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2_>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1_(앨리스 Part 1_)>
근데 살아보니 말인데, 우리가 욕심 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지금의 행복이더라. 우리는 오후의 게으른 볕과 싸구려 커피를 사랑했고, 젠틀한 ‘How are you’보다 발랄한 ‘Hola!’가 더 좋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에 삐걱거리는 몸뚱이를 마음껏 흔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한치의 의견 차도 없이 우리와 비슷한 온도의 스페인으로 입을 모았다.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 2_>
메이 #1. 겁보의 내적갈등
나는 주로 작고 무용하며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잘 포장하여 낭만주의자. 그럼 낭만을 찾아 떠났냐고? 아..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낭만주의자이기 전에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슈-퍼 겁보이다. 하여 보통의 당연한 삶 안에서 최대한으로 좋아하는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합리화한다.
이런 나에게 동네 술자리에서 만난 앨리스의 게스트 하우스 운영 제안은 아주 파격적이었다. 9박 10일 여행도 아니고, 한 달 살기도 아니고, 자영업을 해외에서?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그림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들었어도 비슷한 반응이지 않을까.
ENFP(외향+직관+감정+인식) : 재기 발랄한 (겁보)활동가에게 익숙함은 지루함이다.
이십 대 끝 무렵, 4년째 큐레이터 일을 하고 있었다. 낭만이 가득하고 가슴 뛰는 업(業)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익숙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퇴근 이후에 걸려오는 전화를 더 받지 않았고, 매월 야속하게 스쳐 지나가는 귀여운 내 월급은 나의 업에 대한 애정을 갉아먹었다.
하... 낭만과 마음을 좇았지만 결국엔 엄마 말대로 역시 돈이 최고이고, 이직이 답인가?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반면 앨리스는 마치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는 낚시꾼 같았다. 함께 해보자고 조르지도 밀어붙이지 않고, 매번 제안을 툭- 던지고 내가 물기만을 기다렸다. 이직을 생각하던 나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진다. 다른 물고기가 저 미끼를 먼저 채갈까 봐 말이다.
남 주기 싫은데, 덥석 물기는 무섭다. 근데 하도 눈앞에서 알짱거리니 호기심은 또 생긴다. 살짝 상상해본다.
"해외에서 게스트도 아니고 호스트라… ‘해외’, ‘호스트’… 둘 다 멋지다, 말도 안 되지만 무슨 업 주제에 섹시하다."
이 찰나의 상상부터였을까. 나는 이미 잠재적 결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열정 페이에 치여보고 이제 정신 좀 차리나 하는데 왜 자꾸 내 심장은 나대고 난리일까.
B. U. T. 너무 모험+위험+이상적 선택지이다. '현실-직면, 이상-외면해야 해.' 셀프 따귀로 이 위험한 상상을 최대한 멀리 쫓아본다. 근데 말이다. 이 미끼를 물 수밖에 없는 결정적 핑계? 가 생겼다.
메이 #2. 결정적 핑계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즈음 오랜 친구 결혼식에 초대되었다. 그런데 그 장소가 무려 ‘체코, 프라하’다! 친구 남편분은 프라하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고, 초대된 하객들은 그곳에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체코? 체크? 그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낯선 나라였다. 그런데 비현실과 현실은 비행기 티켓 한 장 차이였나 보다. 막상 티켓팅을 하고 나니 지난 꽃할배 방송을 찾아보며 저 아름다운 광경이 곧 나에게 현실이 된다니, 웬걸. 세-상 그만큼 낭만적으로 보일 수가 없다.
여기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요점을 되짚어보자. 앨리스의 캐스팅 ▷ 프라하 결혼식 초대와 게스트하우스 숙박 ▷ 비행기 티켓팅 ▷ 퇴사! 이 얼마나 매끄러운 흐름인가! 두 사람의 머릿속인가 싶을 정도로 갈등했지만, 이 정도의 전개는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마무리 짓는다.
"데스 티 니이-"
방향을 결정하기까지가 어렵지, 막상 발을 떼고 나면 그때부터는 쉽다. 체코에서부터 시작된 한 달간의 여행 중에 두 가지 확신이 들었다. 내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그리고 훗날 할머니가 되어 내 지난 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호스트로 보낸 시간은 나를 분명 미소 짓게 만들겠구나.
여행 마지막 날 앨리스에게 카톡을 보냈다. 우리.. 해보자!
이국적인 분위기가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풍경보다 그곳에서 만난 여행자에게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행색은 뭐 당장 구걸을 나가도 무리 없을 듯했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시선과 열정을 마주하게 된다. 뜨겁게 사는 사람들. 나는 저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나.
그리고 서툴지만, 그 나라 언어로 커피 한잔을 시켰을 때. 이게 왜 이렇게 짜릿하고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물, 유세요~'정도의 수준이겠지만, 의사가 전달된다는 것이 재미있다.
무엇보다 여기선 나다울 수 있다는 게 가장 좋다. 물론 나답게 사는 것은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본인의지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물리적인 거리가 주는 이상한 해방감이 나를 정신적으로 탈피시켜 주었고, 이곳에선 나다울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왔다. 오래된 자취방을 정리하며 게스트하우스 운영계획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로 옮겼다. 타인을 많이 의식하는 나에겐 이것만큼 효과적인 채찍이 없다. “아니 걔들, 게하 운영 준비한다더니 결국 그냥 회사 다닌다는데~?” 생각만 해도 진짜 너무 자존심 상한다.
때문에 내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어 준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못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근거는 없지만 자신은 있다.
우리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와!
2. 동업…?
이하는 생략해도 맥락은 충분히 이해될 거라고 본다. 나의 지인들이 언제 동업을 했었던가? 물론 그렇지 않았고, 막상 우리는 걱정이 없었다. 둘이어서 걱정되기보다, 둘이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앨리스는 K-장녀의 리더십과 포용력을 가졌고 숫자에 아주 밝으며, 계획적이다. 나는 대책은 없지만 유동적이며 센스 있는 크리에이터이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했고, 서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이드미러가 없는 차에 앨리스는 운전석, 나는 보조석에 탄 느낌과 유사하다(실제로 나는 무면허다 ㅋ).
메이 #3. ¡Hola! 스페인
런던에 왔다. 인스타그램 속 우리는 마치 그럴싸한 여행자같이 보였겠지만, 살다 살다 이런 개고생은 처음이었다. 키보드 두들기던 손으로 강도 높은 청소와 집안일을 하니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손목이 나가고, 관절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무식하지만 우리는 몸으로 부딪치며 체득하고 우리의 계획을 세워나간다.
또 무엇보다 서로의 합을 확인하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떠나오기 전 우리의 본명으로 획수 궁합을 보니 무려 97%이다. 떠나온 지금, 살 비비며 같이 살아보니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앨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결이 비슷한 사람’이다.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함께일 때 더블로 즐겁고 시너지라는 게 폭발한다. 팡 팡 팡. 마치 젊어지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우리는 휴일에 런던 구석구석을 발바리처럼 쏘다녔고, 예쁜 기억들이 많이 생겼다.
어디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런던과 스페인을 후보로 올리고 이리저리 각을 재본다. 앨리스가 예산과 예상 수익, 수입수단 등을 브리핑했고 분위기 흐름상 런던에서 해야 할 것 같다.
근데 살아보니 말인데, 우리가 욕심 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지금의 행복이더라. 우리는 오후의 게으른 볕과 싸구려 커피를 사랑했고, 젠틀한 ‘How are you’보다 발랄한 ‘Hola!’가 더 좋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에 삐걱거리는 몸뚱이를 마음껏 흔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한치의 의견 차도 없이 우리와 비슷한 온도의 스페인으로 입을 모았다.
나는 곧바로 스페인 남부의 세비야로 파견되었다. 세비야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른다. 런던처럼 멋지고 세련된 사람들보다는 조금 촌스럽지만 따뜻한 사람들로 가득했고 맛있는 음식들은 이상하게 저렴했다. 여름엔 한참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해가 중천이었고, 10시나 되어야 해가지니 게으름 피워도 하루가 길다.
처음 들어간 카페에 점원은 마치 단골을 맞이하는 듯이 올라! 하고 싱긋 웃었고, 밤이 되면 동네 조그만 펍에는 꾸안꾸가 아니라 그냥 안.꾸. 사람들이 각자의 웃긴 춤을 추며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문득 앨리스가 생각났다. 그녀도 이 작은 도시를 맘에 들어했을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앨리스는 런던에서, 나는 세비야에서 두 달 정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만났다. 의도치 않게 떨어져 지내보니 깨닫는다. 내 파트너, 너무 작고 소중해!
6개월간의 호스트 트레이닝과 여행은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었고, 지금 머릿속은 하루빨리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우리의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열정 열정 열정! Vamos a barcelona! by 벨레 매거진
*<뜨거운 스페인, 민박집 언니둘>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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