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어느 날. 버려진 방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왔다'는 말은 많이 순화된 언어이고 필터를 뺀다면 '꼴 보기 싫어졌다'가 맞겠다. 용도를 찾지 못해 창고처럼 쓰이던 방. 밖에 내놓지 못한 자전거가 있었고, 속이 빈 리빙박스가 있었고, 용량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붉은색 가연성 쓰레기봉투가 있었고, 미처 빨래방에 가지 못한 계절이 지난 이불이 있었다. 집안에 온갖 문은 다 열어놓고 살면서도 이 방만큼은 늘 문을 닫고 싶었다. 무슨 이런 공간 낭비가 있을 수 있지!
그래서 치우기로 했다. 정확히는 공간의 용도를 찾아주기로 했다. 바로 내 방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집에서도, 예전 집에서도 늘 남편 방은 있었다. 데스크탑과 책상을 넣어둔 방이 남편 방이 되었고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정작 내 방은? 난 그저 식탁이나 주방, 혹은 '남편 방'에서 내 바느질을 하고, 내 일기를 쓰고, 내 글을 써왔다. 왜지?
방을 정리하고 넓은 책상을 들였다. 식탁 한편에서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리를 찾지 못했던 노트북에 제자리를 찾아주고, 이른 새벽 마음의 온기를 더해줄 작은 작업등을 두었고, 방은 열려있지만 안전 문을 설치해 똥강아지들의 출입을 막았다. 아침이면 일어나 차 한잔을 들고 들어와 짧은 명상을 하고,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한 후 노트북을 켜거나 책을 읽는다. 내 방에서.
마치 개업 사무실에 화분을 보내듯 남편은 집에서 가장 오래된 행운목 화분을 내 방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부터 내 방을 작업실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누라 작업실', '네 작업실', '네 방',... 그렇게 불릴 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걸 그는 알까. 마치 어릴 적 처음 내 공간이 생겼을 때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설레는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문을 닫고 싶었던 이곳이 이제는 가장 아끼는 공간이 되었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 난 무얼 만들어 나가게 될까.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차곡차곡 오늘을 쌓아 나가야겠다. 그러다 보면 지금보다 아름다운 언젠가의 오늘은 만들어내고 있겠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고, 이렇게 브런치에 내 글을 적고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난 어떤 글을 쓰게 될까.
집에 내 방을 만들고 설레었던 그때처럼. 내 방, 내 작업실, 내 공간이 된 이곳에서 난 다시 또 설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