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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게 Apr 27. 2023

수채화 입문자의 물감을 두고 오는 즐거움

가볍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안도_03




    나는 어려서부터 손이 참 못생겼다. 쭈글쭈글한 주름이 많고 건성이라 겨울이면 그 주름 그대로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오기도 했다. 남들보다 세 배는 핸드크림을 쥐어짜도 다른 이들의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을 가질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손을 보면 그 사람이 글을 쓰든 커피 잔을 들든 버스 손잡이를 잡든,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는 건 하얀 손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손은 그냥 도구일 뿐이지, 무언가를 집고 열고 닫는데 쓰는 도구인데 이쁘면 어떻고 못생기면 어때. 남몰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나의 못생긴 손을 위로하기도 했다.



   수채화를 꼭 배워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이 못생긴 손으로도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무작정 화실을 등록하고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들고 갔다. 당연히 그 사진을 당장에 수채화로 그릴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화실 선생님이 주신 예시 자료에 맞춰 도화지에 이파리가 몇 장 달린 장미를 스케치했고, 다양한 초록색 물감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색을 섞었다. 거의 100ml에 육박하는 초록색 물감을 만들어 대략 2cm 정도 되는 이파리 한 장을 색칠하고는 95ml 정도의 필요가 없어진 물감을 그대로 휴지로 닦아내었다. 이 무슨 낭비인가! 매 맞기 전에 선수 치는 아이처럼 화실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그 후로도 이 습관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그리고 싶은 사진을 스케치한 건 그로부터 2주가 지난 다음이었다. 4B 연필을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처음으로 깎아 보았고, 사진을 보고 스케치해 보는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가구와 벽의 테두리만 그리면 되나. 사람 옷에 있는 주름을 다 그려야 하나. 여기 사람 머리를 날려야 하나. 바다에 파도를 연필로 스케치하면 나중에 색칠할 때 전부 검은 물감이 되지는 않을까. 오만가지 걱정 속에 스케치를 한 장 그리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고, 화실 선생님에게 이 색이 좋을지 저 색이 좋을지 물어보느라 500ml 가량의 물감을 더 휴지로 닦아내고 나서야 본격적인 채색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수채화에서 채색한다는 것은 물감을 붓에 묻혀 대상을 조각하듯 하나씩 그려나가는 전문적이고도 고된 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단지 필요한 곳에 내가 원하는 물감을 가만히 두고 오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먼저, 색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깨끗한 붓에 깨끗한 물을 담아 충분히 적신다. 물이 묻은 두터운 종이가 마르는 동안 원하는 색의 물감을 조합하여 붓에 담는다. 그리고 최대한 종이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스치듯, 붓이 머금은 물감을 그곳에 두고 온다. 자연스럽게 번지기를 기다려 절반 정도 마르면, 원하는 무늬가 되도록 깨끗한 붓 끝으로 종이를 훑어 질감을 표현하기도 하고, 다시 같은 색의 물감을 귀퉁이에 쌓아서 진한 명함을 표현한다.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이 이렇게 물감을 두고 오는 일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신선한 충격에 웃음이 입꼬리 사이에서 줄줄 새어 나왔다. 뭐야,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그냥 두고 오면 되는 거네.



   두 달간의 화실 수업으로 수채화 그리기에 입문하고 2년 동안 유튜브를 보며 그림을 한 장씩 따라 그리고 있다. 노을이 담긴 고양이의 눈. 숲 속에 홀로 노란 해바라기. 도시 빌딩의 수많은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비행기. 그저 도화지에 물감을 두고 오는 이 행위를 못생긴 손이 기어코 해내어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면, 나는 깊은 만족감과 희열을 느낀다. 그리는 동안에는 망했다고 수도 없이 중얼거리지만, 다 그리고 방 한 켠에 걸어둔 그림에 눈이 스칠 때마다 입꼬리는 여지없이 올라간다. 그림을 한 장씩 그릴 때마다 그림을 그린 손에 대한 애정도 깊어진다. 그림을 열심히 그리느라 온몸에 물감을 묻히고 묵묵히 등 기대어 있는 손의 뒷모습은, 아 이 얼마나 늠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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