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정훈 Sep 18. 2021

무언가를 배우는 마음

    

  로망은 결핍의 다른 말이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건 그만큼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학창 시절 내 로망은 악기였다. 노래 듣는 걸 좋아하지만, 음치, 박치에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나와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 시간에 피아노로 멋진 반주를 할 줄 아는 친구들을 동경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악기를, 그중에서도 기타를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결심은 ‘나 같은 게 무슨 악기야’, ‘여유가 생기면 그때 배우자’ 같은 핑계와 게으름의 골짜기를 지나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실행으로 옮겨졌다. 기타를 처음 배우면서 가장 빈번하게 느낀 감정은 짜증과 분노였다. ‘뭐지, 이 음악 같지 않은 둔탁한 소음은?’, ‘아이씨,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내 로망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까지 부르는 장범준, 로이킴의 모습이었지만 현실은 쉬운 코드도 잡지 못해 한참을 허우적거리는 지진아였다. 로망과 현실의 거대한 간극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에 자주 휩쓸렸고 10분 연습하면 20분쯤 한숨 쉬는 연습을 반복하며 실력은 더디 늘었다. 


  그래도 기타를 어지간히 치고 싶긴 했었나 보다. 속상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을 품으면서도 몇 년 동안 기타를 놓지는 않았으니. 지금은 어렵지 않은 코드로 된 곡 정도는 제법 그럴듯하게 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는데, 성인이 된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학습’이란 걸 하며 배운 게 있다. 무언가를 배울 때는 마음을 비우고 해야 한다는 것. 욕심내고 조급해하지 말고 꾸준히 시간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임할 때 포기가 덜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요즘은 만화 그리기를 배우고 있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며 도대체 뭘 그린 거니, 라고 반문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림에 타고난 재주나 깜냥은 전혀 없는 게 확실하다. 그런 내가 웹툰이나 인스타툰을 보며 글과 그림이 어우러질 때 전달력도 그만큼 강해진다는 걸 경험하면서 그림에 호기심이 일어 온라인 강좌를 신청했다. 이제 배운 지 한 달쯤 되었는데 기타를 배울 때처럼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열심히 따라 그렸음에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그림들, 균형이 맞지 않고 방향이 틀어진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짜증스럽다. 하지만 이번 배움의 과정에서 집중하는 건 퀄리티가 아니라 시간과 횟수다. 하루에 30분씩, 일주일에 서너 번 수업을 듣는다는 정량적 목표치에만 집중하며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고 삐뚤빼둘하고 해괴망측한 모습이지만, 배우는 건 시간이 쌓일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면서 학습 중이다.  


  30분 동안 A4 용지 1~2페이지에 걸쳐 그린 그림을 파일철에 모아 두고 있는데 지난 흔적을 훑어보니 다행히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균형미라고는 눈뜨고 찾아볼 수 없던 눈코입의 배치가 약간은 자연스러워졌고, 도저히 그릴 자신이 없어서 길쭉한 동그라미로만 그려둔 손도 이제는 조금씩 손의 모습을 갖춰간다. 물론 외계인의 손처럼 손가락이 너무 길쭉할 때도 있고 장난감 조립을 잘못한 것처럼 너무 크고 통통한 크기로 그려질 때가 많긴 하지만... 신발을 그리는 것도 익숙지 않아 이집트 벽화처럼 평면적인 형태로 그렸었는데, 이제는 제법 3차원 이미지다운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한때 SNS에 돌아다니던 김연아 선수의 짤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기자가 스트레칭을 하는 김연아 선수에게 묻는다. 스트레칭할 때 무슨 생각을 하나요? 그녀가 답한다.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나는 이게 무언가를 배우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내가 꿈꾸는 이상의 모습을 잠시 접어두고  매일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익히는 것. 생각을 많이 하기보다는 몸을 움직이며 할당된 몫을 실천하는 데 힘쓰는 것. 그런 자세로 배운다면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속상해하다 포기하는 일도 분명 줄어들 것이다. 배움이란 시간과의 싸움이라 결국 견디는 자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만화 수업에 임하고 있고 이제 삼 분의 일 정도 수강한 온라인 강좌의 수강률이 100% 되는 날에는 내 그림도 제법 봐줄 만한 수준에 이르기를 고대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