미국 대선 양상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은 것은 트럼프 후보에 대한 충격적 암살 미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공화, 민주 양당의 프레임 중심 전략이 잦아들고 '국민 통합'이 선거 캠페인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트럼프는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통합해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진정한 미국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라고 적었다. 미국인들은 환호했고 트럼프는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됐다.


LeZipce9-640.jpg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총격 소리를 들은 순간 미국 역사에서 기록돼야 할 순간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1957년 10월 구 소련은 스푸트닉 우주선을 쏘아 올렸다. 미국의 주요 신문은 일제히 "러시아가 우주경쟁에서 미국을 앞섰다"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이후 NASA가 만들어지고, 국방교육법이 통과되었다. 우즈홀에 모인 일단의 학자들은 교육이 미국의 국가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들었으니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미국교육은 모학문의 지식의 구조를 뼈대로 하는 학문중심교육과정으로 재편되었다.


d00959aa284e9012a5de32a2869ab361.jpg 1957년 10월 5일 뉴욕 타임즈 1면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아예, '공장'을 표방한다. 공장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곳이다. 단순하게 유통하는 곳이 아니다. 김어준은 뉴스 유통자가 아닌 생산자 역할을 자임한다. 자신을 부르는 명칭도 '공장장'이다. 이 방송을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뉴스 진행 방식을 볼 때마다 위태로움을 느낀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진영 논리와 이에 따른 생산 방식이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언론 권력이 된 김어준에게로 정치인들이 몰린다. 한 번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홍보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뉴스는 정치를 움직인다.


1182_1831_4421.jpg 김어준의 뉴스공장


손석희는 유튜브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유로 든 것이 '알고리즘'이었다. 하긴 유튜브 알고리즘을 쫓다가 극우 유튜버의 주장에 빠져 큰 일을 저지른 사람도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언론인의 뉴스 소비 방식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지금 대중이 무엇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움직이는 지를 알기 위해선 유튜브 작동 방식을 체험하는 것이 필수이다. 지금도 안 보는지는 모르겠다.


최근 뉴스 소비 방식은 종이 신문보다 온라인을 통한다. 이때 어떤 제목을 달 것인 지가 뉴스의 노출 빈도를 결정한다. 그러니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용과 상관없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다. "연예인 아무개 전격 이혼"이라는 제목을 이끌려 클릭을 하면 내용에는 "드라마에서..."라고 나온다. 해외의 자극적 뉴스 역시 '해외' 또는 '국제'라는 말머리를 생략하고 제목을 단다. 뉴스 소비자는 당연히 국내 뉴스로 착각하고 마우스를 클릭한다. '조회수'라는 망령이 온라인 뉴스의 성패를 결정한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클릭질을 유도하는 행태가 만연한다. 유통되는 뉴스의 상당수가 쓰레기로 전락한다.


old-news-paper-1000x1000.jpg 쓰레기로 나가기 전에도 뉴스는 이미 쓰레기였다


지금 세계는 이것 아니면 저것을 말해야 생존을 유지하는 장이 되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와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철학과 윤리학이 쓸모를 다 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애초 '뉴스'의 탄생이 소식을 전하고 수익을 내자는 동기에서 비롯한 것임을 모르지 않지만 현실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이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다.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소식을 전할지는 전적으로 뉴스 생산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 뉴스를 볼지 말지, 조회수를 늘려줄지 말지는 여전히 소비자의 태도에 달려있다. 적극적으로 지켜야 하는 뉴스 소비자의 주권이다. 오직 수익만을 바라면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여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을 따라가긴 힘들다. 읽지 않고, 보지 않을 권리는 여전히 소비자에게 있다는 인식으로 한 번 더 걸러 보고 듣겠다는 태도로 뉴스 생태계를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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