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1_>
아무런 대가와 목적 없이 멋진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필연적으로 나는 이 일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1_>
앨리스 #1. 런던
게스트하우스를 하긴 해야겠는데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영어가 유창하냐? 더더욱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도 국·영·수를 제일 싫어했던 난데,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흐지부지 사라질 것 같았다. 마음의 강건함이 24시간을 채 가지 않는 의지박약.
그래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최대한 빨리 떠날 수 있고 한국에서 면접을 볼 수 있는 곳. 마음을 먹으니 일사천리였다.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별 흥미도 없던 런던. 나는 영국으로 떠났다.
몸 쓰는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런던에서 겪는 모든 일이 고됐지만 힘든 일보다는 즐거운 일이 더 많았다. 집 앞을 나가면 바로 펼쳐지는 푸르른 공원들과 멋진 거리,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알록달록한 하늘, 재미있는 옷차림의 사람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매일 새롭게 만나는 다양한 여행자들.
아주 멀리 떠나오면 그 자체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같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하는 대화가 서로를 솔직하게 만들어준다.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부터 많아야 한 달이었지만, 한국에 있는 지금까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설령 맞지 않아도 며칠 뒤면 떠나갈 방랑자니 마음속으로 되게 별로네 하면 그만이었다. 운이 좋게도 난 좋은 사람을 더 많이 만났다. 사람 때문에 지쳐있을 때였는데 이상하게 또 사람으로 가장 위로받는다.
아는 게 많아지고 전 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는데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말 내뱉기가 조심스러워진다. 그동안 무심결에 준 상처들과 받은 상처들 때문에 겁이 많아진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니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편견이 괜한 오해를 만들고 선을 긋는다. 그래서 어쩌면 좋은 관계로 유지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런던에서의 나는 앨리스고 뭘 했던 사람인지 어떻게 뭘 먹고 살아갈 건지에 대해 말할 필요 없었다. 그 점이 좋았다. 런던에서 만났던 나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실패는 부끄럽지 않음을, 이 무모한 도전은 용기임을 배우며 조금씩 나에게 관대해질 수 있었다.
아무런 대가와 목적 없이 멋진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필연적으로 나는 이 일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앨리스 #2. 런던 with 메이
한 달 뒤 메이가 런던으로 도착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평소 기억력이 별로지만 그날 만났던 장소, 옷차림, 날씨까지 전부 기억이 난다. 떠나온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를 아는 진짜 친구가 와주는 건 너무 설레고 기쁜 일이었다.
‘메이가 오면 잔뜩 놀아 재껴야지~’ 남친도 아닌데 만나러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가슴이 벌렁벌렁.
맨날 놀아 재끼기만 하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메이는 나보다 더 열악하고 지독한 환경의 게스트하우스 노동자
가 되었다.
아침부터 대량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고 쥐들과 동거했다. 어이없고 웃음만 나왔다.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를 꼭 해봐야 한다고 강력히 추천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빡센 그녀의 생활을 보며 ‘얼마 안 가 포기하겠지?’ 생각했다.
근데 포기가 웬 말! 온 집안을 다 뒤집어엎어 버리는 그녀다. 그동안 이 세상 운은 나만 다 비껴가는구나 쓸쓸했지만 흰머리가 될 때까지 절교 안 하고 재미있게 지낼 친구를 주려고 그랬나 보다.
두 살 어리지만, 여전히 꿋꿋하게 '앨리스야! 앨리스야~' 하는 건방진 녀석. 슬픈 일이 생겼을 때, 괜찮아? 메시지보단 한걸음에 꽃을 안겨주는 녀석. 이런 메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을 마치면 운동을 하고, 쉬는 날엔 가고 싶던 곳을 구경했다. 좋아하는 책 한 권과 커피 한잔이면 우리가 행복하기에 충분했다. 웃는 일이 많은 날이었다. 앙상한 가지가 온통 초록으로 물들 때까지 메이와 함께 런던에 살았다.
앨리스 #3. 바르셀로나
본격적인 게스트하우스 오픈 준비를 위해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 메이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계획했다. 도시를 옮겨 스태프 생활을 했던 메이는 세비야에서, 나는 런던에서 출발했다. 도착지는 ‘바르셀로나’. 그곳에서 우리는 2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일전 혼자 한 바르셀로나 여행에서는 별일이 다 있었다. 그렇게 여행을 다녔지만 한 번도 당해보지 않았던 핸드폰 소매치기며 길거리 집시에게 잡혀 옷이 찢어지기까지. 그러나 왜인지 이 도시의 기억이 좋아서 다시 오게 됐다.
겨울과는 사뭇 다른 여름의 바르셀로나. 메이와 함께 바르셀로나 비치에서(누드 비치) 현지인들처럼 상의를 벗고 해수욕을 했다. 태양이 얼마나 강렬하고 따갑던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등이 다 벗겨졌지만 특별한 경험이었다.
공원에서 드러누워 책을 읽고 달콤하고 시원한 샹그리아를 종일 마셨다. 발 닿는 데로 다니다 우연히 만나는 길거리 전시회에서 뜻밖의 멋진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오래된 엽서를 1유로에 득템 했다. 유명한 건축물의 오디오 가이드보다 훨씬 근사하게 느껴지는 여행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근사한 일주일을 보내고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저가 항공이라 로마 피우미치노에서 경유하는 스케줄이었다. 로마에서의 체류 시간이 27시간이나 되길래 고민할 것도 없이 공항 밖으로 뛰쳐나갔다.
둘 다 바다를 좋아해서 로마 시내가 아닌 공항 근처의 해변에 숙소를 잡았다. 짐을 풀고 바닷가 이정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지는 해가 반사돼 온통 빨갛게 물든 바다에서 우린 한참을 대화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어떤 식으로 운영하면 좋을지 인테리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야기가 가득한 밤이었다.
그날, 온 마음을 빨갛게 물들인 노을과 바닷가를 마구 뛰어다니던 아이 같은 우리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3시간이나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미쳤다. 우리 진짜 잘 되려나 봐, 이 정도면 진짜 완벽 그 자체 아니야?"
티켓 수속을 마치고 소파에 누워 한국에 가면 뭐부터 먹을지 즐거운 상상에 들떠 있었다. 드라마를 보며 비행기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데 한참을 지나도 게이트에 인기척이 없다. 티켓을 들고 승무원에게 물었다.
"왜 비행기 보딩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그녀가 대답했다.
"너희 비행기는 지금 막 출발했어. 한참 불렀는데 못 들었니?"
OMG! 너무 설레발을 떨었나?
다행히도 다음 비행기에 몸을 실어 겨우 한국에 도착했다. 인생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우리는 서로에게 딱 맞는 사고뭉치 듀오다. by 벨레 매거진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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