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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렉 걸린 귀국 첫날

13편

by 위선임


내리 2년을 여행하고 돌아온 삶은

짜릿하게 별로였다.


귀국 후 한동안의 일상은

대충 이런 식으로 렉이 걸렸는데...


1.

목욕이란 것을 했다.

샤워가 아닌 목욕.


돌아오게 되면 욕조에 2시간 불림 코스로 누워

2년간 묵힌 육신의 때를 미는 것이

귀국 후의 버킷리스트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우리 집 욕실에서

칼국숫집을 오픈했다...


2.

나만 씻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지난 세월 세계 길바닥에서 숙성된 배낭도

생애 첫 목욕을 시켜주기로 했다.


욕조에 더운물을 받고 세제를 풀고,

지쳐 보이는 배낭을 눕히는 순간-


욕조는 세계 각국의

땟국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인도 바라나시 가트에 앉아있는 듯한

꽤 서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욕실에 갠지즈강이 흘렀다.


3.

718일 만에 화장이란 것도 시도했다.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꽤나 험블해진 외관을 정비해야 했다.

남의 좋은 날에 똥 뿌릴 수는 없잖은가?


서랍에 잠들어있던 파우치를 열고

한참을 뒤적거리다 한숨과 함께 모조리 버렸다.


화장품의 유통기한은 대부분 개봉 후 1년.

2년을 나갔다 왔으니 전부 장례나 치러줘야 할 판이었다.


4.

귀국한 당시의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 있었지만

엄마에게 나는 다시 신생아가 되었다.


2년을(엄마 체감 20년)

세계 각국에서(엄마 체감 갱스터가 난무하는 오지에서)

여행하다가(엄마 체감 죽을 고비 오백만 번 갱신하며)

돌아온 딸년이니,


챙겨주고 싶은 마음 이해했지만,

그 정도의 합의는 쉽지 않았다.


내 체감으로 엄마는 한동안

내가 똥을 싸면 똥꼬도 닦아주실 것만 같았다...


5.

휴대폰이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쓰리 당했으므로.


전화기 없는 나뚜랄휴먼으로

여행은 괜찮았지만, 삶은 곤란했다.


다행히 짠내 풍기는 사정을 들은 지인이

서랍에 처박아둔 안 쓰는 공기계를 투척해 줘

고개 조아리며 받아왔다.


나도 이제 전화기 쓰는 현대인!!!! 흥분하다 멈칫-했다.

아, 맞다. 나 출국할 때 폰 해지하고 갔지.


새로 개통하려면 가만있어 보자...

통신사에 전화를 해야 되는데

폰이 지금 안되니 노트북으로..


아직 풀지 못한 배낭을 열어 랩탑을 꺼냈는데

전원을 켜자 모니터에 보라색 줄이 가득했다.


그래.. 너도 지난 2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굴러먹느라 고생 많았지..


이제 그만 영면에 들고 싶어 하는 지친 그를 달래

보라색 줄 사이로 애써 크롬을 띄웠다.

친구야, 조금만 더 힘내줘...


힘을 낼 게 노트북일지 나일지 헷갈리며

SK텔레콤 홈페이지를 띄우려다 멈칫- 했다.

아, 맞네. 집 인터넷도 정지해 놓고 갔었지....


텔레콤보다 브로드밴드가 먼저군.

정지를 풀려면 거기 전화를 해야... 멈칫-

아, 맞다. 나 지금 폰이 안되지...


집 전화도 없는데 망할..

어쩔 수 없군. 가서 해야지 뭐.


대리점을 찾아가자 직원은 신분증을 요구했다.

당연한 처사에 또 멈칫-


아, 맞다. 민증 든 지갑은

스페인에서 소매치기당했지.


쩔 수없이 중단하고 향한 곳은 주민센터.

분실신고 후 새로이 신분 획득!


다시 대리점 찾아가

다시 개통 시도-


매월 요금이 이체될 계좌를 알려달란다.

지난 세월 기억 속에서 휘발된 계좌번호를

애써 소환해 적었더니


계좌가 현재 정지 상태란다. 다시 멈칫-

아, 맞네. 해외 사용 계좌 빼고 다 정지했었지..

계좌 정지부터 풀어야겠네...


.....에라이!!!!!!!!!!!!!!!!


실감했다.

돌아왔구나.


그렇게 정지해놨던 한국에서의 삶을

우당탕탕 재건 후 기영기영 재생시키고 나니

영험한 질문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뭐 해 먹고 살지...?


+14편으로 이어집니다.


완벽보다 완성,

오늘은 여기까지-

위선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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