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는 왜 일만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지 모르겠다. 남성들은 회사에서 상사가 시키는 일을 하고 여성들은 집에서 시어머니가 시키는 일을 했다. 물론 집집마다 환경이 다를 수 있으니 일반화할 수 없지만 설사 회사 사장이나 전문직이라고 해도 요즈음 젊은이들처럼 시간을 내서 가족과 여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더욱이 남성과 같은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고 해도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가사 도우미가 없다면 집안일까지 하는 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때는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나온 말씀을 믿었던 것 같다. “”…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그래서 지금도 나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티브이를 본다든가 가만히 앉아 쉬면 내게 주어진 하루를 허투루 썼다는 죄의식이 든다.
이제 이번 학기만 끝나면 정년퇴직이다. 드디어 가만히 앉아만 있고 싶다면 그럴 수 있다. 가보고 싶었던 곳에 마음껏 여행도 갈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아이들 교육이 우선이라 되도록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지만 이제는 좀 더 좋은 곳에서 묶고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아끼는 게 몸에 배어서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모님은 내가 이상한 아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아직 외국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시절부터 이태리와 프링스에서 살았는데, 아무에게나 친절하고,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세일에서만 옷을 사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가까운 지인이나 친척 중에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을 많이 봤고 대학 교육까지 받았으면서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엄마를 반항심으로 은근히 비판했었다.
그래서 늘 내 밥벌이는 내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해 만 90세인 우리 엄마는 그 옛날에 유명한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집에서 가사도우미까지 두고 살림만 했다. 그리고 대학교수가 된 동기들의 직업은 인정했지만,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던 동창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일하는 것처럼 폄하했었다. 그러면서도 공무원인 우리 아버지 월급으로 원하던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서 자주 외가에서 돈을 타다 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건 엄마만의 잘못이 아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여성의 사회생활 자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품위 유지를 위해 엄마에게 요구하는 게 많았으면서도 엄마가 밖에서 일하는 건 반대했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친정에 손을 벌리는 건 모른 척했다.
그랬던 엄마가 43년 전 미국에 이민 가자마자 취직을 했다. 그것도 지구본을 만드는 공장에. 그 후 엄마는 세탁소를 10년간 운영했고 마트에서도 일하고 백화점에서도 일했다. 한국에서 누구나 아는 대학을 나와 외교관 부인으로 여러 나라에 살았던 엄마가 미국에 가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이민 간 지 7년 만에 엄마는 좋은 동네에 원하던 저택을 지었다. 엄마는 지금도 그 집에서 산다. 4400 제곱피트(약 123평) 되는 넓은 집이어서 유지비가 많이 들어 작은 집으로 옮기라고 몇 번 제안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아버지가 주식을 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해서 팔라고 해도 팔지 않았다. 덕분에 아버지는 적당히 주식으로 돈을 잃었고 엄마는 그 집에서 행복하다. 지금은 엄마가 그 집을 팔지 않은 게 옳은 판단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에게 집은 남편이고 자식이다. 주택 담보로 생활비도 넉넉하고 세금도 적게 낸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엄마는 그 집에 사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딸아, 엄마는 솔직히 여기서 100살까지 살고 싶어.” “더 살 수도 있어요. 그러니 천천히 매일 걷는 연습 잊지 마세요.”
나에게 엄마의 집 같은 존재가 있나? 나도 내 작은 아파트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기서 영어나 프랑스어 공부하고, 글 쓰고, 책 읽고,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티브이 보고, 아파트 뒤 공원에 산책 가고… 그러나 나는 우리 엄마와 다르게 집 밖으로 가보고 싶은 나라가 많다. 혼자서 낯선 곳에서 잠시 살아보고도 싶다. 은퇴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아무래도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다 보니 실질적으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아무리 남편이 독립적인 사람이고 일이 취미인 사람이어서 내가 특별히 식사 준비를 해주지 않아도 되고 아무리 아이들이 분가했어도 손주들을 돌봐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에 나왔던 줄리아 로버츠처럼 마음대로 어디로 훌쩍 떠날 수 없다. 하지만 한 일 년 정도 혼자서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
어디가 좋을까? 카프리 섬? 1935년 윌리엄 섬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이 쓴 단편 <<연꽃 먹는 사람(The Lotus Eater)>>을 보면 17세부터 일을 시작해서 35살에 조기 은퇴한 윌슨이란 영국 사람이 나온다. 그는 소위 요새 사람들이 선망하는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ly)이다. 평범한 은행 관리자였다. 일이 힘들거나 싫어서 파이어족이 된 건 아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것도 아니다. 이 점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파이어족과 거리가 있다. 그저 아내와 딸이 사망하고 생전 처음 해외여행을 간 곳이 이태리였는데 나폴리에 갔다가 카프리 섬에 일주일 머물렀던 게 인생을 바꿔버렸다. 계곡에서 목욕하고, 포도원 언덕을 걷고, 달과 바다를 보고, 일을 마친 사람들이 저녁에 피아자에 모여 수다를 떨고… 갑자기 그곳이 너무 좋아 은퇴 후가 아니라 아직 젊을 때 거기서 사는 게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남들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엉뚱하게 그는 즐겨 읽던 역사책 속에서 답을 발견했다. 두 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한 도시는 열심히 일하고 다른 도시는 놀고먹기만 했다. 근면하게 일했던 도시가 즐겁게 사는 도시를 정복해서 즐겁게 놀던 도시는 흔적이 사라졌다. 그러나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 근면하게 일하던 도시도 정복해서 결국 근면한 도시도 기둥 하나만 남고 망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결국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남는 건 없다는 걸까? 일 년을 고민한 끝에 조기 은퇴 상금과 집 판 돈과 저축을 해지해서 25년 짜기 연금을 구매하여 카프리 섬에 정착했다. 1930년대 남성은 50대에 많이 사망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58.1세) 60세까지 연금을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행복해서 그랬을까? 60세가 넘어서도 죽지 않았다.
카프리 섬에서의 생활은 소박했다. 농장 주택을 임대해서 살았는데 침실은 수도승의 방 같았고, 작은 부엌에는 장작이 쌓여 있고. 거실에는 영국에서 가져온 안락한 의자 두 개와 책상 그리고 작은 피아노와 책이 많았다. 주인집 아내가 매일 청소와 음식을 해줘서 그는 가사 일도 하지 않았다. 건반을 두드리는 게 즐거웠고, 책을 읽는 게 즐거웠고, 많이 걷고, 수영하고 해가 지는 광경을 보는 게 황홀했고 간간히 이웃이 초대하는 파티에 갔다. 그러나 60세가 넘어 연금이 떨어지자 생활은 비참 해졌다. 영국에 있는 친척이 재산을 남겨준 게 있다며 사람들에게 돈을 꾸고 집주인도 그동안 성실히 집세를 낸 신용을 감안하여 일 년을 더 살게 해 줬지만 결국 쫓겨나게 되자 목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했다. 살아났지만 정신이 이상해지고, 겨우 집주인 아내의 도움으로 헛간에 머물게 됐다. 남편은 못마땅했다.
남편은 윌슨에게 물을 길어오게 하고 외양간을 치우게 했다. 나머지 시간에 윌슨은 산을 돌아다니다 사람을 보면 짐승처럼 도망쳤다. 그렇게 6년을 살고 어느 날 아침 그가 늘 달밤에 황홀하게 바라보던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파라글리오니(Faraglioni)를 볼 수 있는 산비탈에서 잠든 것처럼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과연 윌슨은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살았던 건가? 60세까지는 분명히 행복했을 거다. 카프리 섬에 들어온 지 15년 됐을 때 그는 자신의 선택에 일말의 후회도 없고 지금까지 누린 행복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지막 6년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은 게 안타깝다. 너무 일찍 은퇴하여 25년간 편하게 산 게 문제였을까?
작가는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문제를 피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자신의 문제라면 정면 도전해야 한다. 윌슨은 분명 59세 정도 됐을 때 자신이 60세 넘게 살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거다. 아니 훨씬 전부터 그렇게 느꼈을 거다. 그러면 연금이 끊길 걸 대비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했는데 하도 편하게만 지내서 문제 해결 방법을 생각하기 귀찮아 미룬 것 같다. 처음엔 윌슨이 한국 티브이에 나오는 “자연인”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자연인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모든 걸 자급자족하며 사는데 윌슨은 연금에만 의지해서 집안일이나 식사조차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위도식한 거다. 그가 아무리 소박하게 살았다고 해도 혼자서 단독 주택에 가사도우미까지 두고 산 셈이다. 나라면 50세부터 더 아꼈을 거다. 그의 말 대로 15년 충분히 편하고 행복했으니 나머지 10년은 새로운 방법으로 사는 도전을 했으면 그의 말로는 달랐을 거다. 나라면 방 한 칸으로 이사해서 스스로 청소도 하고 식사도 만들고… 그러면 나중에 갚지도 못할 돈을 꾸거나 걸인처럼 살지 않아도 됐을 거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 일 년 살아볼까? 카프리는 그냥 한 번 구경이나 가보고 프랑스어 연습을 하러 프랑스에 갈까? 일 년은 너무 길고 한 반년만 살아보고 좋으면 좀 더 있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그리스 신화에 “연꽃 먹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지? 신화에 나온 연꽃은 마치 마약 같아서 연꽃을 먹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집을 잊고 연꽃 먹는 사람과만 지내고 싶어 진다는데…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도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이 고향인 이타카로 항해하던 중 북풍을 맞아 진로를 이탈하여 연꽃 먹는 사람들의 섬에 도착하는데 몇몇 부하들이 연꽃 음식을 먹고 섬에 남으려고 하자 오디세우스가 강제로 배에 태웠단다. 그래서 “연꽃을 먹는 사람”은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사치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윌슨이 연꽃 먹는 사람인 게 사실이지만 왠지 가엽기도 하다. 그냥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았을 뿐인데…
한국에서는 연 잎 밥도 먹고 연근도 먹고 연꽃도 먹지만 건강식이고 전혀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는데 서양인은 왜 연꽃을 그렇게 이상한 꽃으로 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작은 내 아파트가 좋아서 다른 어떤 나라에 가서 살아도 한국에 다시 돌아와 살 것 같다. 미국은 여름에 동부에서 서부로 자동차 여행을 갔던 기억이나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가끔 그리울 때가 있지만, 솔직히 지금은 총기 사고가 너무 많이 발생하는 게 무섭다. 유럽은 정교하고 웅장한 건물이 멋있고 한국의 자연과 달라서 새로운 걸 봤을 때 느끼는 신선한 매력이 있긴 하지만, 보고 싶을 때 가서 보면 되지 매일 그것만 보고 싶을 정도로 끌리진 않는다. 그러니 나는 아무래도 소음과 공해가 좀 있어도 지하철이 바로 코 앞에 있는 작은 내 아파트에 사는 게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할 것 같다.
<참고자료>
file:///C:/Users/myunghee/OneDrive/Desktop/maugham_somerset_sixtyfive_short_stories.pdf
https://en.wikipedia.org/wiki/Lotus-ea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