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자국 우선주의만을 내걸고 경제 전쟁을 하겠다는 강대국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정상회담 방송을 시청했다. 젤렌스키는 "전쟁을 시작한 쪽은 러시아다. 이대로 끝내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트럼프는 "더 이상 전쟁을 끌고 가는 것은 희생만 따를 뿐, 현시점에서 끝내야 한다"라고 말한다. 전쟁을 끝내는 것은 양자의 소망이지만 그 방식은 현저하게 다르다.
젤렌스키는 한편으로 미국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서방 자유 진영의 리더로서 미국의 의무를 강조한다. 전형적인 가치 지향 호소이다. 트럼프는 가치 이전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느냐를 따진다. 이것을 정치적 올바름과 이득 실현의 입장으로 대별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 충실했다. 그러니 이를 보는 사람들도 먼저 침공한 자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쪽과 무엇이든 손해 보는 것에는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입장으로 나뉜다.
트럼프의 기세에 굽히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젤렌스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밴스 부통령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오면서 정장을 입었네 안 입었네 하면서 젤렌스키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좋은 회담 방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는 것을 의식했는지 무시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국제 정세의 냉혹함을 가감 없이 보여준 회담이었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것을 '탈세계화'의 징후로 볼 수 있을까. 피터 자이한은 그동안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세계화의 국면에서 많은 나라가 큰 성장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지금 보는 대로 트럼프가 '자국 우선주의'를 강하게 밀고 나왔을 때 누구에게 유리할까. 이럴 때 제조업과 내수 시장 규모,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나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는 데, 그게 바로 미국이라는 것이다.
세계가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은 세계화의 성립 근거였다. 석유가 나지 않는 한국은 자동차와 반도체를 팔아서 석유를 사 온다. 산유국은 석유를 팔아 선진국의 물품을 수입한다. 농업 기반의 국가는 농작물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한다. 자급자족할 필요 없이 나에게 남는 것을 넘기고, 모자란 것을 수입하면 서로 이득이다. WTO, FTA가 그 역할을 맡았고, 세계화는 이 방식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의존적 연결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해상에서 출몰하여 컨테이너 선을 공격하는 해적 떼를 제압할 해군력, 국가 간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은 그동안 지구촌의 거의 모든 사태에 개입하여 이를 조정해 왔다는 것이다. 그 틈에 유럽도, 일본도, 한국도, 중국도 급속하게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 자이한의 생각이다.
이제 본전 생각이 난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표방하고 강하게 다른 나라를 압박한다. 예를 들면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에는 더 큰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고 미국에 수출해서 재미를 보는 나라에는 관세를 물린다. 관세를 물기 싫으면 미국 본토 안에 반도체 공장, 자동차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한다. 여기에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취업을 한다. 트럼프는 노골적으로 탈세계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젤렌스키 앞에서 자기는 우크라이나 편도 아니고 러시아 편도 아니라고 하면서 오로지 전쟁 종식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거의 젤렌스키를 자국민을 전선으로 내모는 전쟁광으로 압박할 태세다. 그가 말하는 전쟁 종식은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 등 러시아가 침공한 지역의 영토를 우크라이나가 상당 부분 양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지원한 전쟁 비용을 회수하려 시도한다. 과연 트럼프다운 발상이다.
유럽은 일단 젤렌스키의 입장을 옹호했지만, 두고 볼 일이다. 현실적인 힘은 미국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당장 젤렌스키는 다시 미국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이 회담을 보면서 줄곳 한국 생각을 했다. 트럼프는 여차하면 한국을 젖혀두고 북한과 회담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한국이 끼어 달라고 하면 비용을 청구하겠구나. 트럼프가 원하는 평화는 무료가 아니다.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는 것이 트럼프 방식의 평화다. 이미 방위비 분담금 확대, 관세 인상, 반도체/자동차 공장 유치 등의 공세는 시작됐다.
며칠 전 인천 세계시민교육 선도학교 선생님들 대상으로 강의 준비를 하면서 빠진 딜레마였다. 세계시민교육은 기후위기 등 가치 지향의 글로벌 이슈 해결에 비중을 두면서 세계가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돼 있고, 그 연결망 안에 들어가 국가적 협력, 개인은 세계시민으로서 역할을 다 하자는 것인데, 만약 그 연결망 자체의 의미가 없어진다면? 그리고 당장 보는 대로 탈세계화를 꿈꾸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이 질서를 무시한다면?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이념이고, 정치적 올바름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경제 전쟁을 선포한다면 과연 어떤 태도가 세계시민성의 소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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