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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Feb 29. 2024

도시의 맛 2

혈관에 채워지는 술

술과 여행은 매력적인 앙상블이다. 술이 만들어주는 특유의 나릿하고 한가한 무드는 여행의 속도를 느긋하게 조절해 준다. 음식과 분위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파트너가 된다. 다만, 부족하면 아쉽고 과하면 힘들어지니 조절이 필수! 지혜롭게 잘만 활용하면 ROI(투자 대비 수익률)가 높은 여행의 기술이다. 한두 잔만 곁들여도 음식의 맛과 풍미가 폭발하는 데다가 긴장은 낮춰주고 생각의 문을 열어준다. 맥락에 잘 어울리는 술을 한 잔 할 때면 기분 좋은 편안함이 찾아든다. 여행자의 특권인 ‘낮술’, 오페라 인터미션에 우아하게 즐기는 샴페인, 입맛을 돋우는 식전주 한잔의 활약을 생각해 보시라. 어디 이뿐이랴. 낯선 환경과 분위기에 기꺼이 비집고 들어가 볼까 싶은 여유와 용기가 샘솟는다. 혈액 순환이 왕성해지고 몸과 마음에서 자유와 해방감이 느껴진다. 음식과 술이 빚어내는 환상의 페어링은 여행을 클라이맥스로 데려간다. 


코펜하겐 해협에 내리 닿는 빛이 반짝이며 넘실 거린다. 낮을 따스히 감싸주던 태양의 여운인지 해 질 녘의 노을인지 알 수 없지만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풍경에 사로잡혀 넋을 잃은 몸을 이내 일으켜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부러 가보지 않고 코펜하겐 여행에 양보한 1년여의 기다림이 꽃을 피우는 날이었다. 코펜하겐에서 꼭 첫 만남을 갖겠노라 다짐한 곳 미켈러 바(Mikkeller Bar) 1호점. 미켈러 맥주의 발원지에서 시원하게 목을 축일 생각에 발걸음은 경쾌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이미 노천석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열띤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단 사실이 자못 기뻤다. 알아듣지 못할수록 풍경도 사람도 그림처럼 영화처럼 바라볼 수 있으니까. 어여쁜 청춘들에게 노천을 바치고(자리가 없었지만 마음만은) 나지막한 계단을 몇 개 내려가 미켈러 바 안으로 들어섰다. 벽에 딱 붙어 있는 아담한 1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페일 에일 탭비어 한 잔을 주문했다. 


첫 모금에서 이미 충분한 풍미를 느꼈다. 짙은 황금빛 페일 에일의 은은한 홉향과 쌉싸름한 맛에 갈증은 사라지고 흐뭇함이 차올랐다. 왁자지껄한 노천과는 달리 고요하기 그지없던 바 내부를 혼자 차지하고 맥주를 마시는 맛은 여행의 맛이자 풍류의 맛이었다. 미켈러 마스코트 헨리와 샐리가 사이좋게 그려진 전용잔은 입맛도 자극하고 물욕도 자극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 한 건 역시 감성을 자극하는 법. 시간은 만질 수 있을 듯 천천히 흘렀다. 여행의 시간을 촘촘히 감각할 수 있는 건 맥주 한 잔의 미학 그 자체였다. 도시를 맥주로 더 재밌고 친근하게 즐길 수 있다면 동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미켈러 홈페이지에선 전 세계 미켈러 바와 미켈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의 위치 및 탭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다. 호기심이 발동한 곳은 Ramen to Biiru. 미켈러의 창업자 중 한 명인 미켈은 일본 문화에 심원한 관심과 애정을 품은 지 오래로 일본 음식과 미켈러 맥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 일본 가족 기업 Bento Copenhagen과 함께 라멘집을 열었다고 한다. 


Ramen to Biiru는 코펜하겐에만 여러 곳이 있지만 가보고 싶은 동네인 뇌레브로(Nørrebro) 지점으로 향했다. 역시 노천석은 가득 차있고, 이번에는 미켈러 마스코트 헨리와 샐리가 입구에서부터 반겨주었다. 남다른 활력으로 꽉 찬 흥미로운 곳이다. 일본 문화와 덴마크 문화의 기분 좋은 충돌이 공간의 지배적인 분위기인 듯하다. 노천 전망 창가석에 자리를 잡고 키오스크 앞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익살스러운 이름에 이끌려 맥주는 Peter, Pale and Mary로, 라멘은 직감상 잘 어울릴 것만 같은 시오(Shio) 라멘으로 주문했다. 하얗게 김이 서리도록 차디찬 맥주잔에 페일 에일을 꼴꼴 따르고 나니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풍성하게 올라왔다. 마실수록 자몽향이 짙게 퍼졌고, 홉의 쌉싸름한 끝맛이 뒤에서 받쳐주더니 부드럽게 목을 지나 스러졌다. 라멘 한입, 맥주 한 모금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맛의 향연을 신나게 만끽했다. 덴마크에서 꽃 피운 페일 에일을 향한 사랑은 서울 미켈러 바에서 계속 이어갔다. 인연인 듯 운명 같은 만남이 지속되는 도시가 있는 것처럼 술과 여행자의 만남도 인연임에 틀림없다. 여행에서 만난 특별한 ‘술’과의 인연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베를린으로 가볼까. 어느 늦가을의 오후, 오전 내내 내린 비가 갠 후 맑은 날이었다. 크로이츠베르크 동네를 유유자적 거닐고 있었다. 란트베어 운하를 따라 걷고 걸으며 시간의 사치를 부리는 중에 다시 비가 내렸다. 그 무렵 베를린의 가을비는 왜 그리도 차디 찼을까.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하는 게 무색하게 빗줄기는 굵어졌다. 걷고 뛰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광장에 이르렀고 눈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섰다. 높은 층고와 고풍스러운 가구,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공간의 아늑함에 몸은 금세 녹아내렸다. 베를린의 여행자가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게 있다면? 그건 여지없이 ‘맥주 마시기’다. 잔뜩 힘이 들어간 팔과 어깨를 늘어뜨리고 한숨 돌리기에도 제격 아니겠나. 독일 맥주를 향한 무한 신뢰가 쌓이고 있던 터라 선택의 순간이 되려 흥미로웠다. 순식간에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 발견하는 재미가 제법이다. 메뉴판에서 한눈에 발견한 THIRSTY LADY를 주문했다. ‘저요? 목마른 숙녀 여기 있습니다.’ 이름은 분명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과 에너지가 있다. 술의 세상에서 이름 효과 톡톡히 보는 건 단연 맥주 아닐까. 맛과 향이 만족스러웠음은 물론 ‘이름값 하는 맥주’였다. 

지금까지 혼자 마신 술 중에서 제일 맛있었던 술이 무어냐 묻는다면? 때는 바야흐로 인생에서 여행의 여정 제2막이 열리던 무렵, 장소는 무려 파리 포시즌즈 호텔 레스토랑 르 생크(Le cinq). 삶이 왠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만 같은 예감이 짙게 드는 2월의 봄이었다. 다시 찾은 파리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건 나 혼자 미슐랭 2 스타 런치 코스를 즐기는 것이었다. 새삼 하고 싶은 걸 미루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던 그때의 내가 너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런치 코스를 시작하기 전 식전주로 주문했던 빈티지 화이트 와인 한 잔의 추억은 맛과 향보다는 감정의 기억이다. 완벽한 황금 빛깔에 기포마저 우아해 보였다. 아로마를 충분히 음미한 후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진정한 어른이 된 것 같더라. 어른이어야만 감각할 수 있는 맛, ‘보장된 행복’의 맛이었달까. 장소와 맥락과 기분이 마법을 부린 덕분이었지만 여전히 혼자 마신 맛있는 술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쑥스러움에 보틀 사진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오히려 미스터리에 쌓인 추억이 됐으니 충분하다. 


주말 이른 아침 벼룩시장은 진정한 유럽이다. 집집마다의 연대기가 광장 가득 펼쳐진다. 풍취가 감도는 오래된 물건들 사이를 지나다니다 보면 시간 감각을 잊게 된다. 오스트리아 빈 주말 벼룩시장을 찾을 때마다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비마저 빈스럽게 요란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영혼을 그러모아 벼룩시장 구석구석을 구경하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케이크를 굽는 카페 볼펜지온(Vollpension)으로 향했다. 실제로 연금(pension)을 수령하는 은퇴한 노인 분들이 일 하는 곳으로 할머니 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브런치 카페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의 별명은 ‘할머니의 거실’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가슴에 ‘너의 할머니’, ‘너의 할아버지’ 배지를 달고 계시는데 정말이지 (죄송한 표현이지만)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반해 버렸다. 호기롭게 브런치 세트 메뉴를 주문하는 우리 커플에게 팔의 근육이 멋스러운 할머니께선 잘했다는 의미의 윙크를 날려 주셨다. 


3단 트레이, 빵 바구니와 접시로 테이블이 빈틈없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우리만이 거대한 세트 메뉴를 주문했던 것이었으니. 역시 할머니는 많이 먹는 걸 좋아하셔. 어디로 손이 가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에 샛노란 에그노그를 가져다주셨다. 강렬한 눈 맞춤과 함께 유려한 영어로 ‘이건 알코올이 들어있으니 꼭 마시라’라고 하시는데 일어나 경례로 화답하고픈 심정이었다. 아침 9시에 에그노그라니. 할머니가 허락하시고 하사하신 아침술이라니. 부드럽고 달콤한 우유크림이 혀에 닿아 사르르 녹아내리더니 브랜디가 갑자기 툭 치고 올라왔다. 짜릿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브런치는 없었다. 에그노그에 달뜬 마음은 쉬이 가라앉을 줄 모른 채 하루를 축제처럼 보내는 에너지가 되었다. 


노천에서 햇살 샤워받으며 청명한 공기 벗 삼아 마시는 낮 맥주는 위험하지만 아름답다. 한적한 동네 뒷골목에 있는 빈의 카페 울리히(ULRICH)에서 인생 맥주 슐라드밍어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맥주 선택을 너무 고심하는 우리를 가만히 둘 수만은 없던 매니저는 성큼 다가와 슐라드밍어를 추천했다.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로컬 맥주라면서 자신감이 차오르는 눈빛으로 ‘분명 두 번째 잔을 주문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 저절로 신뢰가 되는 마음 반, 날카롭게 평가해 보겠다는 마음 반으로 추천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두 번째 잔을 주문했던 것이다. 쨍한 한낮에 어울리는 맑고 시원한 맛에 찬탄이 절로 나왔다. 풍성한 아로마가 코를 가득 채우더니 투박한 탄산이 톡 쏘고 들어왔다. 입안 가득 머금는 순간에는 홉의 풍미가 폭발했다. 목 넘김 직후 혀 안쪽에 걸리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 절정이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연거푸 두 잔을 내리 마시며 오스트리아 맥주의 세계에 눈을 떴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이라는데 발을 빼고 싶지 않다. 슐라드밍어 맥주는 오스트리아 슐라드밍-다흐슈타인 지역 양조장에서 최상급 산천수와 아로마 홉으로 지역 출신 전문가 30명이 수제로 만든다. 이 지역은 알프스 끝자락으로 여름에는 무더위를 피한 피서를, 겨울엔 최고의 스키를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알프스의 정기라면 어떤 술을 빚어도 맛있지 않을까. 산자락의 눈을 녹여 맥주를 만든다 해도 훌륭한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맥주는 여느 술과 마찬가지로 맛과 향이 핵심이지만 그 어떤 맛과 향도 이길 수 없는 ‘맥락’이 있다.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라타기 1시간 전 공항에서 마시는 맥주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의 감정이 서린다. 종류 불문 여행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는 공항 맥주일 수밖에 없다. 빈 국제공항에서 마시는 최후의 맥주 오타크링거로 빈과 뜨거운 작별 인사를 나눈다. 

여행에선 맥주도 마셔야 하고 와인도 마셔야 하고 종종 위스키와 칵테일도 마셔야 한다. 메뉴 선정에 따른 페어링은 열과 성을 다해 고민해야 하고, 로컬 와인과 맥주를 찾는 작업에도 소홀할 수 없다. 눈과 귀를 활짝 열고 발견과 추천에 민감해져야 한다. 왜 맛있고, 왜 좋은지 계속 생각해 보는 거다. 내 취향과 호기심이 향하는 곳이 어디이고 무엇인지 기억해 두자. 사람도 취향도 진화하고, 여행도 술도 영글어가며 무르익는다. 빈에서 오스트리아 전통 요리 타펠슈피츠를 먹기 위해 레스토랑 플라슈타 볼차일레(Plaschutta Wollzeile)로 향한 날이었다. 화이트 와인이나 오타크링거 맥주 외 다른 옵션을 생각해 보지 않고 있었는데, 이전 해에도 우리 테이블을 맡았던 턱수염이 멋진 매니저가 슈투엄(Sturm)이 제철이라며 추천해 주었다. 슈투엄은 1년에 딱 두 달 9월에서 10월까지만 즐길 수 있는 햇와인이라고 한다. 제철 음식도 아니고 제철 술이라니 거절하기 싫은 제안이었다. 희뿌연한 색과 천연 탄산, 효모 알갱이가 잔 속에서 넘실 대는 게 꽤 인상적이었다. 와인과 포도 주스의 중간 정체성을 가졌는데 맛은 사과주스 맛이 나는 게 재밌었다. 오스트리아와 한 발짝 더 가까워진 느낌은 4도 알코올의 힘이겠지. 여전히 세상의 많은 도시가 그들만의 술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부지런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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