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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Jun 20. 2024

느리게, 충만하게, 빛나게 흘러간 하루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지금 글을 쓰며 듣고 있는 음악은 재즈 음악가 에디 히긴스(Eddie Higgins)의 2011년 앨범 ‘Romantic Higgins’다. 막 다섯 번째 트랙이 시작됐는데 피아노 재즈곡의 제목이 마침 ‘It’s Magic’. 다섯 번째 트랙에 이르기까지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던 괴로움을 차치해 본다면 기분 좋은 우연이다. 글을 쓸 때나 책을 읽을 때 혹 여행 속 이동 중 가장 즐기는 음악은 재즈고, 특히 에디 히긴스와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앨범들이다. 글쎄, 살아볼수록 인생이 재즈 같고, 여행은 더 재즈 같고, 때론 차라리 마법 같기도 하니까. 지난 2016년 완연한 가을 즈음 코펜하겐에서 한주 머무는 동안에도 에디 히긴스와 줄곧 함께 했다.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을 오가며 들었던 음악이 에디 히긴스의 재즈였다는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미술관 잔디밭에 널브러진 채 들었던 앨범은 분명 ‘Bewitched’ 였을 거라며 가느다란 기억을 소환해 본다.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기도 하고, 수록곡에 ‘Alice in Wonderland’라는 곡이 있으니. 그때의 기분이라면, 그곳에서라면 분명 이곡을 듣고 싶어 했을 내가 아니었을지. 희미한 기억이지만 애틋한 여운은 강렬하게도 밀려오네. 음악에 기대어 기차 밖 풍경을 감상하고 나니 금세 훔레백(Humlebæk) 역에 도착했다. 기차를 더 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는 게 흥미로웠다. 가만 생각해 보면 여행 중엔 종종 마음에 이상한 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가령, 그토록 가고 싶던 곳에 빨리 당도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길 위의 순간들과 창 밖 풍경에 더 몰입하고 싶은 욕망의 충돌 같은 것. 돌아보면 이동의 시간, 그 시간 속 촘촘히 채워진 모든 순간이 여행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싶었던 듯하다. 매 순간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 모든 게 여행이라는 건 여전히 잊지 않고 산다.


기차역에서 미술관으로 향하는 단아하고 조용한 길을 잠잠히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설렘과 기대가 충전됐다. 작은 마을의 고요한 아침의 길을 이방인이 이렇게 독차지해도 될까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속으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달콤한 게으름을 한껏 피웠다고 생각했는데 개장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했다. 여행에서만 발현되고 기능하는 초월적인 에너지의 힘이 나를 끌고 다닌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따금씩 나타나주는 가디언 격의 에너지랄까. 그  힘의 근원은 곧 나 자신일 테니 오래도록 꺼내 쓸 수 있길 기대해 본다. 하루를 온전히 미술관에서 보내기로 작정하면서 했던 다짐이 있다. 말도, 생각도, 그리고 행동도 할 수 있는 만큼 느리게 하자는 것. 자연과 예술 가까이에서 느슨히 마음을 늘어뜨리고 혼자인 순간의 절정을 느껴보고 싶다는 내밀한 바람도 간직해두고 있었다. 속마음을 풀어헤치고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나와의 대화’를 시도해 보기에 제격인 환경은 단연 ‘자연과 예술에 둘러싸인’ 그 어떤 곳이다. 자연이 주는 영감과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사뭇 다르지만, 울림을 던지며 나를 휘젓는 건 똑같다. 해본 적 없던 생각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유 모를 기분에 휩싸여 곰곰 사색에 빠지게도 하고, 번뜩 평소의 나답지 않은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완벽히 혼자 있을 때 가져봄직한, 누려봄직한 순간이다. 흰색 건물이지만 담쟁이넝쿨에 휘감겨 녹음의 빛깔을 뽐내는, 창이 어여쁜 2층 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미리 준비해 온 티켓을 확인받고 안내받은 방향으로 향했다. 창밖의 풍경이, 그러니까 그림보다 더 비현실적인 장면이 이미 믿기지 않는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문 밖으로 나간 순간 탄성이 터졌다. 부끄러움도 수줍음도 저리 가라, 거의 아연실색의 순간이었다. 내 눈앞에, 몇 발자국 앞에 이런 환상적인 자연이, 아니 그림이 펼쳐져 있다니 기시감 마저 들었다.

푸르름 너머엔 외레순(Øresund) 해협이 푸르게 물결치고 있었다. 외레순 해협의 건너편 아스라이 보이는 곳이 스웨덴이라는데, 스웨덴에서 덴마크로 넘어와 다시 스웨덴을 바라보노라니 새로운 여행의 묘미로다. 융단보다 더 부드럽고 매끄럽게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데, 걷고 싶지 않았고 데굴데굴 구르고 싶었다, 진심으로. 이 장면과의 첫 조우에서 어렵지 않게 느낀 건 ‘자연에 세심하게 묻고 있는 곳’이라는 인상이다. 아마도 미술관 개관(1958)에 앞서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자연에 정성을 다해 허락을 구한 다음 배려하고 또 배려한 것 같달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탄성에 감동뿐만 아니라 감사를 담아 곳곳에 흩뿌렸다. “예술과 인간에 자리를 내준 자연이여, 고맙습니다.” 작품보다 자연을 먼저 만나게끔 미술관 경험을 디자인한 게 아닐까 싶더라. 풀밭에서 굴러다니고 싶은 욕망을 잘 잠재우고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자연과 예술 사이를 거닐었다.


뻔하게 짐작할 수 있는 길도, 공간도 없었다. 모여있어 더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비밀스러운 길이 나있는가 하면, 사방이 유리로 된 통로가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고 있었다. 안에 있을 때엔 자연을 잊을까 싶어서, 밖에 있을 땐 예술을 잊을까 싶어서 섬세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설계한 곳 아닐까. 인간이 혹은 건축과 예술이 자연과 교감하고 상호작용 한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감각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렁였다. 그 마음을 들킨 마냥 어느 쪽으로 향해도 자연과 예술이 먼저랄 것 없이 어우러져 펼쳐지는 거 아닌가. 생각보다는 느낌으로, 논리보다는 감성으로, 이해보다는 공감과 발견으로 시간을 보냈다. 미술관 안으로 냉큼 향해 작품 세계를 유영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미술관 밖에 묶여버린 몸과 마음을 어찌할 길이 없더라. 시선과 발길이 어느 쪽을 향해도, 아무리 한참을 걷고 또 걸어도 계속해서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자연과 함께 노는 것만 같아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침엽수들 사이로 촘촘한 돌길이 나 있는가 하면, 좁고 비밀스러운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호수가 펼쳐졌다. 100살은 족히 넘었을 웅대한 나무뿌리가 땅을 뚫고 나온 모습에선 신비감마저 감돌았다. 우거진 숲길을 지나 새롭게 발견한 지점에 다다르니 장 뒤뷔페(Jean Dubufet)의 거대한 조각 ‘Dynamic Manor’를 만날 수 있었다. 이 기골이 장대한 조각이 미술관 카페의 뒷마당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맑은 하늘과 푸른 땅 사이에서 작품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와 오라(aura)가 굉장했다. 괴생명체를 품고 있는 독특한 모양새의 알 같기도 하고, 막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주선 같기도 하다. 장 뒤뷔페는 ‘다듬지 않은 날 것’에 주목했던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였다고 한다. ‘날 것’과 ‘자유로운 영혼’은 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찾아보니 그는 내가 태어난 해에 하늘로 갔다. 무의미한 연결 고리이지만 그는 별이 되었어도 그의 작품의 생애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작품이 나보다 오래 살겠지만 나이 들어 다시 한번 꼭 만나고 싶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달뜬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더라.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마음이 쿵쾅거리다가 간질거리고 말이다. 이 느낌, 이 기분이 풍요로움 아니었을까.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삶이 때로는 충만하게 흘러갈 수 있는지 강력한 힌트를 얻은 기분, 배부른 느낌이었다. 오전 내내 숲과 정원과 호수와 나무에 흠뻑 취해있던 바람에 정신의 배부름과는 별개로 배가 고파왔다. 카페로 향하던 중 다시 눈앞에 펼쳐진 넓고도 푸른 정원과 외레순 해협의 장관에 감탄하고 있던 찰나였다. 헨리 무어의 청동 조각 곁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유치원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의 무리를 만났다. 조각 뒤로는 수십 번을 굴러도 깃털처럼 부드러울 듯한 잔디 언덕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정말 구르는 거 아닌가. 까르르 소리 지르며 뛰어내려 가는 아이들, 아예 언덕 중간즈음에서 누워버린 아이들, 느릿하게 굴러내려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야말로 가히 장관이었다. 부러워 죽는 줄. 어렸을 때부터 자연과 예술에 편안하게 노출되어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으로 성장하게 될까, 실로 궁금하다.

빼앗긴 마음과 시선을 돌이켜 외레순 해협을 바라봤다. 사진을 수도 없이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폴 게르네스(Poul Gernes)의 피라미드(The Pyramid)를 드디어 만났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장대한 규모와 자연의 일부인 듯한 아름다움에 말과 넋을 잃었다. 구성주의 작가인 폴 게르네스는 공공장소에 스케일이 큰 대형 작품(scale model)을 전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예술성이라는 건 어쩌면 ‘접근성’과 ‘재미’를 단번에 느낄 수 있게, 그리하여 종국에는 ‘감동과 희열’로 이끄는 게 아닐는지.  피라미드에 올랐다. 성큼성큼 계단을 타고 높은 지점까지 올라 일광욕도 하고, 그리운 연인과 영상통화도 하며 경치를 보여주고, 예술감 폭발하는 순간을 남기고픈 마음에 몇 글자 끄적였다. 호기심이 일어 몇 년 전 그 노트를 열어보았는데, 아…그 끄적임은 과거의 추억으로 묻기로 한다. 감성과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너무도 부끄러운 내 과거의 끄적임 들이여.


폴 게르네스의 피라미드와, 푸르른 잔디밭과, 해협 그리고 알렉산더 칼더의 움직이는 모빌을 구경 삼아 노천석에서 점심을 먹었다. 뜨거운 태양과의 싸움에서 완패해 실내로 옮겼지만. 자연의 기운을 한없이 흡수하고 밥까지 먹었더니 실내의 예술이 궁금해졌다. 마침, 다니엘 리히터(Daniel Richter)의 전시(Lonely Old Slogans)가 열리고 있었다. 주로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하는 화가로 현재는 빈 국립예술대학교의 교수라고 한다. 그의 작품마다의 강렬한 색채가 여전히 잊히지 않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프리카 보트 난민들의 이야기가 배경인 작품 ‘파티파(Fatifa)’다. 검은 바다 위 보트 속 난민들의 색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표정에 서린 두려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침 작품 앞에서 10대 학생들의 미술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닥에 편안히 앉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유치하게도 10대에도 20대에도 단 한 번도 이런 수업을 받아본 적 없다는 게 서글퍼졌다. 덴마크어만 알아들었어도 무리 사이에 끼어서 듣는 건데(어?).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욕심에 미술관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미술관 자체가 예술로 인식되니 보이지 않는 곳곳마다 숨겨진 매력이 있을 것만 같았으니. 미술관 사이를 연결하는 유리 복도를 지나는데 다시 한번 자연을 향한 경탄과 고마움이 일었다. 분명 실내를 걷고 있는데 숲길을 걷는 기분. 푸르름을 바라보며 다음 예술 감상을 준비하라는 다정함도 느껴지고. 게다가 루이지애나 미술관에선 그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미술에 조예가 없어도 편안하게 감상하고 자유롭게 느끼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곳곳에서 나를 반겨준달까. 얼마간 걷고 나니 자코메티 홀에 들어섰다. 그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사진으로는 참 많이 접했던 작품 ‘Walking Man’을 가까이서 접하니 생경한 감정이 밀려왔다. 저 가냘프고 앙상한 조형물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왜 기품과 삶의 의지가 느껴진 걸까. 삶은 고독한 것이지만 그래도 꽤 살만하다고, 깎이고 꺾여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 뭉클했다.

몇 계단을 내려가니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늠할 수 없을 만치 높은 창 안으로는 자코메티의 조각이 생동감을 뿜어내며 당장 살아 움직일 것처럼 서 있었다. 창 밖으로는 연륜이 느껴지는 버드나무들이 액자가 되어 호수를 작품처럼 보여주는데 탄성을 또 내지르고 말았다. 가슴을 움켜 잡고 걸음을 또 옮겼다. 잠수함 같기도 한, 보트 같기도 한 건물로 옮겨가니 폴 게르네스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그는 우리를 그의 예술 세계로 초대를 건네고 있었다. "I CANNOT DO IT ALONE-WANT TO JOIN IN?" 작품 밖의 세계에 있는 우리, 감상자들이 있어야만 그의 예술 세계가 완성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원동력으로서의 예술(Art as a driving force for a better life and society)’을 추구했다고 하는데, 반박할 수 없지 않은가. 당장의 내 삶도 그의 작품 세상에서 더 나아지는 듯했으니 말이다.


미술관 창립자 크누드 W. 옌센(Knud W. Jensen)은 누구나 쉽게 이곳을 찾아와 예술과 하루를 보냈으면 한다는 철학과 바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총 7번의 확장과 리모델링을 거쳐왔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자연과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인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덕분이겠지. 아름다움과 예술감이 한도 초과가 된 바람에 다시 밖으로 나갔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해 들고 카펫 같은 잔디밭 위에 스카프를 펼치고는 신발을 벗어던졌다. 앉기가 무섭게 드러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행복해’라고 남몰래 읊조렸다. 커피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자연과 예술도 마음으로 들이켰다. 하루가 저물기 전 태양은 가장 강렬한 빛을 뿜어낸다지. 그때의 나는 어쩌면 강렬히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독도, 찬탄과 환희도 넘치도록 해볼 만한, 가져볼 만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 불씨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으니 나는 분명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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