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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Jul 06. 2024

딸의 성공이 두려운 아버지

윌리엄 서머싯 몸의 <<데이지>>를 읽고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길 바라지만 부모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지 않는 자식에게 느끼는 감정은 복잡할 거다. 부모 말을 듣지 않는 게 괘씸하고 섭섭하고,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실패할까 염려되고 안쓰럽고, 그런 사실을 남들에게 들키면 체면이 깎일까 창피하고 우려되고… 그럼 부모는 어떻게 할까? 대부분 부모는 자식이 무언가를 시도하다 실패해도 자식을 격려하고 보듬어 줄 거다. 그러나 매우 폐쇄적인 사고를 가진 동네에서 자식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낙인이 찍힌다면 과감히 자식을 없는 사람 취급할 수도 있다. 한국도 한 때 많은 걸 터부시 해서 그런 일이 있지 않았던가? 소속된 공동체의 규범과 가치만이 진리가 아닌데, 그런 틀에서 벗어나면 큰일이 난 것처럼 남의 눈치를 보고... 그런데 이런 문화는 서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적어도 1899년에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이 발표한 단편 소설 <<데이지(Daisy)>>에 나온 블랙스터블 마을 사람과 데이지의 가족은 그랬다.

 

이야기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수이자 교인 대표인 그리피스 씨의 딸 데이지가 유부남 군인과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작된다. 그리피스 씨는 상심이 너무 커서 한 순간에 늙은 노인처럼 변한다. 그는 마을 사람의 구설수에 오르는 건 상관없다. 그보다 믿었던 딸에게 배신당한 게 문제다. 아버지는 딸 바보였다. 아들 조지는 동네 교회학교에 보낸 게 전부지만 딸은 도시에 있는 학교에서 원하는 공부도 시키고 원하는 드레스도 사준다. 반면 그리피스 씨 부인은 마을 사람에게 위신을 잃고 체면을 깎이는 게 두렵다. 그래서 딸이 주제넘게 귀부인 교육을 받아서 일탈 행동을 했다고 남편에게 소리친다. “모두 당신 잘못이에요. 걔를 내가 원하는 대로 키웠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it was all your fault. If she’d brought up as I wanted her to be, this wouldn’t ever have happened.)”

 

얼마 후 데이지는 남자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쓴다.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딸을 데려오고 싶지만 어머니와 오빠는 반대다. 비슷한 일을 겪은 이웃 사람은 딸이 돌아오자 목사 부인과 마을 사람에게 외면당한다. 따라서 딸을 받아줄 경우 아들의 약혼도 깨질 수 있다. 그리피스 씨는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그의 아내는 당당하게 고개를 세우고 딸과 인연을 끊을 거라고 한다. 딸에게서 다시 편지가 온다. 어머니와 아들은 아버지가 편지를 읽지 못하게 없애고 딸이 더 이상 편지를 쓰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다. 오빠는 동생을 찾아가 아버지가 절연했다고 거짓말한다. 데이지는 절규한다. “나는 당신들 모두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오빠 엄마 그리고 모든 블랙스터블 사람들. 당신들은 저주받은 위선자 집단이에요. (I know what you are, all of you; you and mother, and all the Blackstable people. You're a set of damned hypocrites.)”

 

일 년 후 오빠는 런던에서 데이지를 만났지만 데이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른 척한다. 엄마는 딸이 겉으로는 예쁘고 선량해 보이지만 속에 악마를 지닌 독한 사람이라고 한다. 다시 5년의 세월이 흐르고 데이지 소식이 들린다. 연일 신문에서 데이지가 주인공인 공연을 호평하자 블랙스터블 목사를 비롯하여 웬만큼 사는 마을 사람들은 공연을 보러 도시로 간다. 그리피스 씨 부인도 아들 내외와 공연을 보러 간다. 데이지는 멋진 공연으로 관객을 사로잡지만 블랙스터블 마을의 목사 부인과 남 흉보기 좋아하는 과부는 데이지가 돈을 많이 번다는 것 자체가 타락한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데이지가 가문 좋은 부잣집 청년과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이 들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가 확 바꾼다. 그렇게 데이지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그리피스 씨 부부에게 딸을 용서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들이 단호히 거절하자 목사 부인은 그리피스 씨 부인아 좋은 크리스천이 아니어서 천벌을 받아 목공소 경기가 어려운 거라고 쏘아붙인다.

 

다행히 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데이지와 화해하라는 말을 하자 즉각 딸에게 편지를 쓴다. 답장이 없다. 집으로 찾아간다. 만나주지 않는다. 결혼식에도 초대받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데이지가 가족에게 버림을 받아서 그런 거라고 오히려 데이지를 두둔한다. 반면 그리피스 씨는 딸의 성공이 반갑지 않다. 부도덕한 행동을 한 딸이 공장 같은 곳에서 힘들게 일하며 속죄하길 바랐다. 충분히 고생하고 아버지를 찾아오면 용서해 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딸이 웃음을 팔아 성공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자 나쁜 짓으로 부를 축척한 것 같은 딸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그리피스 씨 집안이 거리로 나앉게 됐다. 아들 조지는 엄마 말을 듣고 석탄 상인이 됐지만 자신의 가족조차 부양할 수 없어 부모에게 생활비를 꾸는 형편이다. 게다가 마을이 휴양지로 바뀌면서 목공소가 많이 생겨 그리피스 씨는 일이 없어 가족 몰래 저금한 돈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잔고가 바닥난다. 결국 아들 내외와 아내는 그리피스 씨를 윽박질러 딸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게 한다. 

 

드디어 데이지가 6~7년 만에 고향 집에서 아버지와 상봉한다. 아버지는 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딸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빈다. 아버지는 계속 “그들이 내게 편지를 쓰라고 시켰다”는 말만 반복한다. 아버지는 마치 붙잡힌 동물처럼 혐오하는 눈빛으로 딸을 바라본다. 딸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족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약속한다. 그리고 혼자서 마을을 산책한다. 바다와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낯익은 냄새를 기억하며 어린 시절이 떠올라 무한한 슬픔에 빠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도 슬픔은 가시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데이지는 남편에게 사랑을 확인한다. 남편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하자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좋은 아내가 될 거라고 말하고 이야기는 끝난다. 

 

이제 데이지는 더 이상 그리피스 씨 딸이 아니라 허버트의 아내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됐다. 성경에 나왔듯이 데이지는 “부모를 떠나” 그녀의 남편과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된 거다. 즉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모든 걸 남편과 결정하게 될 거다. 그렇다고 부모와 연을 끊는 건 아니니 부모가 조건 없이 사랑해 주길 바랐을 거다. 그러나 데이지의 부모는 조건이 있다.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건 쉽다. 데이지가 귀부인이 되고 경제적 도움을 주자 전보다 딸에게 더 잘해준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아버지는 데이지가 남성에게 웃음을 팔아 성공한 걸 용납할 수 없다. 아마도 아버지는 예쁘고 똑똑한 딸이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믿음이 좋은 청년과 결혼하길 바랐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데이지를 조지처럼 동네 교회학교에 보냈어야 했는데 도시에 있는 학교로 보내지 않았나? 데이지는 그곳에서 제대로 노래와 춤을 배워 배우로 성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미모까지 겸비해서 허버트가 결혼하고 싶을 만큼 멋있는 여성이 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을 소위 "타락한 여자"로 여겼던 것 같다.  

 

그리피스 씨의 고집이 안타깝다. 아무리 딸이 과거에 잘못을 했어도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데 받아줄 수 있지 않나? 처음에 데이지를 내친 어머니만 몰인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태도는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혼란스럽다. 딸이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자립하지 않으면 안 될 극한 상황에 놓이자 아버지 덕분에 받았던 교육을 바탕으로 재기하여 성공했다. 그렇다면 충분히 아버지도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아버지는 딸의 직업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데이지가 연극 의상을 입고 웃고 있는 초상화를 보고 '맙소사!'라고 신음했고 바로 그때 딸을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배우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여배우는 진보적인 면과 퇴폐적인 면을 아우르는 신여성과 연결 짓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딸은 성공한 배우가 아니라 정조를 잃고 몸과 웃음을 파는 거리의 여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딸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컸던 만큼 아버지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아버지가 상상하지 못한 길로 빠진 딸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서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그리피스 씨는 딸을 용서할 거다. 너무나 사랑했던 딸이지 않나! 

 

<참고자료>

https://mmccl.blogspot.com/2016/01/dais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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