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에 대하여>>와 <<에피소드 [붉은 머리의 남자]>>
모든 사람이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순수한 마음으로 결혼해서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았을 거다. 그러나 나만 봐도 때로 변덕스러운 마음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어렵다. 이렇게 사람의 다양한 기질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을 불러일으키고 작가의 상상을 더해 소설이 되기도 한다. 소설은 뉴스처럼 사람의 이목을 단숨에 끌기 위해 평탄한 삶을 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그래도 옛날 한국 연속극처럼 엔딩은 행복해 보이는 게 좋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좋다. 적어도 그녀의 소설은 주인공이나 주변 사람에게 문제가 생겨도 시간이 지나며 해결되고, 성격이 좋지 않거나 남을 속이는 사람만 나쁜 결말을 맺는 권선징악의 교훈이 개운하다. 그러나 더 많은 소설은 독자에게 알아서 상상하라고 결론이 애매한 게 많다. 특히 100개가 넘는 단편을 쓴 윌리엄 서미싯 몸의 소설에 나오는 남녀는 현재에도 어딘가 살고 있을 법한 사람이지만 안타까운 결말이 많다. 본디 사람이 복잡한 존재인 걸 어쩌겠나? 앞으로 소개할 두 작품 중 하나는 내 스타일이고 다른 하나는 뉴스 같다.
첫 번째 이야기는 1899년에 쓴 <<우정에 대하여(De Amicitia)>>라는 작품인데 이 제목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기원전 44년에 쓴 우정(아미시티아)에 관한 논문 제목에서 따온 것 같다. 원래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는 저명한 인물들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써졌는데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삶에서 명예, 순수함, 형평성, 관대한 행동을 실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탐욕, 정욕, 폭력이 없으며, 신념에 대한 용기가 있는 사람을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윌리엄의 단편도 선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다만 동성 간의 우정이 아니라 이성의 우정이다.
내용은 이렇다. 남녀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미국인 처녀 발렌시아(Valentia)와 영국인 청년 페르디난드(Ferdinand)가 파리에서 만난다. 화가인 처녀와 시인인 청년은 함께 연극을 보고 박물관에 가고 철학과 예술과 윤리를 논하고 저녁에 산책을 하며 여자는 남자를 그려준다. 프랑스 친구들은 이들이 서로를 육체적으로 갈망하지 않는 게 어리석다고 한다. 프랑스 친구는 “젊은 날은 길지 않다. 살아보니 유혹에 굴복한 것보다 저항한 게 후회됐다”이라고. 남자는 여자가 워낙 친구로 남기를 원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자가 자신의 초상화를 완성하자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여자는 우정을 깨지 말자고 하지만 남자는 전처럼 지낼 수 없다. 여자도 남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두려워 운하에 뛰어내릴 거라고 한다. 남자도 동참하겠다고 한다. 이건 좀 과장된 것 같지만 예전에 이런 일이 가끔 있긴 했다. 다행히 그들은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림과 책을 던져버리고 초원에서 풀을 먹는 소를 본다. 농부가 소를 데려가 젖을 짠다. 일이 끝나자 소는 다시 초원에 돌아가 풀을 먹는다. 남자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렇게 함께 있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좋다. 남자가 몸을 굽혀 여자의 손에 입을 맞추자 여자가 그를 올려 입맞춤한다.
사람 사는 게 뭐 대단히 특별한가? 아무리 고상한 문화를 즐기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예술과 철학에 대해 침 튀기며 토론하다가도 배가 고프면 소처럼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어야 하고 화장실에 가야 하고 남녀가 서로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면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키케로가 말한 선한 사람 사이의 우정의 예를 몸의 단편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한 예와 달리, 외모에 반해 황당한 결말을 맺은 <<에피소드 [붉은 머리의 남자](Episode [The Man with Red Hair])>>는 케이트 쇼팽의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보다 더 쇼킹하다. 1946년에 쓴 이 작품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잘하는 네드 플레스톤(Ned Preston)이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함께 모인 사람에게 들려주는 얘기다. 네드는 폐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지만 사회 활동을 하고 싶어서 감옥에서 죄수와 대화하는 봉사활동을 한다. 그리고 사기죄로 구금된 프레드 맨슨(Fred Manson)이란 집배원을 만난다.
프레드는 체격이 좋고 큰 키에 푸른 눈과 호감이 가는 인상이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숯이 많고 살짝 웨이브진 윤기 나는 붉은 머리다. 누구나 그와 마주치면 그의 머리를 다시 보기 위해 뒤돌아볼 정도다. 어느 날 대학생 그레이시(Gracie)는 집 근처에서 집배원이 우편물을 배달하고 수거하고 있을 때 그녀의 편지를 부쳐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그와 대면한다. 처음에 고자세였던 그레이시는 프레드가 집배원 모자를 벗고 윤기 나는 붉은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자 숨이 막힐 정도로 반해버린다. 이 장면은 무슨 샴푸 선전을 연상케 해서 절로 웃음이 난다. “어디서 파마했어요?” "원하신다면 언젠가 보여 드리죠. ("I'll show you one of these days if you like.") 이렇게 이 둘의 데이트가 시작됐다.
프레드는 그레이시와 영화를 보러 가서 그녀에게 스킨십을 시도했지만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프레드는 여태까지 그레이시처럼 고상하고 절제된 여성을 만난 적이 없어서 그녀를 더 갈망한다. 만남이 반복되자 그녀는 손잡는 걸 허락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부모에게 데리고 간다. 한편 그레이시의 부모는 외동딸의 선택에 충격을 받는다. 부모는 딸이 가문 있는 집안의 신사와 결혼하길 희망했다. 대학생인 딸의 상대가 겨우 집배원이라니! 사실 그레이시의 부모도 둘 다 노동자였다. 엄마는 부잣집에서 일하는 하인이었는데 주인이 사망하며 재산을 남겨줘서 그 자금으로 아버지가 포목상을 잘 운영하여 번화가에서 직원을 4명이나 두는 부자가 됐다. 엄마는 눈물로 딸을 만류하고, 딸은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원한다. 할 수 없이 부모는 프레드를 만난다.
부모는 프레드가 인상도 좋고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눈치여서 교재를 허락하지만, 결혼은 대학을 졸업하고 하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며 은근히 딸이 마음이 바뀌길 바란다. 그러나 주말마다 프레드와 식사를 하며 부모도 프레드가 좋아져서 그레이시와 프레드는 미래를 꿈꾸며 행복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프레드가 편지에 넣은 수표와 돈을 갈취한 혐의로 검거됐다. 그레이시를 멋진 승용차에 태워 영화도 보고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기 위해 범행을 했다고 자백했다.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난 기사를 보고 부모는 더 이상 프레드를 만나지 말라고 한다. 그레이시는 2년 형을 받은 프레드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한다. 아버지는 너무 화가 나서 딸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딸은 부모 몰래 가출한다. 당시 중산층 여성이 백화점에서 일하는 건 흉이 되던 시절이었는데 그레이시는 백화점에 취직하고 함께 일하는 여성과 룸메이트가 된다. 한편, 프레드는 네드에게 자신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하소연한다. 그레이시의 부모에게 자신도 신사 못지않게 그레이시를 좋은 곳에 데려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단다. 게다가 편지 안에 돈을 넣으면 잃어버릴 수 있는데 그걸 한 사람이 어리석은 거지 자신이 돈을 훔친 게 잘못이 아니라는 투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그레이시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거였다. 프레드의 부탁을 받고 네드는 그레이시를 만나러 간다.
네드는 그레이시에게 프레드의 말을 전한다. “그가 정말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신이 그를 버릴 것인지 여부입니다. (What he wants to know really is if you're going to chuck him.)” 프레드가 자신을 사랑하는 한 아무 문제가 없으며, 20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고 한다. 그 후 그레이시는 한 달에 한 번 프레드를 면회하러 가지만 유리 칸막이 너머로 손조차 잡아볼 수 없는 게 괴로워 둘은 면회를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행히 프레드는 모범수로 형량을 감량받아 6개월 후면 풀려나게 된다. 그레이시는 끼니까지 거르며 월급을 모아 프레드와 함께 살 방 두 칸을 얻는다. 네드는 그레이시와 프레드 사이에서 열정과 사랑이 담긴 메시지를 전달한다. 프레드가 출소하면 런던에 있는 회사 수위로 일하게 될 거고, 그레이시는 곧바로 결혼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다.
그런데 네드가 지병으로 3주간 감옥에 면회를 가지 못하는 사이 두 사람 사이에 기류가 변한다. 정확히 말하면 프레드가 변한다. 앞으로 2주 후면 프레드는 석방하는데, 다시 만난 프레드는 전처럼 상냥하고 예의 바르지 않다. 네드에게 그레이시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전달해 달라고 한다. 아니, 왜? 그는 18개월 동안 감옥에서 끊임없이 그레이시를 상상해서 그녀에게 싫증이 났다고 했다. 마치 그녀가 레몬즙을 다 짠 레몬껍질 같단다. 네드는 프레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녀를 실제로 만나면 다를 거라고 설득하고 논쟁도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네드는 그레이시에게 프레드의 의사를 전달하고, 그녀는 차분히 그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는 것밖에 없겠군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
프레드가 사이코패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간다. 그런 사기꾼에게 속아서 마음을 빼앗긴 건 그레이시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결혼하지 않게 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죽기는 왜 죽나? 순수하고 고운 그레이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너무 안타깝다. 부모에게 돌아갔다면 분명 모든 걸 용서하고 정말 좋은 사람 만나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가 못한다면 어머니라도 가끔 그레이시를 찾아가 보고 식사라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겨우 18개월 보지 못했다고 여자친구를 레몬 껍질로 비유하는 남자라면 같이 살아도 오래가지 못했을 거다. 아무래도 프레드는 그레이시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것 같다. 그런데 그레이시가 부모와 의절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그레이시가 레몬 껍질로 보였나? 아마도 그는 수위로 일하며 또 다른 그레이시에게 빨간 머리로 유혹할 상상을 해서 그레이시를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페르디난드와 프레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프레드가 정직하지 않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거다. 배가 고파 죽을 정도로 가난해서 빵을 훔쳤다면 이해가 가지만 데이트 비용 때문에 남의 돈을 스스럼없이 훔친 사람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게다가 자기가 그레이시에게 차이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했으면서도 막상 그레이시에게 이별 통보를 하면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페르디난드는 발렌시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발렌시아가 당황하자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페르디난드도 그녀를 보면서 친구로만 있는 게 힘들어 조금 떨어진 도시로 떠난다. 그러나 안 보는 게 더 힘들어 돌아온다. 드디어 발렌시아도 페르디난드를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프레드 그레이시 커플과 달리 서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러나 프레드와 그레이시는 신체적 접촉 없이 서로를 보는 게 너무 힘들어 면회를 중단했다. 그레이시가 계속 면회를 갔다면 이들의 사이가 달라졌을까? 아니다. 프레드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