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endy An Feb 08. 2024

여행과 책과 서점의 3중주

강렬한 첫 문장이었다. ‘서점을 하나 인수했다’. 책 <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를 펼치자마자 만난 첫 문장이 심상치 않았다. 문장 하나로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은 이 책은 ‘10시간 비행 동안 너를 지켜줄게’라며 선포하고 있었다. 빈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빈의 동네 책방 주인 페트라 하르틀리프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여행은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에선 확신에 찬 만족감이 일렁였다. 열렬한 첫사랑의 열병에 빠질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 빈과의 첫 만남을 앞두고 이토록 자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책 덕분이고 서점 덕분이다. 책 없는 장거리 비행은 상상도 하기 싫다. 서점을 빼놓고 도시를 여행하는 건 어딘가 아쉽고 허전하다. 여행과 책과 서점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3중주다.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3중주는 시대와 음색이 다르지만 아름답다. 여행의 3중주야말로 도시마다 다른 음색과 빛을 낸다.


여행과 책은 환상의 페어링이다. 책으로 준비하는 여행은 나와 여행지의 주파수를 맞춰두는 작업이다. 아울러, 여행에서 마주할 감정들을 미리 경험해 보는 시뮬레이션이다. 저자의 삶 혹은 시선으로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미리 보기 하는 셈이다. 상상과 감성을 무한 자극하는 실로 즐거운 준비 과정이다. 환상의 페어링은 책에서 시작해 서점에서 완성된다.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도시의 지성과 감성이 매끄럽게 흐르도록 기능하는 파이프라인이 바로 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도시만의 개성과 문화가 잔뜩 묻어나 있는 서점을 발견하는 건 여행의 화룡점정이다. 들어서는 순간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하는 곳,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을 선사해 주는 곳, 영혼에 쉼과 아늑함을 건네주는 곳,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두가 한순간에 고요해지는 곳. 모두 서점의 다른 이름들이다. 


여행을 확정하고 나면 시간을 들여 꼭 하는 박빙의 작업이 있다. 여행에 함께할 책을 정하는 것이다. 여행한 세월 동안 책 목록에 몇몇 이름이 생겼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가는 비행기에서 읽을 책, 시차 적응 실패한 이른 새벽 커피를 내리며 펼치고 싶은 책 또는 문득 여행과 거리 두기가 필요한 밤 호텔에서 읽을 책, 함께하는 여행에서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때 읽을 책, 그리고 오는 비행기에서 읽을 책. 애독가의 향기가 나는가? 활자 중독에 더 가깝다. 여전히 세상을 텍스트로 바라보고 이해하기에 종이책을 늘 곁에 두어야 하는 인생. 전자책과 오디오북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시대 부적응자 아닐까. 손목과 어깨가 늘 사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감행했던 책 보부상 여행은 기꺼운 즐거움이었다. 짐가방에 쇼핑으로 채울 공간을 남겨두기보단 온통 ‘나스러움’으로 채워 갔던 어여쁜 시절의 흔적이다. 


하나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 결국 타협을 했다. 영원한 건 없는 건가 봐요. 여행에 가져가는 종이책은 2권 이하로 제한했고, 여행 중 책 구매에는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 일명 페이퍼백이라 부르는, 깃털 같은 무게를 자랑하는 책이라면 문제없지 않나. 팬데믹 종료가 선언된 직후 즈음 연인과 함께 빈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내 독서 라이프를 지지하며 종종 책 선물도 건네주곤 하지만 이따금씩 전자책 세상으로 나를 유혹한다. 기내식을 마친 후 강제 취침을 종용하는 소등의 타이밍에 나는 독서 조명을 켜고 책을 꺼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싶은 시점에 옆자리에 앉은 그가 나를 쿡쿡 찌르는 거 아닌가. 바라보니 그는 말없이 오른쪽 대각선 방향을 고개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엔 조명도 켜지 않은 채 하지만 편안하게 전자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말 한마디 없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또다시 나를 유혹하는 그가 살짝 얄미웠다. 


누군가의 손목을 훔쳐보며 가뿐한 편안함을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잠시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지만 금세 평온을 찾았다. 그리고 남몰래 속삭였다. ‘나는 불편함의 미학을 추구한다’. 종이책의 물성과 연필로 밑줄 긋는 쾌감, 다시 읽기를 자극하는 모퉁이 접기를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 게다가 책을 좀 막 다뤄야 읽는 맛도 나고 여기저기 넣다 뺐다 할 텐데, 전자책은 모시고 다녀야 할 것만 같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책 읽는 즐거움이 배가되는 것도 양보할 수 없다. 날림체로 휘갈겨 있는 메모는 또 어떤가. 생생한 활어처럼 몸부림치는 생각을 빠르게 잡아두려 끄적여둔 흔적도 소중하다. 다시 볼 때면 대체로 부끄럽긴 하지만 내가 정말로 이런 생각을 했나 싶게 기특한 내용이 간혹 있다. 이 발견은 다시 새로운 생각과 상상의 불을 지펴주는 단초가 된다. 이 이야기라면 두어 시간은 더 떠들 수 있을 텐데 이제 그만 자중하자.


장시간 비행 가운데 나를 포근히 감싸주었던 책과 서점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의 저자 페트라 하르틀리프(이하 페트라)는 뮌헨 태생이지만 오스트리아에 거의 평생 살았다. 독일인 남편을 만난 후 함부르크에 가정을 꾸리고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 대부분이 빈에 있으니 종종 휴가를 가곤 했는데, 마침 휴가 일정 중 친구들로부터 어느 고서점의 폐점 위기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모두 함께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와인 향기와 함께 공기 중에 떠다닌다. 호기로운 한 친구는 페트라와 페트라의 남편에게 고서점을 인수하라는 묵직한 말을 무심히 툭 던진다. 비평가인 페트라와 대형 출판사 마케터인 남편이 관심 가지리란 걸 미리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이 부부는 폐점 위기의 서점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머잖아 결국 이들은 서점을 인수하고, 빈으로 이사한다. 그러고는 다이내믹한 인생 2막-서점 주인의 삶-을 흥미롭게 펼쳐 나간다. 무려 몇 달간 친구 집에 신세를 지면서 말이다.


페트라와 가족은 함께 고서점을 정비한 후 다시 오픈했다. 분명 서점 주인은 페트라지만 글을 읽다 보면 서점을 찾는 모든 이들이 함께 운영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조언과 제언을 아끼지 않고, 대가 없는 도움을 주저 없이 건네는 동네 사람들과 단골 고객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나는 이들을 그저 글로만 만났을 뿐인데도 만난 적 있는 듯 애틋한 건 왜일까. 어린아이부터 나이 지긋하신 노인까지 거의 전 세대가 이곳을 쉴 새 없이 드나든다. 문을 열기도 전에 문 앞에서 기다리는 단골 노인분들, 십 대가 읽을 만한 책인지 아닌지를 먼저 읽고 감별해 주는 사랑스러운 딸, 무조건 서점에서 일하고 싶다며 알아서 찾아온 직원들, 계절마다 매력적인 리스트를 지참하고 방문하는 출판사 영업사원들, 업계 소식통 역할을 해주는 기자 친구와 출판사 친구까지. 하르틀리프 책방이여 영원하길.


하르틀리프 책방이 있는 도시로 향하고 있단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첫 문장과의 조우는 기내 독서에 양보했지만 서점 위치는 이미 구글맵에 별표를 해둔 지 오래다. 베링거 스트리트(Währinger Strasse) 122. 어쩐지 주소도 좋아. 마음속에 거대한 하트로 저장 완료. 쉬는 요일과 운영 시간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오스트리아 빈도 피할 길 없던 아마존의 습격에 정면으로 맞선 페트라의 기개와 활약 이야기를 다룬 매체 글도 열심히 찾아 읽었다. 페트라는 책과 서점이 지닌 힘을 굳게 믿는 사람인 게 분명하다. 시간과 자리가 허락될 때마다 왜 동네 책방에서 책을 사야 하는지를 열렬히 설파한다. 고객의 요청이라면 단 한 권이라도 반드시 구해서 배송해 주고, 하르틀리프 책방 만이 만들 수 있는 고유한 라인업과 추천으로 고객의 관심에 보답한다. 책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서점과 사람 사이의 교감으로 책방의 밀도가 짙어진다. 


빈과의 애틋한 첫사랑을 시작하곤 매일같이 꿈결을 걷다 보니 어느새 디데이가 되었다. 하르틀리프 책방에 가기로 한 그날. 설렘과 기대를 잘 붙들고 있다가 꼭 여행이 끝나갈 즈음에 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대미를 장식하기에 이보다 더 가슴 떨리는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으로 기다렸던 것. 빈의 북쪽 끝에 있다 해도 기필코 찾아갔을 테지만 이사 간 호텔에서 책방까지의 거리는 고작 도보 19분이었다. 이건 마치 하르틀리프 책방 커뮤니티 안에서 먹고 잔 거 아닌가 싶어 감회가 남달랐다. 유독 동네에 정이든 이유도 혹 그 때문이었을까 괜히 연결 지어도 보고. 느긋한 오전을 보낸 후 책을 들고 길을 나섰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가까워지고 있단 생각에 긴장감이 피어올라 잠시 숨을 고르고 물을 사 마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떨림이 약간 어색하기도 했지만 발걸음은 분명 가볍고 경쾌했다.



쭉 뻗은 내리막길을 걷고 나니 길 건너편에 연녹색의 간판이 존재를 드러냈다. 오매불망 발 길 닿길 고대하던 동네 책방의 이름은 ‘하르틀리프 뷔허(Hartlieb Bücher)’. 우리말로 하면 하르틀리프 책방쯤 되겠다. 서점 입구 바깥쪽에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페이퍼백들이 네댓 개의 원형 진열대에 가득 차 있었다. 괜히 곁에 서서 원형 진열대 돌려본 사람 여기 있습니다. 제일 반가운 건 다름 아닌 두 개의 쇼윈도였다. 직사각형 모양의 유리창 너머에 정성스레 진열돼 있는 책들의 자태가 어딘가 예술적이다. 한쪽엔 다양한 책이 사이좋게 섞여 있었고, 다른 한쪽엔 페트라의 책이 우아한 대칭으로 쌓여있었다. 한국에 번역 출간된 책이 전부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녀는 무려 소설가였던 것이다. 소설 제목도 참 아름답지. ‘빈에 봄이 오면(Wenn es Frühling wird in Wien)’. 앞으로도 못 읽을 거라 단정 짓고 페트라의 소설을 구매하지 않고 돌아온 내 죄는 가히 중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소장품이 어디 있겠냐며 자책만 5년째. 


심호흡을 짧게 하고 책방으로 들어갔다. 글에 의지해 상상했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새롭기도 한 풍경이 펼쳐졌다. 책냄새가 흐르는 공기는 나를 다정히 에워쌌다. 직원분들이 두 분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은 생김새와 일하는 모습이 분명 책 속 등장인물 중 한 명 같았다. 페트라는 글로 사람을 그려놓았던 거구나 싶어 신기했다. 물론 타투가 큰 힌트가 되긴 했지만! 내적 친밀감이 발동해 밝게 인사를 건넨 후 서점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페트라의 책 속으로 풍덩 빠진 것만 같더라. 그동안 쌓아온 상상 위에 만남의 감동 한 스푼, 공간에 대한 내 감상 한 스푼 얹어 책 속 이야기와 함께 호흡해 보는 순간 희열이 밀려왔다. 상상만 하던 곳을 직접 만나는 경험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눈으로 확인하는 것 이상의 선물을 건네주니까. 나를 위한 여행을 디자인한다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을 바라고, 기대하고, 준비하는 것 아닐는지. 



수줍음을 무릅쓰고 타투가 멋진 직원 분에게 물었다. “페트라 님 계신가요? 안 계시면 혹 기다려 뵐 수 있을까요?” 그녀는 “10~15분 정도 기다리면 오실 거예요.”라며 따스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저자이자 책 속 주인공인 페트라와의 만남이 현실이 되니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읽을 책을 골라 보기로 했다. 다행히 영어책 섹션이 있었다. 유쾌한 떨림은 순간 집중력을 신속히 거들었고, 덕분에 아는 이름-줄리언 반스-을 쉬이 발견했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원작 소설 The Sense of an Ending을 집어 들고 재빠르게 계산했다. 얼마 전 영화를 본 참이니 소설도 재밌게 읽겠지 싶었다(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고는 다른 섹션에서 책 구경을 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책들이 다른 커버 디자인을 입고 독일어 제목을 달고 있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책의 변신은 무죄인 고로.


문득 뒤편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온기에 돌아봤다. 페트라였다! 그녀는 내쪽으로 성큼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흥분을 감춘 채 나와 내 연인을 짧게 소개한 후 재빠르게 책을 꺼내 팬심을 표했다. 혹여 그녀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뺐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책을 재밌게 읽었고, 이곳에 너무 와보고 싶었고,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고 영광이라는 말을 속사포로 내뱉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유쾌한 표정과 함께 들어주었고, 사인을 해달라는 부탁에도 흔쾌히 응해 주었다. 어여쁜 하트와 함께.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북페어 참석차 서울에 와본 적 있다는 그녀. 너무 큰 도시로 기억한다고 한다. 미처 묻진 못했지만 좋은 추억이길 바라본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음 책 출간 계획을 물었다. 오스트리아에선 이미 소설이 출간됐고, 계속 집필 중이라고 했다. 부디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게 번역 출간을 해달라는 당찬 당부를 하는 내게 그녀는 한국 담당 에디터에게 꼭 전하겠노라며 환한 미소를 건넸다.


기대 이상으로 짜릿했던 만남을 뒤로하고 미술관 카페로 향했다. 40분가량 걸어가는 내내 감동과 기쁨을 마구잡이 수다로 풀어내는 나를 연인은 흐뭇이 견뎌 주었다. 그 후 카페에서도 쉬이 진정할 순 없었지만… 수줍어 서점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던 바보의 등을 떠밀어 준 당신의 사랑과 인내에 경의를,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를. 빈과 책과 하트틀리프 책방으로 묶인 추억의 사슬은 여전히 내 안에서 빛나고 있다. 녹슬지도 않고, 바래지도 않은 채 아름답게 여물어 가는 중이다. 온몸으로 느낀 감동과 희열이 선명하게 남는다면 팩트는 기억에서 희미해져도 나쁘지 않겠다. 책과 서점이 도시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순간을 꼭 만나보시라. 아, 그런데 책과 서점, 여행의 3중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북 챌린지 ver.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