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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Feb 11. 2019

갑자기 분위기 1994년, 그 옛날의 통장 이야기

2019년의 해가 다섯번 뜨고 지고 다섯번째 달이 하늘에 오른 밤. 잠자리에 누워 까만 천정을 바라보는데 문득 적금 생각이 났다. 돈이란 것은 버는데에도 모으는데에도 소질이 없고 심지어 조금 무서워하기 까지 하는 내게 은행이니 금융상품이니 하는 영역은 참 낯설다. 하지만 새해 맞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있는 까닭에 전에 없던 의욕이 생겨 굳이 어둠을 더듬어 폰을 찾았다.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 사이트에 들어가 예/적금을 검색했다. 1년동안 목돈을 은행에 예치하는 예금상품은 보통 이자율이 2% 전후. 매 달 일정금액을 부어 목돈을 만들어 나가는 적금은 이율이 그보다 좀 더 높다. 그런데 이율이 눈에 띠게 높은 상품이 있었다. 우리은행 가입일에 따라 금리를 높여주는 상품이란다. 가입 5년 이내면 0.1% 추가, 15년 이상이면 0.4%를 높여주는 방식이다. 내 이자는 어디에 해당되려나 궁금한 마음에 가입일을 조회해 보았다. 

화면에 나타난 날짜. 1994년 2월 25일. 

거래기간 무려 25년.


1994년 2월 25일. 추억의 숫자 조합을 보자마자 경이롭게도 그 날이 떠올랐다. 내가 일곱살이었고, 생일 이틀 전 날이었고,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나흘 전이었던 그 날. (아닌 밤 중에 25년전 기억이라니!) 당시 구정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수중에 세뱃돈으로 받은 십 만원 있었다. 일곱 살 어린이에겐 몹시 큰 돈이었다. 국민학교 입학한다고 친척들이 손에 쥐어준 격려금. 엄마는 고맙게도 그 돈을 1원도 회수하지 않고, 대신 내 손을 잡고 은행으로 향했다. “혜인이도 이제 국민학생이 되니까 자기 통장을 관리할 줄 알아야지.” 엄마가 교양있는 말투로, 정말 이렇게 말했다.


사당2동 재래시장의 입구에 자리 잡은 상업은행. 내 소유 최초의 통장을 개설한 뜻깊은 곳. 나의 첫 은행. 나는 그 날 이후로 돈만 생기면 은행으로 달려갔다. 나이가 너무 어려 ATM 사용이 무리이기도 했지만 은행에 방문해 돈을 넣고 통장에 새로 적힌 숫자를 손으로 만져보는 걸 뿌듯해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생 꼬마에게 은행 방문은 일종의 놀이였던 셈이다. 실전 은행놀이. 빳빳한 돈과 통장과 도장을 책가방 주머니에 고이 넣고 쭐래쭐래 혼자서 은행에 들어서면 유니폼을 입은 은행원 언니들이 반갑게 맞아주며 정답게 말을 걸어주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그 말 중에 분명, 혼자 저금을 하러 오다니 너 참 똘똘하다,는 칭찬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저금한 돈으로 나중에 뭐할거냐는 질문도 했던 것 같다. 몰라욯헿헿헿. 그 때만 해도 소심 대마왕 외동딸이었던지라 나는 은행원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래도 왠지 어깨엔 힘이 들어가고 가슴에 자신감이 차 올랐다. 그럴만도 하지. 직접 관리하는 자가 소유 통장까지 있는 대단한 어린이었으니까.


뻔질나게 은행에 드나들며 모은 돈을 처음 출금한 건 몇 년 후 늦둥이 동생이 태어났을 때다. 마을의 핫플레이스, 이수역 13번 출구에 있는 태평백화점에서 13만원 주고 삐까뻔적한 유모차를 샀다. 동생이 세 살 되던 해 여름 휴가철에는 자동차 핸들이 달린 거창한 튜브를 사주었다. 그건 3만 6천원. (왜 이런 디테일까지 기억나는거야?) 지금과는 다르게 그 때는 소비의 맛을 몰랐을 때라 동생 선물을 사는 것 외에는 딱히 돈 쓸 데도 없었다. 그렇게 모으고 모은 돈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120만원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 사이 1997년, IMF가 터졌고 이듬해 나의 상업은행은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되었다.


줄줄이 은행이 도산하던 시절이었다. IMF 얘기로 시국이 떠들썩한데 마침내 뉴스에서 나의 금쪽같은 상업은행을 호명하자 가슴이 벌떡벌떡 뛰었다. 경제개념은 잘 몰랐지만 내가 켜켜이 모은 돈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느낄만 한 나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내 코묻은 돈은 안전하게 지켜졌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찾은 ‘한빛은행’에서는 내 통장을 첫 번째 통장보다 갑절로 예쁜 ‘어린이’ 통장으로 바꿔주었다. IMF고 뭐고, 새로 얻은 통장이 예쁘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아 그 날 밤 내 방에 앉아 통장을 보고 또 봤다. 사실 이름도 그래. 상업은행보다야 한빛은행이 훨씬 예쁘잖아.


초등학교 졸업 축하를 겸했던 2000년의 설날.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을 이겨내서일까 그 해에 집안 어른들은 유독 인심이 좋았다. 덕분에 나는 삼십만원이라는 거금을 쥐게 되었다. 항상 그랫듯이 빳빳한 돈을 가슴에 품고 한빛은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게, 나의 어린시절 마지막 저금이자 한빛은행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전학을 갔고, 저금따위는 하지 않는 평범한 사춘기 청소년이 됐다. 은행에 저금할 돈은, 산업대학교 앞 곱창집 은혜분식에, 광식이 아줌마 떡볶이집에, 경양식집 그날이후에, CNN 카페에 착실히 가져다 바쳤다. 리바이스 엔진 데님도 사고, 아디다스 져지고 사고, 남자친구 선물로 G샥 시계까지 사야했기에, 은행에 갈 시간도 돈도 마음도 없었다. 

내가 방황하는 사이, 한빛은행도 적잖은 방황을 했다. 불법 대출이니 뭐니, 평화은행이 어쩌니 어렵고 혼탁한 말들이 쏟아지더니, 어느날 나의 한빛은행은 그 예쁜 이름과 귀여운 내 통장을 역사의 뒷켠에 묻어둔 채, 그 이름도 우리우리한 우리은행이 되었다.


삶에 대한 애정이 고만고만한 어른이 되어서일까. (술을 먹기 시작해서인가.) 2000년대 초반 이후로는 은행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과 시간의 반비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4년부터 모아두었던 피같은 백만 얼마의 목돈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어딘가 썼던 것 같긴한데 어디에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은행과의 인연은 계속 됐다. 고등학교 졸업 후 최저시급이 3100원이던 시절, 첫 알바비 17만원을 우리은행 통장으로 받았고, 중랑구 옥탑방에 살던 여고 학생의 과외비, 1호선 신이문 역에 있던 아인스학원 중등학원 알바 등 대학생 때 번 모든 돈이 우리은행을 통해 들고 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사회생활로써 서울 오산고등학교에서 기간제 영어 교사를 하며 벌었던 꿈 같은 200만원의 월급도 우리은행 통장으로 받았다. 남고의 20대 여선생으로 마음에 호되게 충격을 먹고서, 아직 가르칠 때가 아니라 배울 때라며 대학원생이 된 후에는 80만원 남짓한 대학원 조교 월급을, 무사히 석사를 마치고 뜬금없이 방송가에 들어갔을 때는 날마다 밤을 새고 피 땀을 갈아넣은 댓가로 받았던 월 120만원의 막내작가 월급 역시 우리은행 통장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첫 신용카드를 먼저 제안한 쪽도 우리은행이었다. 메인작가 방송 원고료, 첫 인세, 강사료.  돈과 인연이 없는 내 수준에는 나름 큰 돈이라 여겨지는 돈이 통장에 채워지던 때도 있었다. 물론 그 우리은행 통장에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럴수밖에. 1994년에 거래를 시작한 이후로 다른 은행에는 눈길 한 번을 준 적이 없었으니까. 내 은행의 시작과 끝은 우리은행 한 놈 뿐이었으니까. (아, 어, 조금 씁쓸한 기분은 왜지? 왜야?)


2019년 1월의 어느날 밤 중에 홍두깨처럼 내 마음에 몰려온 우리은행 생각. 상업은행이 한빛은행이 되고 한빛은행이 우리은행이 되고 그 뒤로 또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통장을 들고 콩콩콩 달려 은행문을 열던 똘똘한 어린이에서, 은행의 은 자 소리만 들어도 귀를 후비는 살짝 모자란 어른이 되었다. 

우리은행과 나는 생각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구나. 어쩌면 우리은행은 내 삶을, 우리 엄마나 종욱이보다도 빠삭하게 알고 있겠구나. 비록 단순한 숫자라 할지라도 1994년 2월 25일부터 나의 삶을 꾸준히 기록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생각보다 하나만 오래 바라보고 생각보다 미련한 면이 있는 사람이구나. 우리은행밖에 모르는 바보였다니.


글 쓰다 밤이 저물었다. 날이 밝으면, ‘나의’ 우리은행에서 새로운 적금을 들 것이다. 내게 25년의 기록을 선물해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강력한 경쟁자였던 카카오뱅크 적금은 후보에서 탈락시키겠다. 괜찮아 내겐 미련한 로열티의 댓가 +0.4%의 이자가 있으니까. 새로운 우리은행 적금과 함께, 1994년 상업은행으로 달려가던 어린 내가 가졌던 삶에 대한 열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 시니컬하게 벌고 쓸데없이 쓰는 지금의 나를 눌러두고, 황송하게 벌어 부지런히 저금하고 기꺼이 꺼내 쓰는 그 시절의 내게 한 수 배워보자.


#어머 나 좀 봐 은행에 대한 개인사로 금융현대사를 풀었네

#우리은행 사보 담당자님 여기요 여기


증거자료_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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