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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께밭 Nov 06. 2020

무진이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나의 고향 순천에는 바다도 강도 아닌 드넓은 뻘이 존재한다. 바다가 보이냐고 물으면 쾌히 대답하기 어려울 정도로, '몇 백 리나 되는 뻘밭을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 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다. 갈대가 수북한 그곳은 새벽 여명이 떠오르면 소금기 어린 해풍이 몰고 온 안개로 자욱해진다. 바로 <무진기행>의 실제 배경인 순천만이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을 할 때면 순천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 작가의 고향이라고, 무진이 바로 순천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만큼 이 작품은 순천 사람인 내게 자랑 같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수능 준비생에겐 필수적으로 접해야 했던 수능 빈출 작품이었다.

  ‘1960년대 현대인이 느끼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허무 의식, 자아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현대인의 자기반성' 따위의 표현으로 숱하게 접했던 현대 소설이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니, 여로형 구조니, 시대적 배경과 주제 따위를 열심히 암기하던 시절에 처음으로 만난 작품이다. 당시의 나는 18살의 순천 여고생이었으나 다시금 이 작품을 읽고 나니, 철저한 서울 사람이었더라. 무진이 가지는 그 어감을 알지 못했던 지독한 서울 사람이었던 것이다.


  주인공인 윤희중은 무진에서 자랐고,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다. 재학 중 6.25 사변이 발발하여 무진으로 귀향하고, 29살에 다니던 제약회사가 합병되어 실직하면서 또 한 번 무진으로 귀향한다. 이처럼 주인공은 시련과 실패를 맞닥뜨렸을 때마다 항상 무진을 찾았다. 때문에 제약회사 전무가 되기 전 휴식을 위해 무진을 찾은 것 또한 주인공의 부정적 상황인 셈이다.  작중의 조 씨의 말을 빌리자면,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 얻은 허울 좋은 성공일 뿐이지, 스스로가 성취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주인공은 무진에 오기만 하면 엉뚱한 생각들을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한다고 표현한다.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감 없는 사유와 상념이 오롯이 ‘나다워짐’이라고 느꼈다. 이것이 무진이고, 무진이 가진 힘이라 느껴졌다.

  그 힘은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데, 오롯이 저다워진 주인공은 무진에서 처음 만난 하인숙과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그녀와 밤을 보내기도 하며, 방죽에서 자살한 여자에게서 정욕을 느끼기도 한다. 현실에선 불륜이나 성 도착증이라 비난받아 마땅한 짓을 부끄럼도 없이, 거침없이 행한다. 무진이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것이고, 무진의 힘이 그를 그렇게 저다워지게 한 것일 테다.

  주인공은 하인숙에게 편지를 적을 때 이렇게 적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옛날 본인의 모습, 즉 무진에서 자란 제 모습을 보았고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그는 무진을 사랑했던 것이다. 서울에 가고 싶다면서,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무진을 사랑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무진을 사랑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항상 자신다워질 수 있었던 것일 테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온 전보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현실에 고개 저으며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긍정하기로 하자며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지만, 결국 찢어버리곤 그렇게 무진을 떠난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선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멍해졌다. 이 감정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좋을까, 내가 느끼는 이 상념들을 무엇이라 정리해야 옳을까,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잠언은 없을까 고민했으나 떠오르질 않았다. 누군가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겠지란 생각에 인터넷에 무진기행을 검색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감상을 적어놓았으나, 나의 이 안개 같은 감정을 비 내리게 하는 문장은 없었다. 그리곤 퍼뜩 이런 나 자신이 심하게 부끄러워졌다.

  이 작품의 서울은 1960년대의 배금주의가 팽배한 현실을 반영한다곤 하나, 서울이 현실이고 무진이 이상이라는 것에 끄덕일 수 없었다. 오히려 내게 읽힌 서울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가 강요하는 '선입관'으로 점철된 틀에 박힌 곳으로, 나다울 수 없는 공간이었다. 주인공이 아내의 권력으로 전무가 되는 공간, 누군가의 남편이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는 공간, 엉뚱하고 생각과 공상들이 쉬이 떠오르지 못하는 공간, 나다운 것이 부끄럽게 느껴져 나다울 수가 없는 그런 공간. 그렇기에 내가 느낀 나다운 감정에 집중하지 못하고, 누군가 정해놓은 혹은 이미 정해진 정답을 찾아 헤매는 스스로가 지독히도 서울 사람처럼 느껴져 부끄러움이 일었다.

  29살 주인공이 무진에 내려와 방을 구해 지내던 시절,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쓸쓸하다>란 단어를 썼다고 했다. 그 무렵의 그에게는 그 말밖에 써야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고 했는데 그 표현은 ‘아침의 백사장을 거니는 산보에서 느끼는 시간의 지루함과 낮잠에서 깨어나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느끼는 허전함과 깊은 밤에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쿵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밤바다의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의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나의 생활’을 대신한 것이다. 편지를 받는 상대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심지어 도시에 있는 스스로 조차도 공명할 수 없는 말이다. 오히려 <쓸쓸하다>란 허깨비 같은 단어는 서울인 셈이다. 주인공이 느꼈던 지루함, 허전함, 애처로움, 안타까움, 그런 감정들이 얼키설키 뭉쳐 스스로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감정은 결국 무진이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안개와도 같은 감정을 무진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까.  내가 편지를 쓴다면 <쓸쓸하다>가 아닌 <무진이다>라고 적었을 테다.

 책을 읽고 일렁인  감정 또한 결국 무진이었다. 지금의 나는  말밖에 써야  말이 없다. 바다 같지만 바다는 아닌 순천만처럼, 바람 같지도 구름 같지도 않은 안개처럼, 나를 상실한 공간이나 사실은 오롯이 나다워질  있는 공간인  무진처럼,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지만 정리하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이 이렇다. 무진, 그곳은 한없이 나다워질  있는,  어린 시절이 담긴,  꿈과 욕망이 포장되지 않는, 순수한 나의 고향이다. 이곳이 나의 현실이라 믿고 싶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와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 아래에서 시린 밤공기를 머금고 안개는 피어오른다. 누군가 잠들지 못하는 밤, 누군가 끊임없이 울어대는 밤, 별과 별 사이가 아득히 먼 밤, 불면 슬픔 고독이 안개를 만든다. 이것이 괴로워지지 않을 때, 비로소 나다워지는 무진에 도달하리라. 나다운 것이 부끄럽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온 세상이 희뿌옇게 무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무진이었다.'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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