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돌연 스타트업으로 이직한다고 했을 때,
회사 대표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스타트업 멋에 취해서 갔다가, 결국 다 돌아오더구먼. 언제든지 와."
칭찬인지, 욕인지. 응원인지, 위로인지 알 수 없는 그 말에 나는 그저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 좋은 것만 듣자.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도 될 만큼 내가 괜찮은 인재라는 거잖아.
그렇게 처음 스타트업에 발을 디딘 이후 지난 6년 간 정말 다사다난했다.
스타트업이 한참 인기가 많았던 시절부터, 지금의 보릿고개까지.
하루가 다르게 시장은 변했고, 그 변화가 때로는 무섭기까지 했다.
나 역시 지금 보릿고개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했던 건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스타트업의 임직원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는 것.
스타트업은 회사의 특성상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정말 많다.
심지어 마이스터고 졸업을 앞둔 10대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어린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동료로 곁에 있었지만
좋지 않은 의미로 회자되고 있는 'MZ 직원'을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오히려 경력직이랍시고 들어와서 물을 흐리는 시니어들이 훨씬 많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배울 점이 있구나. 좋든, 나쁘든.
어린 친구들로부터 '당당한 배움'과 '동료에 대한 신뢰를 대하는 자세'를 얻게 됐고,
시니어들을 보면서 '자신감'과 '자존감'의 적절한 활용법에 대해서 공부하게 됐다.
물론 처음엔 나도 경력을 무기 삼아 '이 정도 회사는 껌이지'라는
자만하고 오만한 마음으로 이직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입사 후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스란히 뒤집혔다.
막상 들어가서 보니 나의 첫 스타트업은 매일이 치열하고, 처절한 전쟁터 그 자체였다.
아마도 그 시절이 내가 일에 대한 철학과 접근 방법을 바꾸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온전히 나의 몫을 다하고, 내 몫 이상으로 회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알아주지 않아도 회사와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임팩트를 창출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
매번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에 급급했었는데
스타트업에 몸 담게 되면서 우주의 먼지보다 작은 존재인 '나'라는 사람의 역할에 따라
생각보다 많은 결과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껴보게 된 것 같다.
원체 에너지 넘치고 적극적인 편이었지만, 스타트업에 들어와 '능동적으로 일하는 방식'을 내재화하게 됐다.
지금도 나에게 '스타트업이 왜 좋아?'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스톡옵션으로 재미 좀 보려고?' 하며, 돈을 이유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슬프게도 난 단 한 번의 재미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다.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감도 없다.
다시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스타트업을 좋아하는 이유.
친정 같은 스타트업에서 느낀 첫 이미지가 좋아서, 기성 기업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
새로운 조직문화를 통한 동료들과의 화합,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달리는 열정.
스타트업에 대해 알려진 여러 풍문과 오해, 그리고 환상 같은 것들이 대답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만
사실 내가 스타트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스타트업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와 비슷하다.
'변수' 때문이다.
스타트업은 아침에 안정적인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날 저녁 분위기가 반전될 수 있다.
다만, 굳이 굳이 이 변수를 인한 반전의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그 순간 머리를 쥐어 짤 정도로 힘들지만, 해결 과정은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는 것이다.
스타트업은 중견기업 이상의 회사에서 갖추고 있을 시스템이나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직접 구축하고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비로소 하나의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시스템이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그대로 둘 수 없고,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게 몇 번의 '문제-해결-실행-검토'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그 회사에 딱 맞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된다.
비록 실패하게 될지라도, 언젠가는 실패의 경험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는 점에서
스타트업에서의 '변수'는 나, 그리고 동료, 회사 전체로 봤을 때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스타트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사실 나는 '변수 통제'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경험이 많든, 적든 머릿속으로 (과장해서) 100번 정도 시뮬레이션을 그린다.
개인적인 일은 변수가 발생해도 나 스스로 감당하면 되지만
일을 할 때는 아주 작은 일도 나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절대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나로 인해 피해를 주는 것은 더더욱 싫다.
그래서 스타트업에 다니면서 매번 발생하는 변수로 인해 더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일이 하기 싫다거나, 귀찮거나, 혹은 도망가고 싶은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요즘에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도 많이 줄어들었고, 투자 시장도 얼어붙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더 열정 넘치게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글을 하나씩 써볼 생각이다.
그러다, 진짜 좋은 인재들이, 그리고 좋은 투자자들이
많은 한국의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물론 좋은 얘기와 안 좋은 얘기가 공존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