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저 숱도 하나도 없는 게...
남편이 거실 책장에 놓인 가족사진을 보며 말했다. 아들 백일 때 찍은 가족사진. 딸은 남편 무릎에 앉아 있고 아들은 내 무릎에 앉아 있다.
맞아요. 그래서 지금 헤어 캐어에 신경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조그만 게 말도 안 들었잖아.
어릴 때 말 안 들은 적은 없었는데…
아냐 당신 없으면 울고 난리 났었어.
내 옆에 졸졸 쫓아다니기는 했죠. 초등학교 이 학년 땐가? 한 번은 애완견 샵 앞에 아이들이 잔뜩 모여 구경을 하는 걸 보고 우리 아이들도 합류했어요. “이제 그만 가자” 고 하자 D는 곧바로 내 옆에 왔는데 H는 넋을 놓고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약 올리려고 슬쩍 모퉁이로 돌아가 숨었죠. 그런데 잠시 후 누나도 없고 엄마도 없다는 걸 알고 얼굴이 일그러져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어요. “엄마 여기 있어.”라고 했더니 단숨에 달려와 울면서 화를 내더라고요. 정말 겁보였는데... 지금은 용 됐죠.
그랬어? 근데 이 녀석이 왜 전화를 안 해?
바쁜가 보죠. 문자 넣어요. 전화하라고.
귀찮아.
그럼 내가 넣어줄게요.
이른 아침 메시지가 도착했다.
요새 스케줄이 장난이 아니에요. 토요일 저녁에 계속 당직이에요. 잘 지내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 녀석 병원 일 혼자서 다하는 것처럼 당신한테 허풍 떠네.
그러게요. 일은 당신이 훨씬 더 많이 하는데… 잘 있으면 된 거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페이스타임을 해도 몇 마디 하지도 않으면서 뭐 한 주 안 했다고 그렇게 기다려요
요새 달러가 많이 올라서 H가 효도한 거야.
그래요? 전에는 걔한테 쓴 학비로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다고 했으면서…
나중에 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빠는 H를 엄청 사랑하는 것 같아요. 달러가 쌀 때 공부한 걸 효자라고 생각하시는 걸 보면. H도 아빠를 무척 좋아하지만 아빠도 만만치 않아요.
아빠는 H뿐만 아니라 너도 매우 사랑하잖아. 네가 W를 사랑하듯이.
제가 부모가 되고 나니 아이를 학대하는 사람을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제정신이 아닌 거지. 거미도 제 새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 그게 본능인데… 그렇지 않다면 뭔가 돌연변이가 일어난 거겠지. 사회가 팍팍해지다 보니 사람들 정서가 메마른 것 같아. 옛날에도 힘든 시절은 늘 있었는데. 지금처럼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가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한국만 그런 건 아니지만 한국이 유독 심한 것 같아. 아무래도 너무 경쟁이 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아이 키우며 일하는 게 힘들어요.
힘들지. 그러나 아이는 너만 바라보고 있잖니. 잘 먹여야 한다. 어릴 때 잘 먹여야 커서도 건강하다.
전 최선을 다해요.
알아. 그래도 시켜만 먹지 말고 국은 집에서 끓여 먹어라. 배달 음식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서 몸에도 안 좋고 환경에도 안 좋은데…
알았어요.
생각해보니 남편은 아들이 학업으로 인해 가장 힘들어할 때 매주 한 시간 가까이 많은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러나 모든 게 안정되고 남편 통화는 짧아졌다. 이제 아들은 여자 친구도 생기고 일도 바빠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연락이 오지만 영상통화 시간은 여전히 한 시간이 넘는다. 안부를 묻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데 아들은 친척 안부도 묻고 한국 뉴스도 물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게 긴 통화를 끝내면 안심이 된다. 한국에 있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살벌한 뉴욕에 살고 있는 게 늘 불안하다. 이제 비싼 등록금 보낼 일이 없어 다행이지만 아파트 렌트비가 많이 오를 수 있다니 걱정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건 아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여보 당신은 여태까지 언제가 가장 좋았어요?
지금. 지금이 좋아. 나는 항상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가 좋아.
나도 그래요. 지금이 좋네요. 그러나 난 당신하고 조금 달라요. 난 그냥 아이들이 다 커서 내가 돌봐주지 않아도 돼서... 이제는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자기 할 일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금이 좋아요... 이렇게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지금이 좋아요.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목이 너무 아파요. WJ도 여전히 코가 줄줄 나오고.
병원 갔다 왔어?
네, 그저께요. 그런데 더 나빠진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 일요일이라 병원이 안 여는데 응급실에 갈까요?
아빠가 들릴게. 네 신랑에게 공기청정기 청소하라고 해라. 아빠도 매달 한 두 번 청소한다. 너도 WJ도 모두 알레르기가 심하니까 집에서 절대 향기 나는 것 쓰지 마라. 아빠도 민감해서 너도 그럴 거다.
남편은 서둘러 병원에 나간다. 환자를 보고 와서 딸네 갈 거니까 준비하라고 했다. 운전해서 한 시간이 넘게 가야 한다. 지난주에도 손주가 아프다고 해서 일을 마치고 딸네 들렸었다. 사위는 지방에 있고 딸은 우리 집과 멀어서 누군가 아플 때 가장 힘들다. 나는 전철로 1시간 반. 남편은 강남을 빠져나오는데 한 시간이 걸려 2시간 반이 걸려 딸네 도착했다. 아이들을 보고 다시 집에 오니 11시. 몸은 좀 피곤했지만 아이들을 보고 오니 안심되었다. 오늘도 딸에게 갔다 줄 물건을 챙긴다. 딸이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 걱정은 계속될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이 좋다. 아직은 이렇게 챙겨줄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