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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께밭 Jul 13. 2020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나를 위한 독후감

올해 5월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고, 찬찬히 아껴읽는단 핑계로 게으름을 부리다 7월에야 완독 했다. 

하도 평소에 유튜브를 달고 살았더니, 영상 매체에 익숙해져 독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보기'와 다르게 '읽기'는 나의 의지와 집중력이 필요한 행위라, 자꾸만 '보기'처럼 책을 쳐다보기 일쑤였다. 

정신 차리고 읽으려고 애썼다. 문제다 참. 


주위에 책을 좋아하는 친구 둘이 극찬을 아끼지 않길래, 호기심과 더불어 둘에 대한 믿음으로 책을 구매했다. 

결론적으론 그 믿음이 맞았고. 


첫 머리말과 1부 <슬픔에 대한 공부>를 여는 첫 글부터 좋았다. 첫인상이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당신의 지겨운 슬픔>이란 글에 모두 적어놓은 듯하다.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남는 건 이 글이었고, 이 글로 요약될 수 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책은 크게 5부로 슬픔, 소설, 사회, 시,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소설과 시 파트는 내가 읽어보질 못한 작품이 대다수여서 어렵게 읽혔다. 오히려 읽히지 않았단 표현이 맞겠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을 미리 읽은 상태였다면 흥미롭게 읽혔겠단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1부, 3부, 5부가 즐겁게 읽혔다. 

독서가 즐거웠다는 것은 작가의 문장이 나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는 것, 내게 배움을 주었다는 것, 크게 공감이 되었다는 것, 문장이 아름다웠단 의미다. 


귀한 문장들이 많아서 밑줄이 난무하다. 다 옮겨 적어 볼까 했으나, 분량이 많아 포기했다. 

내게 배움을 주었던 문장들만 옮겨 적어 볼까 한다. 이 배움으로 내가 변화할 것을 기대하면서..



1.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p.93)

실수도 폭력이 될 수 있다. (p.95) 

- 실수도 섬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또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실수였다란 말이 변명이 되어선 안될 이유다. 



2. <액자 속 진정성_동주> 

우리는 진정성의 화신인 윤동주의 삶에 감동받으며 우리가 망실해버린 고귀한 가치를 비로소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럴 수 있으려면 이 영화의 물음이 우리 시대의 것이자 또 나의 것으로 육박 해와야 할 것이고, 또 그럴 때 느껴지는 것은 감동만이 아니라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우리에게서 너무 멀다. 그 시대는 공간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역사적 유적지다. 

- 작가가 자문하는 질문의 답은 '아니다'다.  우리는 윤동주의 '진정성'을 기념품을 사듯, 이를 유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 또한 윤동주의 시를 탐하고 필사하며 감동과 감탄에 젖었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시를 읽으면서 고통을 느껴보진 못했다. 필히 나는 그의 진정성에 감동만 했을 뿐, 그 진정성의 가치를 비로소 다시 생각하며 괴로워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없이 괴로워했는데, 괴로워한 그를 보며 감탄하며 유적지처럼 사진을 찍고, 기념품처럼 고이 모셔두었다. 그리곤 뿌듯해했다. 그는 괴로워했는데, 나는 감탄하고 뿌듯해했다. 



3.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 바로 그 믿음에 갇힌다. (p.125)


4.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버리는 것이다. 


5. <아포리즘에 대하여>

그가 무의미한 세계의 무미함을 빈손으로 견뎌내고 있다는 증거다. 

- 나는 참 아포리즘, 잠언을 좋아한다. 내 일생의 깨달음 따위를 잠언으로 적어내는 걸 좋아했다. 스스로가 무슨 위인이 되는 듯했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단 한 문장으로 꿰뚫는 문장에 통쾌함과 짜릿함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런 아포리즘은 지극히 부분적인 진리를 담고 있고, 단지 재치 있기 때문에 진리처럼 보이는 것이란 오스카 와일드의 주장에도 고개가 끄덕인다. 

사실 이 세계는 무의미하고 무미한데, 자꾸 의미를 만들어내려고 애쓰진 않았을까. 

분명 나는 계속해서 애쓰겠지만, 그렇다고 빈손에 슬퍼하진 않아야겠고, 무거운 손에 자만하지도 않아야겠다. 



6.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 한동안 소설은 왜 읽는지에 대한 회의가 꽤나 심했다. 어차피 결국 허구란 사실이 허무하게 느껴져 그랬다. 그래서 허구가 아닌 실제를 그린 산문, 에세이만 읽으려 했다. 그러다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듣고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한 배움을 얻었고, 그 배움에 꽤나 설득당해 그 이후론 소설도 거부감 없이 읽게 되었다. 저자가 쓴 위의 글에서도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꽤나 설득이 되었다. 결국 '파악'하기 위함, 인생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함, 결국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함. 



7. 정치의 도덕적 차원

문재인 대통령이 518 유공자의 자녀인 김소형 씨의 편지 낭독이 끝나고 그를 돌려세워 안아준 모습은 단지 감동적인 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의 정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사망자 000명'이라는 통계 자료의 추상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 고통을 개별화해내서 그 개별적 고통들에 성실히 응답하는 정치, 그것이 현실의 모든 고통들에 대해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치의 목표로 설정될 수는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중략)

냉철한 정치적 현실주의 '너머'에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적 윤리가 사인적 윤리와 합치되는 경지가 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염원을 우리가 일부러 멈춰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정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라는 점을 잊을 때, 우리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이 가장 먼저 고통받는다. 정치가 영혼을 구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비통한 자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일이어야 한다.

- 나는 이성적이기보단 다분히 감성적인 인간이라, '사망자 000명'의 통계에서 보이는 그 숫자의 냉소와 잔인함이 슬프다. 그 숫자에서 그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자, 그 감정이 최소한의 정치의 목표로 설정될 수 있게 하는 자가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현실적이지 않단 이유로 이상을 꿈꾸는 것을 멈춰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란 말에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나 또한 언제고 고통받을 수 있고,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놓아야, 내가 약자가 되었을 때 고통받지 않을 테니, 이미 약자가 되어버렸을 땐 사회를 바꿀 힘이 미약할 테니. 



8.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진부해지기는커녕 날마다 새롭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도 고통이 더 많은 쪽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할 수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을 존경한다. 성품이냐 능력이냐 라는 물음은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성품이 곧 능력이다. 




9. 억울한 사람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진실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밝힐 수 있는 기회(자리) 일 것이다. 그런 기회를 스스로 마다한다면 '억울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 저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 및 태극기 부대에 대해 위와 같이 썼다. 그런데 이 글을 적는 지금 나는 고인이 된 박원순 서울 시장이 떠오른다. 같은 글의 다음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 대상이 누구 건 어떤 이들을 간편하게 '규정'하고 '배제'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다. 

-  고인의 자살을 무엇이라 규정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겠으나, 그의 죽음은 억울함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리라 짐작할 뿐이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물음에 대한 답을 해줄 이가 없다. 모두가 비통한 지금이다. 


10.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 나는 연예인이나 저명한 사회적 공인들은 일반인에 비해 큰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니, 응당 감수해야 할 고통이 있다 생각했다. 궤변이다. 



11. 잠을 잘 수 있고 또 자는 사람만이 깨어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역설이 성립한다. '항상 깨어있으면 진정으로 깨어날 수 없다.' 수면은 각성의 근거다. 자야만 깨어날 수 있다. 


12.  우리말의 '같이'는 영어의 'like'와 'with'의 뜻을 함께 갖는다. 뭐든 당신과 '같이'하면 결국엔 당신'같이' 된다는 뜻일까. 늘 시와 같이 살면 시와 같은 삶이 될까, 안 될까. 우리는 영원히 시를 포기하지 말기 

- 나는 우리말의 이런 동음이의어가 참 좋다. 같이, 바람, 이랑... 이런 단어들을 계속 발견 해나가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13.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채우는 '요소'가 아니라 나를 세우는 '구조'(여야 한)다. 나는 당신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서 온전해진다. 결여는 여전히 있되 그 결여가 더는 고통이 되지 않는, 온전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 

- 사랑하는 사람으로 내가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해진다는 것. 완전함과 온전함의 구별. 

결여가 없는 완전함과 달리, 결여를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곧 '온전'해지는 것. 연약함이 곧 위대함이고,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 


14.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글에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 척해서는 안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15.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멘토르'가 되어야 한다. 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p.378)

- 꼰대가 아닌, 멘토가 되기 위해선 상대를 잘 알고, 상대의 편이 되어주어 신뢰의 관계를 쌓는 것이 필요하겠다. 



16. 생명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을 다치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도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와 남의 다친 영혼을 달래는 길뿐이다. 



17.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다그치기. 

- 이 행위의 원동력은 분명 슬픔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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