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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Feb 15. 2024

기억 속에 포개어 놓은 낭만에 대하여

왜 감미로운 순간은 불현듯 찾아와 단숨에 사라질까. 왜 행복한 기분과 충만한 감정은 오래 붙잡아두기 어려운 걸까. 스치듯 지나가며 스러지는 달콤한 시간은 어떻게 간직해 둘 수 있을까. 여행의 시간을 붙잡고 싶어 우주를 향해 호소하는 마음의 소리가 절절하다. 분명 더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있다. 바로 ‘여행의 시간’이다. 이토록 야속할 순 없는 거라며 괜히 허공에 대고 아쉬움 가득 찬 한숨을 내뱉곤 한다. 한숨은 메아리 되어 밉살스러운 한마디로 돌아온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이때부터 분주한 정신 활동이 시작된다. ‘뭐가 제일 좋았지?’라는 자문자답과 더불어 연인과의 열띤 수다가 바로 그것. 특별했던 에피소드를 뽑아내고, 엎치락뒤치락 순위도 매겨본다. 잃어버릴까 두려워 고이 간직하고픈 순수한 기쁨으로 다시 뛰어든다. 마지막 순간 공항에서 마시는 맥주가 유독 맛있었던 이유를 찾았네. 맥주잔 안에 위안이 있더라.


그런데 막상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조금은 다른 느낌의 달콤한 여정이 열린다. 얼마간의 잠복기를 지나 무심코 시작된다. 출퇴근길에 혹은 업무를 하는 도중 돌연히 여행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친다.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듯 선명하고 구체적인 기억이다. 가슴결이 간질 거리고 미세하게 소름이 돋는다. 그 기억은 이내 내 몸을 따스하게 에워싸더니 모든 감각을 깨운다. 100년을 품은 커피의 향기, 새벽녘 살갗을 스친 포근한 공기의 촉감, 무대 위 마에스트라의 격렬한 몸짓, 내리쬐는 햇살 아래 부딪히는 유리잔 소리와 사람들의 재잘거림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얼굴, 저녁 노을빛으로 일렁이던 운하의 물결,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매혹적인 향기도 함께 소환된다. 어느 날 일하다 말고 마주한 이 뜻밖의 순간 덕분에 새삼 깨달았다. 여행은, 그리고 추억은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의 순서도, 몰래 매겨둔 순위도 아닌, 무작위의 미학이자 감각의 축제라는 것을.


자, 그럼 랜덤 기억 여행을 떠나볼까. 이왕이면 기억 속에 포개어 둔 낭만 속으로. 때는 바야흐로 2016년 가을, 나는 구름 한 점 없이 고요하고 푸른 하늘 아래 오렌지빛 벽돌의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나지막한 돌계단을 몇 개 오르고 나니 정면으로 3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길고 좁은 유리창 입구가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다. 시선을 더 높이 옮겨보니 매끄러운 자태의 원형 돔이 하늘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는 별명을 지닌 곳,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이다. 유리문을 지나 계단을 몇 개 더 오른 후 메인 열람실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의 광경을 마주한 순간 심장 박동이 솟구쳤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즉시 굴복했다. 터져 나오는 탄성을 침과 함께 꿀꺽 삼키며 전율을 느꼈다. 정신이 약간 너덜너덜해진 채로 천장의 창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따라 중앙으로 향했다.


대자연을 만나면 한낱 점에 불과한 인간의 실체를 깨닫고 숙연해진다는 말들을 한다. 나는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 열람실 가운데 서서 점 하나가 되어 넋을 잃었다. 유럽의 대성당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종류와 장르의 감동이었다. 1층에서 3층까지 벽을 두른 서가에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책과 중앙이 탁 트여 있는 원형 기둥 구조의 공간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아우라와 에너지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눈앞엔 책의 향연이 끝없이 펼쳐졌다. 마치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 비밀스러운 마법에서 풀려나 하늘로든 땅으로든 빨려 들어가 버릴 듯한 기시감 마저 느껴졌다. 책을 향한 내 시선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어떤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 앞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황홀경에 빠져 들었다.


내가 나에게 이 순간을 선물했다는 게 실로 벅찼다. 감동과 환희를 마음속에 단단히 붙잡아 두려 애썼다. 감탄의 숨을 연신 내뱉으며 감상과 기분을 날 것 그대로 끄적여 보았다. ‘내 숨결이 그곳에 남아있다면’이란 상상을 해본다. 공간의 규모나 수백만 권의 책도 물론이지만 나를 매료시킨 건 그곳을 가득 채운 낭만과 서정이었다. 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내게 다가오는 듯한 오묘한 기운이 공간에 가득했다. 누군가의 따스한 손이 내 어깨 위에 살포시 얹어진 촉감처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낭만이 둥둥 떠다녔다. 아름다운 공간에 감응하고 싶은 마음은 사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셈이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며 생각한 건 ‘도서관에서 마음껏 머물자 그리고 러브레터를 쓰자’였던 것. 마침 호텔방 책상 서랍에 편지지와 편지봉투가 넉넉히 놓여있던 것이다(으레 비치돼 있는 메모지가 아니었다). 마치 내가 러브레터를 쓸 거란 걸 누군가 예견하고 있던 것처럼.


2층으로 향해 360도 파노라마 전경을 충분히 만끽한 후 앉을 곳을 찾아 나섰다. 고요히 책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집에서 가져온 책과 호텔에서 가져온 편지지를 꺼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고는 잠시 몸과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눈을 감고 나직이 호흡하는 찰나의 시간은 꿈결 같았다. 책은 10분도 채 읽지 못하고 덮어둔 채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할 일은 독서가 아닌 편지 쓰기라고 공간이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편지를 쓰기에 가장 아름다운 곳을 잘 찾아왔다면서 다정한 격려를 건네주는 것도 같았고. 짙은 녹색 스탠드를 딸깍 켜고 지금 이 기분과 이 느낌이 아니라면 다시는 고백할 수 없을 듯한 심정으로 그리움과 환희를, 그리고 사랑을 써 내려갔다. ‘사랑하는 나의 그대에게’. 도서관에서는 편지를 씁시다, 사랑하는 연인들이여!


시공간을 옮겨볼까. 오스트리아 빈 아르누보 아파트먼트 2층. 일명 ‘이네스 아파트’로 기억여행을 떠나보자. 두 해에 걸쳐 연이 닿으며 매번 찾으리라 다짐한 곳이다. 가을바람이 창 틈새로 들어와 흰 레이스 커튼을 간질 거린다. 빛바랜 연갈색의 격자무늬 나무 바닥은 그와 나의 맨발과 만날 때마다 사랑스럽게 삐거덕거린다. 창문을 향해 비스듬히 놓여 있는 짙은 밤색의 흔들의자는 끊임없이 나를 유혹한다. 방 한편 거대한 엔틱 수납장은 노스탤지어로 가득하다. 어릴 적 본 적 있는 듯한 오래된 전축 옆에 옛 시절 CD가 잔뜩 쌓여 있다. 고르는 재미와 묘미가 크다. 스트리밍에서 잠시 벗어나 음악의 물성을 느끼니 감회가 새롭다.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느긋한 아침 음악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호스트인 이네스의 큐레이션에 나직이 감탄하며 루치아노 파바로티, 이브 몽땅, 모차르트, 마일스 데이비스 CD를 골라 가지런히 펼쳐둔다. 그의 선택은 파바로티, 내 선택은 이브 몽땅. 그는 창가 곁 의자에 앉아, 나는 흔들의자에 몸을 뉘어 음악에 빠져든다.


100년을 머금은 건물 안에서 19세기말 아르누보 양식에 둘러싸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20세기 예술가들의 음악을 음미하는 건 내 생애 최고의 단절이다. 최고의 몰입이자 최고의 자유다. 이 단절이 영원하길 바라는 순수한 간절함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그가 배시시 웃는다. 파바로티가 데려다준 절정의 순간을 지나 이브 몽땅의 끈적한 낭만으로 들어간다. 그의 저음에서 실크의 촉감이 느껴진다. 공간과 음악과 사람이 깊이 공명하고 있다.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을 듣고 있노라니 세상과의 단절이 완벽해진다. 그가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일어나 내게 손을 내민다. 잡은 손에 의지해 몸을 일으키고 보니 우린 어느새 맨발의 블루스를 추고 있는 거 아닌가. 발도 밟아대고 턴도 돌면서 키득키득 웃음이 터지지만 인생이 장밋빛으로 물드는 로맨틱한 순간이다. 왈츠를 배우고 싶더라. 근사한 아이디어라 생각했다.



트랙의 다음곡 쎄시봉(C’est si bon)이 흘러나온다. ‘너무 좋다’라는 말 밖엔 달리 할 말이 없는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멜로디와 가사가 경쾌하다.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듯 주고받는 ‘시봉 시봉(si bon si bon)’ 노랫말이 솜털처럼 가슴 언저리를 간지럽힌다. 언젠가 맞닥뜨릴 인생의 쓴 맛 앞에서 삶과 사랑에 대한 이 찬미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기를. 몇 년이 지난 후 추억 속 이 장면은 어느 멋진 책의 ‘부제’와 만나 더 무르익었다. 헬레인 한프의 책 <마침내 런던> (부제: 멋진 일 말고는 달리 아무 일도). 이 부제는 오랜 세월 고대하던 런던으로 마침내 향하는 뉴욕의 작가 헬레인에게 런던에 살고 있는 미국인 독자팬이 보낸 편지에 있는 한마디다.


“멋진 시간을 보내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멋진 일 말고는 달리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요.”


여행을 앞둔 이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격려와 인사가 과연 또 있을까? 이보다 더 우아하게 여행을 정의할 수 있을까? 낭만이 가득했던 우리의 추억에 이름이 생겼다. ‘멋진 일 말고는 달리 아무 일도’


여기는 스톡홀름 중앙역. 기차에 올라탔다. 짙은 갈색 원목의 좁은 복도를 지나 6인실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뻑뻑한 미닫이 문을 열고 빨간 패브릭으로 덮인 좌석, 둥그스름한 직사각형의 통창 그리고 낡은 원목의 바닥과 벽을 찬찬히 바라본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건, 영화야’. 기차는 코펜하겐을 향해 출발했다. 덜컹 거리는 소리 말고는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그런데 내 귓가에선 음악이 흐르고 있었달까. 피아노 선율 위에 아름다운 트럼펫 멜로디를 얹는 시드니 베쳇의 음악이라면 완벽한 배경음악이 될 만한 장면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났다. 주인공 길 펜더의 시간 여행에 멋진 차 푸조가 있었다면 내게는 기차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이 기분을 어쩌면 좋나. 설렘도 낭만도 한도 초과라는 걸 알면서도 어찌할 길이 없더라. 가슴은 계속 콩닥 거렸고 시선은 여기저기로 바삐 오갔다. 적막을 깨트리지 않는 선에서 나는 마음껏, 있는 힘껏 흥분과 환희를 고요히 즐겼다.


스톡홀름 쇠데르말름을 산책하던 중에 사둔 엽서를 꺼냈다. 이번에도 그에게 쓰는 편지다. 2주 동안의 나 홀로 여행은 그에게 편지하고픈 순간들이 많았기에 더 충만했다. 도서관이야말로 편지 쓰기에 가장 완벽한 곳이라 생각했는데 달리는 기차에서 쓰는 편지의 맛이 범상치 않다. 그렇다면 공간의 매력을 뛰어넘는 건 결국 마음가짐일까. 엽서를 반쯤 채운 즈음 스톡홀름의 자랑 팔란스에서 사 온 캐러멜을 꺼내 6시간짜리 운명 공동체 같은 칸 사람들에게 권했다. 침묵을 즐기고 있는 이들에게 혹여 내 설렘과 흥분이 방해가 됐을까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그러고는 나도 함께 달콤함에 빠져 들었다. 가뜩이나 현실감 제로인 상황에서 천상의 맛을 내는 수제 캐러멜이라니. 이 감미로운 낭만의 끝은 어디인가. 내 심장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신의 환기를 위해 식당칸으로 향했다. 기차표를 살 때 받은 식당칸 이용권도 사용해 볼 겸. 블랙커피 한 잔과 시나몬 롤 하나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위 샛노란 조명 불빛이 창가에 비치니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이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편지를 마저 쓰려고 하는데 만년필이 없었다. 복도 바닥에서부터 좌석 앞 뒤로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순식간에 낭만이 사라졌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직원분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여유만만 표정을 짓고는 내 좌석의 아랫부분을 잡아 힘껏 들어 올렸다. 구석에서 핑크빛 만년필이 반짝였다. 만년필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 물건이냐며 묻는 그로 인해 낭만이 다시 피어올랐다. 나는 연인이 여행 선물로 준 것이고 마침 그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예상 못한 이 어여쁜 질문에 마음은 다시 무장해제. 정말 어쩌란 말인가.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한 손을 가슴켠에 올리며 다행이라는 말을 건네곤 유유히 사라졌다. 3시간이 지나도록 적막을 깬 적 없던 운명 공동체 사람들도 다정한 미소를 건네왔다. 이내 나도 미소를 찾고 편지를 마저 써 내려갔다. 편지와 만년필은 여전히 무사하다.



기억이 생생할 수 있는 건 매 순간 쏟은 진심과 열정 덕분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낯선 감정을 냉대하지 않고 환대한 덕분이고, 다름과 새로움에 마음을 활짝 열어젖힌 덕분이다. 나에게 그리고 그대들에게 묻는다. 편견과 선입견은 접어두고, 시간과 돈에 대한 강박도 내려둔 채 온몸과 마음을 다해 여행을 즐겼는가? 여행의 기억에 기대어 하루하루 더 즐거워하며 살고 있는가? 낯선 도전을 맞닥뜨리고 간극에 부딪혀도 다름을 존중하며 이해해 보려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는가? 스스로를 즐겁게 만들어도 보고, 진심과 열정을 끓어올려 순간을 만끽했는가? 관성에 저항하고 중력을 이겨내 처음 만나는 자유와 낭만을 경험했는가? 수줍음은 잠시 넣어두고 다정한 미소와 따뜻한 한마디를 먼저 건네 보았는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아 밀어내기만 했던 욕망에 한걸음 다가가 보았는가? 그렇다면 반드시 자화자찬의 시간을 가져보자. 그리고 내 삶이 다시는 여행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축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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