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원칙과 간단한 글쓰기 팁 몇 가지
이번 글은 제가 책을 번역하며, 더불어 다수의 책을 교정/교열하며 가꿔 온 저만의 글쓰기 원칙 혹은 노하우입니다. 원래 ‘번역의 역사’라는 더 큰 주제를 생각하다가 출판사와 상의할 부분이 있어서 그중 한 꼭지를 먼저 정리합니다.
저는 개발자 출신이며, 번역과 편집 분야도 역시 IT 전문서였습니다. 다음은 저의 대표작들입니다.
다행히도 제 손을 거친 책 중 글 품질에서 문제가 된 작품은 없습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문제가 다수 숨어 있겠지만, 대체로 좋은 평을 얻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나열하는 원칙들은 모두 IT 전문서에 국한합니다. 조금 넓혀 보면 ‘정보 전달과 학습이 목적인 글쓰기’입니다. 글이란 것은 말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하며, 목적이나 분야,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또한 저보다 번역 경험이 풍부한 분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제 원칙은 그저 ‘나는 이렇게 했다’일뿐,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절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글은 편집자를 거쳐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번역서라면 다음 그림처럼 두 단계를 더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편집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책이라는 상품 제작을 총 지휘하는 메인 PD 혹은 감독 역할을 합니다. 독자의 요구, 시장의 흐름, 경쟁 상품과의 차별성 등을 분석하여 포지션과 콘셉트를 정하고 그에 맞는 책이 나오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편집자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일을 1차적으로 원서 편집자가 수행하고, 번역서 편집자는 도착어 문화권에 맞게 보강/변형합니다(번역 전 원래의 언어를 ‘출발어’, 번역 후의 언어를 ‘도착어’라고 합니다).
저자는 편집자(출판사)에게 상품화를 의탁하고 거의 최종 단계까지 함께 합니다. 이때 둘의 호흡과 역량에 따라 기여 비중이 크게 달라집니다. 저자의 원고가 거의 그대로 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편집자가 상당히 뜯어고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많은 비중을 편집자가 다시 쓰거나 부족한 부분을 직접 써서 채우는 일도 가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호 신뢰가 두터워지기도 하고, 다시는 안 보는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
번역서에서는 역자가 가장 큰 변수입니다. 주제에 대한 전문 지식, 출발어, 도착어 모두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가 없다면 엉터리 원고가 만들어지기 쉽습니다. 혼자서 모두를 다 잘하는 사람은 드물겠죠?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매워 줄 수단이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선, 기계 번역의 비중이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일상 언어에서는 어지간한 인간 역자보다 나은 글솜씨를 뽐내기 시작했죠. 실제로 출발어를 모르는 역자(?)가 기계 번역만으로 책을 낸 사례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번역서 편집자는 개인 역량에 따라, 혹은 적절한 사람과 연결해 주는 방식으로 전 영역에서 깊이 있는 피드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번역 원고가 훌륭하면 나머지 일들은 한결 수월해집니다. 그래서 많은 편집자가 좋은 원고를 확보하는 데 공을 들입니다.
그 외 디자인, 제작/인쇄, 홍보, 유통 등의 과정을 더 거쳐 저자의 글이 번역서 독자에까지 전달됩니다.
독자는 저자의 날 원고가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된 최종 상품(책)을 받아봅니다. 이 과정에서 품질은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번역서는 다음 그림의 ‘이상적인 경로’와 ‘최악의 경로’ 사이의 어떤 길을 걸어 탄생합니다.
보다시피 단계를 거칠수록 품질이 높아지기도, 오히려 떨어지기도 합니다. 품질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가장 큰 위험요소는 역시 역자입니다. 좋지 못한 역자는 원서를 이해하지 못해 오역하거나, 분명 우리말인데 알아들을 수 없게 써놓거나, 나름의 철학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고집을 피우기도 합니다. 한편 조금 부족한 역자라도 ‘꽉 막힌 분만 아니면’ 집요한 편집자가 피, 땀, 눈물을 쏟아부어 기사회생시키는 사례도 종종 있습니다.
저는 역자일 때는 좋은 역자가 되고자, 편집자일 때는 집요한 편집자가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글은 제가 10여 년 간 두 역할을 모두 경험하며, ‘역자’가 좋은 품질의 원고를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원칙과 간단한 팁 몇 가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번역의 원칙을 세우려면 ‘역자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야 할 거 같습니다. 역자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니 주요 이해당사자들과의 상호작용을 생각해 보죠.
역자는 역할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음처럼 규정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기본 역할: 원서를 도착어로 바꿔주는 사람
확장된 역할: 저자와 번역서 독자의 중간자
확장된 역할의 역자는 저자의 지식과 메시지를 대신 전해주고, 독자의 추가 문의에 대응합니다. 저자 대신 번역서를 홍보하거나 독자에게 유익한 콘텐츠를 추가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해둘 점은, 기본 역할만 충실히 해줘도 100점짜리 역자라는 것입니다. 확장된 역할은 ‘+α’입니다. 해주면 정말 고마운 일이고, 안 해준다고 하여 불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는 105점짜리 역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선 100점짜리 역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5점을 더 얻기 위해 약간의 아이디어를 짜냅니다(물론 둘을 더해 90점을 얻기도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이제부터 본론인 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원칙을 이야기한 다음, 팁 몇 개를 곁들이겠습니다.
앞서 역자의 역할과 책임 범위를 이야기할 때 보여드린 그림을, 이번에는 번역서 독자 관점에서 다시 살펴봅시다.
번역서 독자가 책 내용에 대해 물어볼 상대는 역자뿐입니다. 출판사에 문의하면 단순 오탈자나 편집 오류 외에는 역자에게 전달합니다. 독자가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려면 먼저 원서를 구해 대조부터 한 다음 외국어로 질의해야 하겠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원서가 이러니까’라면서 뒤로 숨거나 ‘편집자가 잘 마무리하겠지’라며 남에게 미룰 수 없게 됩니다.
운이 좋으면 역자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해 주는 편집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IT 전문서 영역에서는 전문 지식을 갖추지 못한 편집자도 많습니다. 혹은 검증된 역자라고 생각해서, 타임투마켓을 위해, 기타 다른 내부 사정으로 원고를 진득하게 검토하지 않고 출간하기도 합니다. 저도 이런 일을 한 번 겪었습니다. 다행히 큰 문제는 터지지 않았지만 정말 살 떨리는 출간 경험이었습니다.
이 경험 때문에 저는 더욱 ‘독자에게는 나뿐이다’라는 생각으로 임해야 안심하고 원고를 넘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원칙에서부터 몇 가지 딸림 원칙이 파생됩니다.
역자가 독자 문의에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출간 직후에는 그나마 부담이 적지만, 몇 개월 후, 때로는 몇 년 후에도 문의가 들어옵니다. 이 즈음이면 질문 내용부터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출간 후 문의가 들어오지 않도록 여러 방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데 힘씁니다. 특히 이해하기 쉽도록, 잘못 해석할 여지나 비약이 없도록 신경 씁니다.
책 주제에 대해 역자가 저자만큼 깊이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책에 담겨 있는 만큼에 국한해서는 ‘100% 이해한다’라는 생각으로 번역에 임합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쉽게 설명하기 어렵고, 그러면 독자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원인이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해석 오류(외국어 능력)
내용 이해 실패(전문 지식과 논리력)
원서 오류(합리적 의심과 집요함?)
저는 주로 첫 번째부터 의심해 봅니다. 제 외국어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나 어휘에 제가 모르는 쓰임이 있을 때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사전에서 제2, 3, 4, .. 용법을 살펴보고, 기계 번역은 어떻게 번역하는지도 봅니다. 낯선 문구는 통째로 검색하여 어떤 글에서 어떤 맥락으로 쓰이는지 살펴봅니다.
올바르게 해석한 것 같아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면 내용을 깊이 몰라서일 수 있습니다. 배경 지식 없이는 과학, 의학, 법률 등 생소한 전문 분야의 글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찾아 더 공부하다 보면 ‘이런 뜻이었구나!’하는 순간이 옵니다.
마지막으로 원서 오류도 제법 많습니다. 단순한 편집 오류면 다행이지만, 저자가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는 않습니다. 이럴 때는 내가 생각하는 근거를 정리해 저자께 문의해야 합니다.
100% 이해를 추구한다고 해도 실제로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편집자나 독자 피드백 덕에 오해한 부분을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번역할 당시에는 찜찜한 채로 대충 넘기는 부분은 없게 합니다.
역자는 저자(원서)의 표현과 설명 방식을 존중해야 하지만,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서가 어렵게 쓰여 있다는 핑계로 어려운 번역서를 내미는 건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일 것입니다.
우선은 문장이나 문단이 길면 잘라주고, 흐름이 꼬여 있으면 순서를 재배치하고, 과도한 수사나 반복은 적절히 쳐내는 간단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 정도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나라면 어떻게 설명할까’를 고민하여 ‘나의 방식으로 완전히 새롭게 설명’합니다. 개념 자체가 어렵거나 원리나 메커니즘이 복잡하다면 그림을 동원합니다.
그런데 정말 저자의 문장을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 걸까요? 앞서 역자의 기본 역할과 확장된 역할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중 확장된 역할인 ‘중간자’로 바라본다면, 역자의 역할은 단순 ‘텍스트’ 번역을 넘어 ‘내용’을 옮기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은 없는 문제라서 저는 다음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책은 상품이며, 상품의 존재 가치는 소비자인 독자로부터 나옵니다. 거의 모든 IT 전문서는 독자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독자의 성장을 돕기 위해 탄생합니다. 따라서 저자의 설명 방식과 독자의 요구가 충돌할 시 독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책의 가치를 더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물론 이런 일은 최소로만 일어나도록 자제합니다. ‘내 맘대로 쓸 거야’가 아니라, 원서 그대로는 도저히 쉽게 풀어낼 수 없을 때 이렇게 합니다.)
번역서는 원서보다 늦게 출간됩니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몇 년 후 출간되기도 하죠. 쉴 줄 모르고 급변하는 IT 세계에서 이는 번역서에 커다란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통용되는 내용인지, 그대로 번역하면 독자에게 오히려 혼선을 주는 내용은 아닌지 신경 씁니다. 이럴 때 가장 기본적인 대처법은 주석을 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읽는 흐름을 끊고, 무엇보다 주석을 유심히 읽지 않는 독자에게는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혼선을 주는 경우라면’ 저는 본문 자체를 최신 내용으로 바꿔 설명하곤 합니다. 그런 다음 ‘필요하면’ 원서의 내용을 주석으로 알려줍니다. 그러면 다음 그림처럼 ‘중요한 정보를 더 중요하게 다루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방식에는 역자 주석을 줄여주는 부수효과도 있습니다. 주석은 부차적인 정보이면서 읽는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석이 적은 글을 추구합니다.
마지막 원칙은 ‘원서보다 나은 번역서’입니다. 우선은 원서를 충실하게 번역합니다. 그런 다음 어떤 측면에서든 원서보다 나아지게 만들 방법을 고민합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더 쉬운 설명, 최신 버전 반영, 핵심 요약이나 국내 실정 추가 등 방법은 다양합니다. 편집 측면의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글쓰기(번역 포함)는 관련 책만 최소 수백 권은 되는 굉장히 큰 주제입니다. 저도 열 권 이상을 읽었고 전문 교정/교열 수업도 들었습니다. 또한 역자로서 혹은 편집자로서 수백 권의 원고를 살피며 수많은 저자, 역자, 다른 편집자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제가 뭔가 대단한 팁을 드리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대신 제가 글을 쓰거나 교정할 때 가장 주안점을 두는 몇 가지를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이 글은 거의 즉흥적으로 쓰고 있어서 구체적인 예시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인터넷에서 각 팁의 주제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다양한 예문을 쉽게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번역을 대체로 다음 순서로 진행합니다.
초벌: 원서 없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우리말로 옮깁니다. 깔끔함보다는 문장 단위의 ‘정확성’이 우선입니다. 전문 용어를 무리하게 번역하지 않습니다.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용어가 우리말로는 같은 용어로 번역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원어 그대로 음차하고, 책 끝까지 초벌 후 한꺼번에 정리합니다.
1교: 초벌 원고를 ‘독자께 보여주기 부끄럽지 않을 수준으로’ 최대한 깔끔하게 다듬습니다.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의 논리가 매끄럽게 이어지는지 살핍니다. 논리가 매끄럽지 못하면 초벌 단계에서 오역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 외에도 ‘2교 때 걸리적거릴 게 없도록’ 그림, 표, 수식 등 모든 요소를 빠짐없이 번역합니다.
2교: 기본적으로 ‘1교의 반복’입니다. 원고가 더 깔끔해져 있기 때문에, 2교 때는 한눈에 더 많은 내용이 들어옵니다. 마지막으로 맞춤법 검사기를 돌려 마무리합니다.
편집자 검토: 담당 편집자가 검토 후 책 모양으로 조판합니다. 편집자 피드백은 제 취향이 아니더라도 되도록 수용합니다. 내용이 달라지거나 독자가 오해할 변경만 아니면 됩니다. 편집자도 전문가이고, 깐깐하게 굴면 피드백 자체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타 리뷰: 책에 따라 편집자 검토 전에 원고 상태로 진행하기도 합니다.
최종 검토: 마지막 수정까지 반영되었는지 확인하고 편집 상태도 살핍니다. ‘Text to Speech 도구’가 읽어주는 걸 귀담아들으면서 어색한 부분을 다듬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IT 전문서의 목적은 지식 전달과 학습입니다. 그러니 번역할 때도 이 목적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최대한 없애주는 게 좋겠지요? 지금부터 불필요한 방해 요인들을 없애 독자들이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팁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전문 용어는 대상 독자를 고려해 정합니다. 나이대가 어리거나 완전 입문자가 대상이라면 되도록 우리말 용어를 많이 쓰려 노력합니다. 반대로 중고급자 대상의 어려운 책이라면 외국어 용어(주로 영어)를 음차하는 비중을 늘립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입문서 독자에게는 모든 게 새롭습니다. 생소한 개념을 익혀야 하는데 용어까지 낯설면 어려움이 몇 배로 커집니다. 직관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머릿속에서 해석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도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반면 입문 단계를 벗어나고 경력이 쌓일수록 외국어(주로 영어) 용어와 친밀해집니다. 최신 정보는 번역서보다는 원서에서, 책보다는 인터넷에서 찾게 됩니다. API 문서, 코드 주석, 로그 메시지 등도 다 영어입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번역 용어를 고집하면, 독자들은 거꾸로 외국어로 다시 번역해 이해해야 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분법적으로 입문서냐 중고급서냐로 나눌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독자층을 잘 파악하고 어떤 용어에 익숙할지 고민하고, 편집자와 베타 리뷰어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일반 용어들에도 신경 써야 합니다. 저는 되도록 외래어보다는 쉬운 한자어를, 한자어보다는 순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대중이 쓰지 않는 단어를 찾아와서 ‘우리말이 좋은 것이여’라며 강요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직관적이고 쉬운 용어를 찾지 못하면, 그리고 반복해서 쓰이는 용어가 아니라면 의미를 풀어서 길게 쓰는 것도 좋습니다.
‘짧은 문장(단문)으로 쓰기’는 쉬운 글쓰기의 가장 대표적인 요령입니다. 문장을 짧게 쓰면 문장 성분 사이의 호응 문제가 상당히 줄어듭니다(주어와 서술어, 목적어와 서술어, 부사어와 어미 등). 문장 하나하나가 명료해지기 때문에 읽는 즉시 이해되고, 잘못 해석될 여지가 크게 줄어듭니다.
원서 문장의 길이나 구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어에서는 접속사나 관계대명사(which 등)뿐 아니라 괄호, 대시(—), 세미콜론(;) 등으로 문장을 길게 늘여 쓰는 일이 많습니다.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의 대표적인 예인데, 그 어려움을 독자에게까지 전달하면 안 되겠죠? 짧은 문장 여러 개로 분해하여 재배치합시다.
문장과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호흡으로 이해하기에 너무 긴 문단이나 절 역시 작게 나눠주면 좋습니다. 길이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건 아닙니다. 같은 분량이라도 내용이 쉬우면 막힘없이 읽히고, 내용이 어렵다면 중간쯤 왔을 때 앞 내용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독자에 빙의’하여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단위’로 잘라주는 게 필요합니다. 한 걸음에 건널 수 없는 개울에 적당한 폭으로 디딤돌을 두어 징검다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의 호흡에 맞춰 작은 개념 단위로 이해한 후 조합할 수 있습니다.
문단과 절을 나누는 요령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문단 나누기: 흐름이 자연스럽고 단순히 길기만 한 문단이라면 적절한 위치에서 줄바꿈합니다.
* 노트: 주된 흐름에서 살짝 벗어난 설명이 다소 섞여 있다면 ‘노트’ 요소를 써서 시각적으로 구분합니다. (‘노트’는 간단한 상세 정보, 팁, 주의 사항 등을 언급할 때 이용하는 편집 요소입니다. 보통 1~4줄 정도의 짧은 내용을 담습니다.)
* 상자글: 주된 흐름에서 벗어난 설명이 길게 이어지면 ‘상자글’ 요소로 구분합니다. (‘상자글’은 보통 두 문단 이상의 긴 내용에 제목도 따로 달 수 있는 정보를 실을 때 이용합니다.)
* 하위 절: 절차 혹은 같은 위상의 여러 소주제가 특별한 구분 없이 길게 이어진다면 각각을 세부 절로 구분합니다. 절로 나눈다면 각각의 절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이미 절 깊이가 너무 깊다든지 하는 이유로 하위 절을 더 만들기가 여의치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각 주제가 시작되는 첫 문단의 첫 문장을 적절히 수정하여 '주제 키워드를 강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해당 주제의 이야기가 시작됨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 코드를 실행하면 결과를 다 출력하지 못한다”라는 문장은 결과를 ‘아무것도 출력하지 못한다’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일부만 출력한다’라는 뜻일까요? 이처럼 둘 이상의 뜻으로 해석되는 문장을 중의적 문장이라고 합니다.
중의적 문장에는 재미난 특징이 있습니다. 관련 내용을 이미 아는 사람은 대체로 올바르게 해석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엉뚱하게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나 역자는 이런 문장이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알려드려도 “누가 그렇게 해석하냐”라고 반문하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IT 전문서는 해당 내용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 체계적으로 빠르게 배우고 싶어서 구입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저 스스로 이런 문장을 쓰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그런 다음 편집자, 베타 리더, 독자의 피드백에 귀를 기울입니다. 글을 잘못 해석하여 엉뚱한 질문을 한다면, 그 사람의 문해력을 탓하기 전에 어느 지점에서 오해를 일으켰는지를 찾고, 어떻게 표현해야 아무도 잘못 해석하는 일이 없을지를 고민합니다.
번역에 처음 도전하면 자신이 평소에 쓰던 우리말 표현과 문장들과는 다른 낯선 글이 써지기 쉽습니다. 원서의 표현과 문장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학교에서 배운 1차원적인 직역이나 다른 번역서 등에 영향을 받아 은연중에 번역투에 익숙해져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딸림 원칙들을 포함하여, 조금씩 나만의 문체를 가꿔나갔습니다. 나만의 문체가 있다면 원서의 저자가 여러 명이라도, 혹은 전혀 다른 문체로 쓰인 원서라도 일관되고 쉬운 우리말로 옮길 수 있습니다.
나만의 문체는 물론 경험이 쌓일수록 조금씩 진화합니다. 제가 다른 번역을 또 하게 될지는 아직 미정이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아진 모습으로 찾아뵐 것입니다.
코드와 그림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글을 읽을 때 막힘이 없도록 하듯, 코드와 그림도 독자가 해석하는 데 막힘이 없도록 노력합니다.
어떤 책은 글은 좋은데 코드나 그림은 불친절합니다. 글에서 설명하는 부분이 코드나 그림의 어느 부분인지 쉽게 찾기 어렵거나, 코드가 너무 길거나 복잡하여 따로 분석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각할 부분은 더 부각하고, 코드 흐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주석을 추가합니다. 때로는 변수나 메서드 등의 이름을 더 직관적으로 고치기도 합니다.
역자의 기본 역할인 ‘원서를 도착어로’ 바꿔주는 일만 말끔하게 완수해도 100점짜리 역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5점을 더 보태기 위한 아이디어를 한 번쯤 고민합니다. 이때도 중심은 독자에게 있습니다. 번역한 책의 내용을 토대로 독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콘텐츠를 만들고 알릴 아이디어를 찾아보는 것이죠.
글이 길어지니 예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곧 이어질 ‘번역의 역사’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딥러닝> 1편을 번역할 당시엔 인공지능 커뮤니티에 번역서들의 용어 관련 갑론을박이 종종 벌어졌습니다. 당시 인공지능 붐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IT 전문가들은 주로 영어 자료를 보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번역서들은 생소한 번역 용어를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생소한 용어 중 상당수는 국내 수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정립해 사용하던 용어들이었습니다. 어색한 번역도 아닌데, IT인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보니 ‘무리한 번역’으로 오해를 받았죠. 대부분의 IT인들은 이 용어들이 학계에서 이미 정립되어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어를 번역한 용어와 역자가 고심하여 만든 용어 등이 혼재되어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밑바닥.. 딥러닝>도 그냥 내놓는다면 흙탕물에 돌을 하나 더 던져 넣는 꼴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까지 나온 유명 딥러닝 책들과 수학계에서 쓰는 용어, 그리고 <밑바닥.. 딥러닝>에서 채택한 용어를 간단한 표로 정리하여 커뮤니티에 공유했습니다. 이 자료는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 효과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출간 후 용어 관련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처럼, 저는 단순히 책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커뮤니티에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찾아내려 노력합니다. 이런 콘텐츠는 큰 노력 없이 퍼져나가며, 책을 알리는 데도 때론 비싼 광고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글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이쯤에서 마무리합니다. 시간이 더 있다면, 제 역량이 더 높다면 훨씬 간단하게 정리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보태겠습니다. 저의 원칙은 완성형이 아닙니다. 번역은 겨우 10권, 편집 경력도 10년 정도일 뿐이라 ‘원칙’을 이야기하기엔 경험과 생각이 아직 미천합니다. 이직을 준비하며 생각을 정리할 겸 쓴 글이니, 여러분도 가볍게 ‘개앞맵시는 이런 생각으로 번역하는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참고로, 8년 전에 <어서 와! 번역은 처음이지?>라는 번역 안내서를 공유한 적이 있습니다. 가볍게, 일반적으로 번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하신 분은 이 자료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편 겪인 ‘번역의 역사’와 ‘이것이 편집이다’를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