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지 않다.
요즈음 선남선녀를 만나게 해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면 남녀 출연자가 외모나 학벌 직업까지 평균 이상은 돼 보여서 그렇지 못한 사람은 더 주눅 들지 않을까 염려된다. 남자의 경우 대부분 키가 크고 인상이 좋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 여자도 개성과 매력이 넘치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 이들의 만남이 소개팅이나 맞선과 다른 점은 한꺼번에 여러 명을 만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서로에 대한 신상정보가 없다는 거다. 우선 첫인상만 보고 함께 식사를 한 다음 신상공개를 한다.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 꼭 대두되는 질문 중 하나가 “장거리 연애”의 가능 여부다. 대체로 가능하다고 대답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다는 쪽이 많다. 그리고 제작진의 계획에 따라 마음에 끌리는 이성을 선택해 데이트 시간을 갖는다. 과연 이들이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사귀고 싶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옛날에는 선보고 몇 번 만나지도 않고 결혼해서 잘 사는 부부도 많았으니 가능할 거다. 오래 연애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꼭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결혼을 잘 유지한다고 할 수 없지만 결혼하기 전 책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함께 지내는 게 좋다는 조언을 읽고 남편과 그렇게 9개월을 만났었다. 그 후 우리는 한국과 미국에 살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장거리 연애를 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이민 갔고 남편은 한국에 남아 군의관으로 3년을 복무해야 해서, 무의촌 3년 인턴 1년 도합 4년을 떨어져 지내며 1200 통이 넘는 편지를 교환했었다.
요즈음처럼 인터넷으로 영상 통화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거리 전화가 3분에 만오천 원 가까이하던 시절이라 남편은 쥐꼬리만 한 봉급(한 달에 약 15만 원)을 받아 생일이나 명절에 전화를 한 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통화 품질도 좋지 않아 목소리가 끊길 때도 종종 있었으니 요즈음 사람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아닌가 싶을 거다. 그래서 전화보다 편지를 많이 썼다. 일주일에 3~4번, 남편은 그 이상 썼을 거다. 편지에는 주로 일기처럼 하루의 일과를 쓰고 마지막에는 노래 후렴처럼 “보고 싶고 사랑한다”는 말과 몇 번째 편지인지 숫자를 적었다.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건만 잠시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매일 집배원이 우체통에 우편을 넣는 시간을 기다렸다 편지를 받으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부모님이 우리의 결혼을 완전히 허락한 것도 아니고 자꾸 미국에 있는 의사와 선을 보라고 해서 남편과 헤어질 결심까지 했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마음은 없었고, 만약 부모님이 끝까지 반대하면 시카고 보다 더 추운 지방에 가서 혼자 살다 조용히 세상을 떠날 거라는 무슨 신파 소설의 주인공 같은 상상을 했었다. 남편도 미국에 와서 고생하는 것보다 한국에 있으면 당시 의사 신랑에게 열쇠 3개를 준다는 농담이 유행했으니 그런 조건의 사람과 결혼해서 사는 게 편할 것 같았다.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명희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감기가 걸렸는지 기침을 하며 띄엄띄엄 말하는 게 너무 가여워 눈물이 났다. “감기 걸렸어요? 밥 잘 챙겨 들고 건강 조심하세요…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잘 생각해 볼게요.”
일단 부모에게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려야 했다. 그래서 엄마가 그토록 원했던 선을 봤다. 만나자마자 상대방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상대방도 가볍게 점심 먹고 중학교 때 떠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남자는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와서 영어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부터 수학 경시대회에서 모든 상을 휩쓸고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시카고 의대에 들어간 이야기를 마치 성장기 소설처럼 말했다. 그러나 왠지 남편에 비해 말이 많고 겸손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 친구도 의대를 나와 군복무 중이라고 했더니,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 미국에서 다시 시험을 보고 의대에 들어온 학생이 있는데 영어가 서툴러 과외를 해준다고 했다. 이 사람 지금 뭘 주장하고 싶은 건가? 한국 의대생은 아무리 서울대를 나와도 언어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건가? 당연히 미국 사람보다 영어는 못할 수 있지만 의학 지식이 딸리는 건 아닌데… 그래서 남자 친구는 나보다 토플 점수도 높고 똑똑할 뿐만 아니라 성실해서 걱정하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겠지만 선을 보고 나니 남편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더 확실해졌다.
드디어 남편과 4년 만에 재회했다. 사실 1982년 2월에 25일 남편이 군의관 입대를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걸 마지막으로 보고 1984년 11월 10일 약혼식을 하러 한국에 왔기 때문에 중간에 남편을 한 번 보기는 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가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3박 4일 머무르는 동안 제대로 데이트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의 장거리 연애는 편지로만 이어졌던 거다. 1986년 3월 7일 미국 오헤어 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며 남편이 나오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은태 안경을 쓰고 백인만큼 흰 피부에 파란 양복을 입은 작은 키의 그가 커다란 검정 이민 가방 두 개를 끌고 나타났다. 남편 이외에 어느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애틋하게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지만 함께 살며 우리는 서로에게 맞추기 위해 부단히 다퉜다. 주로 나는 내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내서 남들이 보면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따라주는 남편이 모든 걸 양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남편에게 별것도 아닌 일로 화낸 게 미안해서 결과적으로 남편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확실히 부부 사이에서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보다 느긋하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유리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남편의 성격이 부러워서 따라 해 보니 좋은 점이 많았다. 우선 급하게 하다 실수하는 일이 적어졌다. 가만히 보니 남편은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을 엄격히 지키는데 그것도 따라 했더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남편에게 가장 감사한 건 그가 부모보다 더 나를 칭찬한다는 거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늘 “당신은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자신에게 맞는 배우자를 만나는 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를 남편은 왜 그렇게 좋아해 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왜 그렇게 남편의 사랑과 헌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당연한 건 없는데… 그런데 아주 운 좋게 그렇게 하며 여태까지 살았다. 60이 넘어서야 철이 들고 보니 모든 게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이제부터 남편에게 더 잘할 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난 남편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니 혹시 요즈음 젊은 사람도 상대방이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장거리 연애는 문제 될 게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