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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보이 Jun 19. 2024

속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을 때,

감정 쓰기 혹은 털어내기.  

내가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 하는 상대는 남편이 유일하다.

부모님은 걱정하실까봐, 형제자매는 결국 그쪽이 알면 부모님도 알게 되는 거니까, 친구는 솔직히 없다.

밥 먹고 쇼핑 하고, 남부끄럽긴 해도(알고보면 나 행복해요)같은 이야기를 주책맞게 떠들어 댈 친구는 몇 명 있지만, 진짜 아프고 힘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없다.     

아니 예전엔 있었다.

부끄러운 연애사도 속 답답한 일 이야기도 가리거나 각색하지 않고 털어놓던 친구가 있긴 했다.

그런데 뭔가의 이유로 (지금도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끊겼고, 그녀와 내가 서로의 근황조차 모르고 지낸지도 벌써 5년이 됐다.

그 사이 그녀 대신 나의 속내를 고스란히 다 받아내고 풀어주던 상대는 유일하게 남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의 일로 속이 상할 때다.

오늘 아침도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속이 상하고 심란해서, 까맣게 타 들어가는 속을 한시라도 빨리 어디다 꺼내놓지 않으면 곧 죽겠다 싶었는데...

산책을 할까, 런닝머신을 뛸까, 그것도 아니면 쇼핑몰에 가 시간을 보낼까.

이런저런 감정들을 애써 누르고 다스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아니 어떻게 넘길까) 궁리를 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게 <감정 쓰기>다.  

때마침 어제인가 나는 무심코 클릭해 본 인터넷 기사에서 모델 장윤주의 <감정 쓰기>를 접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땐 어떻게 푸세요?"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럴 땐 마음 속의 감정들을 기록하면서 하나하나 들여다봐요. 그러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려요."라고 답했던 그녀.

그래서 일단 나는 노트북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북까페에 자리를 잡았다.

해봐도 풀리지 않으면 그때 돼서 산책이나 쇼핑을 가도 늦지 않으니, 그 전에 먼저 나의 <감정 쓰기>부터 해보기로 했는데…


-현재 우리 부부의 상황.

왕복 서너 시간의 출퇴근으로 점점 더 우울감이 심해지고 있는 남편과 그걸 지켜보는 불안한 나.

나는 아침 6:15분에 알람을 듣고 기상을 해 남편을 깨우지만, 남편은 그 뒤로도 3,40분을 뒤척여야 겨우 일어나고, 씻고 준비하고 부랴부랴 7:50분이 넘어서야 집을 나선다.

최소 1시간 반에서 길게는 2시간까지도 걸리는 출근이므로 매일 지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퇴근도 마찬가지. 6시가 넘어 정시 퇴근을 해도 집에 오면 8시. 간단하게 챙겨주는 걸 먹고 쓰러지듯 씻지도 않고 자는 날이 부쩍 잦아졌다.



-현재 나의 감정 상태.

남편이 안쓰럽고 남편에게 미안하다가도, 그의 반복되는 우울감 표현에 나 역시 지치고 힘들다.

솔직히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나약하면서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내심 한다.

상황을 개선시켜 보려는 스스로의 노력을 딱히 하지 않는 것도 답답하다. (출근 시간을 앞당겨 본다던지, 집 가까운 곳에 이직을 추진해 본다던지 등등).

그런데 생각해보면 또, 그런 시도조차 못한다는 게 더 심각한 상태는 아닐까 다시 걱정이 된다.

어떻게 해줘야 할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뭘지 나 역시 잘 몰라서 속만 끓고 발만 동동거리는 요즘이다.


-현재 (내가 짐작해보는) 남편의 감정 상태.

힘들고, 힘들고, 또 힘들지만... 대안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게 심적으로 더 힘들다.

가장이니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한 번씩 왜 나만 고생일까 억울하기도 하다.

맞벌이라도 해서 절대적이고 절실한 느낌의 가장에서 벗어나게 해주던지, 그렇게 못하면 운전이라도 배워 역까지만 데려다주면 좋을텐데, 그걸 안하는 아내도 원망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내색하거나 풀어내지도 못하니, 우울감만 더 심해진다.  

그런데 그걸로 아내를 걱정시키는 건 또 싫다.


-이런저런 부유하는 생각들.

그럼 우리는 현재 행복한 부부일까 아닐까? 우리는 심각할까 아닐까?

출퇴근에 힘들어 하고 우울해 하는 날이 매일은 아니지만, 그 빈도가 점점 잦고 주기도 짧아지는 건 사실이다.

보통은 평일에 한 두번 이런 증상이 나오고, 주말은 평소처럼 웃고 떠들면서 잘 지낸다. 그런데 이게 반복이라는 게 문제. 해결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반복될 수 있다는 게 나의 걱정인데...


-그리고 나름의 갈무리.

앉아서 하는 걱정은 사실 답이 없다.

남편도 나도 나서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러나 노력은 각자가 할 일이다.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아내가 남편의 일을, 남편이 아내의 일(해결)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남편의 짐을 좀 덜어주고자 내가 맞벌이를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질 순 있겠지만, 그것이 그가 처한 상황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 거다.

나는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바로 서기 위해 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남편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은 그냥 지켜봐 주는 거다.  

불안해 보이거나 안달나 보이는 시선이 아닌, 나부터 바로 선 상태에서 지금보다 조금 더 관대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봐주는 일.  그리고 그가 전처럼, 혹은 나처럼 바로 서기를 기다려주는 일. 그거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오 신기하게도 마음이 좀 편안해지면서 흐리고 뿌옇기만 했던 시야가 좀 밝아진 느낌이다.

이것이 장윤주, 그녀가 말했던 <감정 쓰기>의 효과일까.


일단 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서 도전해 보려고 한다.

앞날의 대한 걱정보다 중요한 건 눈 앞에 주어진 하루. 이 하루를 어떻게 차근차근 채우고 쌓아 나아가느냐에 따라 앞날이 결정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조해 하지 말고, 기다림과 꾸준함을 믿자.

나를 믿고 그를 믿고, 우리의 앞날도 무턱대로 믿어보자.

정 안되면 이사를 가던가 퇴사를 시키던지, 아니면 부부상담이라도… ?

늘 아님 말고의 자세다. 왜? 우리는 그래도 다 잘 될 거니까.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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