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나도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스피노자가 한 말이라고 알려줬다. 수업 시간에 들은 다른 이야기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이 말만 두고두고 생각나서 내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왜 이 말에 꽂혔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지 모른다. 집안도 시끄럽고 세상도 소란하고 남 눈치 보며 조용히 살아야 했지만 나는 사과나무를 심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과도 먹고 다른 사람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종말이 온다면 아무도 먹을 수 없는데 그렇게 이성적인 판단보다 동화 같은 상상을 하며 미래를 꿈꾸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종말이 오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사과나무 이야기는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었다. 누가 말했으면 어떤가? 중요한 건 내가 그 말에 의미를 두었다는 거다. 그래서 사과가 어떻게 열리는지도 알아봤고 스피노자도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갖게 됐다.
사과는 의외로 기르기 힘든 과일이었다. 맛있는 건 곤충도 좋아해서 온전한 사과를 재배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8000년 전부터 사과를 먹었다고 하니 지금처럼 예쁘고 맛있는 사과는 아니어도 내버려 둬도 잘 자라는 사과는 오래전부터 있었나 보다. 어릴 때부터 사과를 좋아하고 많이 먹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과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과 재배 영상을 찾아보니 씨에서 사과를 얻으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씨를 말려서 그냥 땅에 심을 수도 있고 물을 뿌린 종이타월에 넣어 냉장고에서 3주 정도 넣어두었다가 싹이 트면 싹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에 심어줬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확률이 낮고 곤충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해서 원래 씨앗을 가져온 부모 사과와 맛이 전혀 다르단다. 따라서 과수원에서는 접목을 통해 원하는 맛의 사과나무를 재배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사과나무는 적어도 두 그루가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사과는 자기 혼자서 수분을 할 수 없어서 다른 품종의 사과나무가 필요하다. 벌도 필수다. 벌이 바쁘게 두 나무를 왔다 갔다 해서 꽃가루를 옮겨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상하다. 외가댁 마당에 있던 나무는 한 그루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웃집에 사과나무가 있었나? 꽃이 지면 자두보다 좀 큰 사과가 열렸다. 시큼했지만 맛있었다.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고 했지만 사촌들과 종종 따 먹었던 기억이 난다. 사과나무는 연탄이 잔뜩 쟁여있던 하늘색 문 창고 앞에 우뚝 서있었다. 외가댁은 한 울타리 안에 집이 두 채나 있는 넓은 곳이었다. 일을 도와주는 사람 외에 다른 가족은 살지 않았다. 한 채는 이층 집이고 다른 한 채는 단층집이었다. 아래층은 온돌인데 이층은 다다미가 깔린 방이 세 개나 있었다. 그 방에서 사과나무를 봐도 나무 가지가 위로 더 뻗어 있었다. 사과나무 때문에 벌레가 많이 꼬인다고 베어버린다는 말도 이었지만 외가댁이 정릉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사과나무는 건재했다. 이제 보니 외가댁에 있던 사과나무는 돌능금 나무였던 것 같다. 열매를 맺는데 적어도 5년이 걸린다고 하니 내가 봤을 때는 족히 10년은 넘었을 거다. 언젠가 외할아버지가 15년이 되었다고 말한 것도 같다. 아쉽게도 사과나무의 수명은 40에서 6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없을 거다. 아니다. 미국 워싱턴주에 있던 사과나무는 1826년에 심어져 무려 194년을 살았다고 하니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
생명은 모두 오래 살려는 자기 보존 의지가 있다고 스피노자가 말했다. 따라서 자신이 오래 살 수 있는 이로운 것엔 끌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피한다. 너무 당연한 말 같은데 제대로 들여다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다. 우선 우리는 자기중심적이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좋은지 안 좋은지 아름다운지 아닌지 현명한 건지 아닌지 등을 판단할 때 실제로 그 사물이나 사건의 특성을 개관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따라 특성을 결정한다. 그래서 모든 건 상대적이다. 아무것도 좋고 나쁜 건 없고 영향을 주고받는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에서 만난 호랑이는 우리를 해칠 수 있으니 나쁜 동물이고 피해야 한다. 그러나 호랑이 사냥꾼은 호랑이를 덕분에 밥을 먹고살 수 있으니 호랑이를 찾으러 다닐 거다. 우리는 각자의 입장에서 우리가 더 오래 살 수 있는 결과에 따라 사물을 판단한다.
또, 어떤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서 다리를 잃고 호랑이를 잡겠다는 복수심으로 가득 찼다고 치자. 그래서 그 사람이 만사를 제쳐두고 호랑이만 쫓아다닌다면 그게 제대로 사는 삶일까? 사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내게 일어난 일로 인한 감정에만 집착하다 보면 감정의 노예가 되어 제대로 살 수 없을 거다. 그래서 중요한 건 우리가 하는 일에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는 거다. 호랑이는 본래 배 고프면 사람을 잡아먹을 수도 있게 태어났다. 그래서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었다면 그건 호랑이 잘못일까? 사람이 호랑이를 만나지 않도록 주의했어야 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길은 가지 말아야 하고 꼭 가야 한다면 호랑이 사냥꾼을 고용해서 가야 했을 거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오래 보존하려면 주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우리가 오래 잘 살려면 주위에 좋은 기운을 주는 걸로 채워야 한다. 그러려면 나쁜 감정에도 휩싸이지 말고 자유로워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해는 자유의 열쇠"라고 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방황한다. 그와 같은 감정은 외부 요인에 의해 좌우되고 우리는 결과와 운명을 알지 못하며 이리저리 흔들린다. 감정과 열정은 수동적이다. 마치 바람에 꽃잎이 흔들리거나 태풍에 지붕이 날아가듯이 외부 요인에 의해 우리의 감정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과 주장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은 기분에 따라 잘 알지 못하고 행동하게 된다. 티브이에서 먹는 장면을 보면 먹고 싶어서 야식을 시킨다. 남들이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말을 듣고 주식을 사면 금방이라도 큰돈을 벌 것 같아 무리하게 산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종종 잘못되었다는 걸 알 거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주변 사물 간의 관계의 원인과 결과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미래에 미칠 영향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 자신에게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우연히 생긴 일은 없고 이유와 결과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원인과 결과를 잘 살펴야 한다. 오프라 윈프리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질문한다는 "왜 지금 이 일이 내게 생겼을까?"를 자문하며 자신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혼란의 숲을 빠져나와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 -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외부적인 원인에서 분리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다면 어떤 한 개인이나 사물이나 생각에 부정적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있다. 전문가의 말을 믿고 주식에 투자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고 치자. 모든 책임을 전문가에게 지우고 원망하고 싶겠지만 잘 생각하면 자신에게 분명한 허점이 있다는 걸 알 거다. 자신이 알아보지 않고 남의 말을 너무 믿은 것, 쉽게 돈을 벌려는 욕심 등... 이런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삶에 도움이 되는 좋은 생각을 묵상하며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과 지내야 한다. 나태한 사람끼리 모여서 "나도 그래."라고 서로 사는 모습이 비슷하여 괜찮다고 위로한다면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늘 나태한 상태로 남아있는 자신에게 실망할 거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잘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무엇이 있나? 그리고 그걸 모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사과나무가 혼자서 수분을 할 수 없듯이 사람이 잘 사는 것도 혼자서 할 수 없다. 자연도 필요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다. 그래서 자연과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 게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요즈음엔 평화를 찾기가 힘들다. 모두 큰 소리를 내며 자기주장만 하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냥 소란스럽기만 하다. 이런 부정적인 기운은 분명 인간 보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과 가치가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 건 참 힘들다. 스웨덴과 이태리에서 극우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 러시아는 계속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계속할 것 같고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가 자국만 살겠다는 정책을 펴고 있다. 모든 나라가 양당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반인도 그렇게 나뉘었다. 감정에 휩싸인 시대에서 본질을 보는 리더가 없다. 평화를 운운하는 건 구시대의 유물인가? 그러나 모두 잘 살려면 그 힘든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의 종말은 우리가 자초할 것 같다. 우리 후손이 계속 자기 보존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 나는 어떤 사과나무를 심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