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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ekly hoonyeon Apr 09. 2023

공간을 작동시키는 힘.. 취향의 정원 #6

은이성지_십자가의 길


보이지 않는 가치


손 안에서 손가락만 몇 번 까딱하면 수많은 이미지와 영상자료를 순식간에 소비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시대에 살고 있어서일까…? 우리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형型을 다루는 일에만 집착할 때가 많다. 네모의 화면에서 송출하는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모든 가치를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지어버리려 한다. 그리곤 무언가의 가치를 찾고 판단하기 위해 잠자코.. 골똘히.. 한참을.. 생각하는 것을 보며 우유부단한 ‘결정장애’라고 여기기 일쑤다.  


최근 외부공간 디자인에서도 값비싼 재료와 시설물, 화려한 디자인 요소를 앞세워 짧은 시간 소비자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능과 장식에 치중한 자극적인 디자인들이 민간시장을 중심으로 난립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겉치레를 추구하는 디자인 기조가 꼭 잘못될 것은 없다. 오히려 오랫동안 정체된 조경 시장의 확장과 발전에 어느 정도 일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다수의 고급 호텔/ 리조트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한참 동안 그런 시장에 일조를 했으니깐..


단지.. 공간을 설계하기 앞서 눈에 보이는 겉치레만을 추구하기보단 설계 의도에 담긴 ‘보이지 않는 가치‘ 도 함께 담아두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라 여길 뿐이다.


숨겨진 마을..
은이성지


은이성지는 우리나라 최소의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가 1836년 프랑스인 Pierre-Philibert Maubant 신부에게 세례성사와 영성체를 받은 곳으로,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첫 번째로 사제성소가 이뤄진 장소이다. 또한 ‘은이隱里’의 뜻은 ‘숨겨진 동네’, ‘숨겨진 마을’을 의미하는데, 조선후기 조정의 종교 박해를 피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은신처로 당시 지역 신앙 공동체로 사용되던 뜻깊은 천주교의 성지이다.  


성가가 울려퍼지는 은이성지

도착하기 전 인터넷 사진으로 대강 성의 없게 훑어보았던 터라 기억 속 별 특별하지 않은 공간 요소에 큰 기대 없이 방문했건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은이 성지 온통.. 하필 찾아온 흐릿한 비안개 탓에 더욱 은은하지만 명료하게 울러 퍼지는 성가 소리에 압도되어 스스로 내 옷무새를 다시 한번 여미어 본다.   


십자가의 길


은이성지 바로 인접한 산을 향해 ‘십자가의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조금 전 압도당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름처럼 조금은 고루하고 뻔한 테마길을 예상하며 잠깐 초입만 둘러보고 돌아서기로 다짐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가는 길을 따라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성가 소리는 당최 줄어들지 않고 줄곧 나를 따라다닌다.   


궁금증


십자가의 길 초입은 가파른 산을 오르는 산길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용자를 위해 뭐 하나 제대로 조성된 포장이나 편의 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덥수룩하게 자란 잡초와 어지럽게 널려진 거친 돌들.. 때마침 내린 비로 축축하게 젖은 땅이 더 이상 한 발자국 떼놓기 싫은 모습이다. 다행인지 돌아갈 마음이 들 즈음.. 마방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소년 김대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형물과 함께 소박하게 자리한 기도문을 조우하며 알게 모를 궁금증에 저 숲너머 있는 다음 장면으로 한번 더 힘을 내어 이동해 본다.


sequence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로마군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부활하여 승천하는 크리스트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14처의 시퀀스로 산의 거칠고 가파른 길을 따라 구성하는 전형적인 스토리텔링기법을 보여준다.


동기와 몰입


각 시퀀스에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목각 장식이 달려있는 십자가와 함께 기도문이 설치되어 있다. 처음에서 마지막 시퀀스까지 이용자는 마치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랐던 그 골고다 언덕을 직접 오르는 것처럼 가파르고 거친 언덕길을 오르게 된다. 한걸음 한걸음 땀이 나고 숨이 차는 몸의 반응에 이용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상황을 떠올리며 더욱 몰입하게 된다. 산 중턱까지 올라왔건만 여전히 귓전을 맴돌며 도착해서부터 줄곧 듣고 있는 성가가 점점 더 이용자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디자이너의 무심함


십자가의 길에는 이용자의 이목을 끌만한 값비싼 재료나 화려하게 치장된 장식적인 디자인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너무하다 싶을 만큼 디자이너의 무심함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이용자는 한눈팔 새 없이 공간을 이끄는 강력한 스토리텔링에 더욱 빠져들게 되는 게 아닐까..? 별다른 인공적인 식재나 가미된 조경요소는 없이 디자이너는 최소한의 간섭을 하며 순수한 자연공간과 최소한의 설치물을 이용한 공간 콘텐츠만 제공한다.


catharsis


휴우..

끝내 도착한 하늘을 향해 두 팔 들며 승천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에 서서 드디어 이용자는 그간 불편함에 사로잡혔던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며 묘한 카타르시스와 함께 크나큰 해방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조경가의 성찰


큰 기대 없이 찾아온 은이성지 ‘십자가의 길’은 남의 작품에 인색하고 까다로운 이 기성 조경가에게 돌아오는 길 한참의 여운이 남을 정도로 오랜만에 큰 감동을 선사한 공간이었다. 상대적이겠지만 세상에 돈 많이 들여서 남의 눈에 띄는 공간 하나 디자인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공간을 통해 공감을 얻고 감동을 주는 일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하물며  별반 대단한 장식이나 기교 없이 순전히 공간을 이끄는 콘텐츠만으로 이용자에게 깊이 남을 여운과 감동을 주었다는 건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콘텐츠의 구성과 전개는 물론 장소의 시퀀스와 스케일, 점경물 등 꼭 필요한 만큼의 공간 연출에 이질적이지 않을 만큼 은은하지만 명료하게 울려 퍼지는 soundscape가 한몫을 톡톡히 해낸다. 오래간만에.. 내가 디자이너로서 살면서 그간 주제넘게 교만하고 게을렀던 내 자신을 반성하며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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