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살기 시로

(05. 초심)열정도 물질이라 태울 수록 없어진다.

직장인 6년차, 초심을 되돌아보니

by 아마추어리

초심


먹먹할 때마다

그 마음 만큼 조용히

심지를 태웠다


힘든 날엔 힘들어서

외로운 날엔 외로워서

곁에 둔 오색의 향초


또 어느 지긋한 하루

말 없이 심지는 사라지고


향내 가득한 방 안엔

묘한 빛깔로 실신한

촛농 덩어리가


어떤 마음과 어떤 열기와 함께

굳어가고 있었다




직장생활 6년차, 인턴 시절을 떠올리면 기가 막히면서도 내게 그런 면이 있었던가 신기하기까지 하다. 지금은 연봉을 몇 천만원 올려준다고 해도, 심지어 때려 죽이겠다고 해도 절대 그 때처럼 일할 자신이 없다.


시키지 않은 청소를 하고, 선배들 폴더 정리도 했다. 점심시간에는 10인분의 맥도날드 햄버거세트 주문을 받아 심부름을 하고, 퇴근시간이 지나도 선배들 옆에서 새벽 2시까지 야근을 했다. 담배를 피우러 가자고 하면 졸다가도 일어나 옥상으로 따라갔다. 겨우 택시를 잡아 집에 도착하면 세벽 세시. 1.5룸 오피스텔에 들어가면 다른 회사 인턴을 하는 룸메이트가 화장을 지우고 있다. 이 모든 게 월 60만원을 받고 한 첫 사회생활이다.


그건 초심이었을까. 아마 성공적인 사회 데뷔를 위한 발버둥이었으리라. 오랜 아이돌 연습생이 첫 무대에 서 듯이,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연습한 '인간노릇'을 완벽히 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취업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그 시절엔 직장 생활을 하는 것만이 인간노릇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연차가 쌓일 수록 초심은 사라졌다.


"대리님! 제 명함은 언제 나오나요?"

매일 퀵서비스 아저씨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빤히 쳐다보며 손 꼽아 기다리던 첫 명함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만, 지금은 명함통이 바닥나 새로 주문할 때마다 '대체 언제까지 굴러먹어야 하는 거냐'라는 생각과 함께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으니 말이다.


열정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이 있다.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노르에피네프린, 옥시토신... 모두 뇌의 신경세포에서 분비하거나 모자르면 약물을 통해 보충하기도 한다. 분자이자, 물질인 것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올바른 정신적 가치는 그 어떤 현실의 장애물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믿었다.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오만해지는 것 또한 내가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반성하던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향초를 피웠다. 대량의 자(jar) 형태가 아니라 고깔 모양을 하고 있는, 비싸고 알록달록한 수제 향초였다. 소파에 누워 향초가 녹아드는 모습을 조용히 감상했다.


하얗고 곧은 심지는 처음엔 앙증맞게 초를 녹였다. 향초의 뾰족한 끝을 간지럽히기라도 하듯이 아주 조심스럽고 예쁘게.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멋을 낸 촛농은 각자의 색깔로 녹아내렸고, 서로 뒤섞였다. 마침내는 괴상한 색의 한 접시 액체가 완성됐고, 더이상 태울 것이 없는 심지는 액체 속에 파묻혀 찾을 수 없게 됐다.


'초심'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했나 싶지만, 이것이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느낀, 향초를 태우며 목격한 그대로다.


예쁜 마음과 선한 열정에도 질량이 있다. 세상이 애태울 수록, 사회가 실망시킬 수록 사회초년생이 꿈꾸던 색은 바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쁜 향초가 검은 촛농덩어리가 되는 것은 사회가 악랄한 탓도, 사회초년생이 무지개만을 그린 탓도 아닐 것이다.


그저 초심은 초심대로 태우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니 대리 3년차든 팀장 6년차든 슬럼프가 오거든 애써 과거를 되짚는 것보단 다른 불씨를 찾는 것이 좀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초심'을 억지로 찾다간, 오히려 시시하게 사라진 과거에 힘이 쭉 빠질 수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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