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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Jun 27. 2024

현기증 나도록 아름다워, 모든 감각을 일제히 깨워

정처 없이 걷는 2만 보

내 생애 가장 영화 같은 순간을 꼽아 보라면? 한 달간의 뉴욕 여행이다. 스마트폰 없이, 피처폰도 없이 고대 유물 격의 종이 지도에만 의지했던, 가장 낭만적이었던, 나 홀로 여행의 본격 시작이자 절정이었다. 그야말로 청춘 그 날 것의 에너지와 모험을 향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던 시절의 추억이다. 기억이 세월의 무게를 언제까지 감당할지 모르지만 삶에 도전과 낭만이 사라질 때마다 소환할 작정이다. 친척들이 모여 살고 있는 롱아일랜드에서 신세 지며, 아침마다 기차를 타고 맨해튼으로 향했다.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아직 모르는 휴학생에겐 그저 놀라움과 설렘뿐이었다. 42번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 도착해 중앙홀에 들어선 순간 심장은 세차게 쿵쾅거렸다. ‘나와 뉴욕이라니, 내가 뉴욕 맨해튼에 있다니!’ 소리를 한껏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꿀꺽 삼켰더랬다. 대체 왜 참았을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소리 한 번 크게 질러볼걸! 


드라마 섹스 앤 더시티와 영화 세렌디피티, 유브갓메일, 뉴욕의 가을, 티파니에서 아침을, 그리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장면들이 마구 뒤섞여 필름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뉴욕의 구석구석을 두 발로 당차게, 힘차게, 열정적으로 걸어 누비겠다며 남몰래 결심했었다. 뉴욕으로 넘어오기 전 미시간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 미스터 히치도 무려 뉴욕 배경이었다. 20대 중반이 되기까지의 평생을 뉴욕에 가기 위해 영화로 영혼에 수혈을 받아온 셈이었나.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평생 준비한 삶의 숙원이었던 아닌지. 침착함과 차분함을, 성숙함과 어른스러움을 다분히 연기하며 성실하게도 걸어 다녔던 뉴욕의 봄. 마음과 영혼에 팍팍 꽂히고 새겨졌던 온갖 새로움과 자극과 아름다움 그리고 메트로폴리탄을 위아래 좌우로 걷고 또 걸었다는 사실은 은밀하게 삶에 영향을 끼쳤다. 힘들고 답답할 때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세상이 무서워질 때마다, 여전히 꿈꾸고 싶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아 쓰라린 한숨을 삼켜야 할 때마다 뉴욕과 나의 한 달짜리 우정을 생각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나와 널찍하게 뻗어있는 렉싱턴 애비뉴에 두 발을 디디고 숨을 고른 순간이 떠오른다. 한 달 가까이 아침마다 치른 의식과도 같았지. 마천루가 즐비한 도시를 누비는 여행자답게 시선의 시작은 늘 하늘이었다. 뒷목의 뻐근함을 견딘 채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시선이 닿았던 크라이슬러 빌딩은 늘 우아하게 날 맞이해 주는 듯했다. 가뿐한 걸음과 상쾌한 정신으로 42번가를 10여분 걷다 보면 두 개의 사자상이 지키고 서 있는 아름다운 뉴욕 공립도서관과 아침 인사를 한다. 도서관의 건축 양식에 반해 얼마간 발걸음을 멈추게 되긴 하지만 조금만 더 걷다 보면 브라이언트 공원이 짙은 녹색의 에너지를 뿜어내며 나를 반겨주었다. 공원의 트레이드 마크인 에메랄드 빛깔의 철제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봄날 아침의 공기를 만끽하며 멍한 상념의 시간을 보냈던 뉴욕의 아침, 그 찬란했던 날들이여!


열심히 메모한 수첩과 지도를 펼쳐 놓고 하루를 시작했다. 미드타운을 누빌지, 다운타운을 거닐지, 어퍼이스트사이드로 갈지 웨스트사이드 쪽으로 갈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가열차게 걸었다. 뉴욕 여행 추억은 8할이 공원과 거리로 점철돼 있다.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서 버스킹 공연을 재밌게 보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고 나서 북쪽을 향해 또 걸었다. 미드타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흥미로워 얼마 걷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유니언 스퀘어에 도착한다. 공원에선 또 앉아서 쉬어주고 멍도 때려줘야 제맛 아니겠나. 공원과 닮은 구석이 있는 어여쁘지만 큰 서점 반즈 앤 노블에서 또 한참을 구경하다 보면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목소리의 정체는 아마도 내 내면에서 꿈틀대던 에너지와 열정이었겠지. 걸어야 한다고 느꼈기에 걸었던 그 길 위의 날들은 희미하지만 찬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딘가 저 밖으로, 저 너머로 내 등을 늘 떠밀어 주었던 그 힘은 분명 뉴욕의 길 위에서 피어났으리라. 


영화야말로 나를 걷게 했다. 여느 때와 같이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아침을 열고, 이스트 10번가에 있는 톰킨스 스퀘어 공원을 향해 1시간 남짓 질주했다. 영화 ‘위대한 유산’ 속 황홀한 장면의 배경인 공원 분수대를 만나야만 했으니까. 뜨거운 태양빛 아래 영화 속 장면보다는 초라한 모습의 분수대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만족감, 행복감과 비슷하지만 더 이상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 감정을 잘 데리고 인근 동네인 소호로 향해 점심도 먹고 거닐고 나니 동네 특유의 예술적 분위기에 흠뻑 취해버렸다. 하지만 내려온 게 무색하게 다시 북으로 향했다. 다음 영화 속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세렌디피티 장면 속 프로즌 핫 초콜릿을 먹기 위해서 카페 세렌디피티 3에 다다랐다. 사라와 조나단처럼 2층 자리를 꾀찬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데 혼자였던 것도 짜릿하게 행복했다. 


영화 속 장면은 어퍼웨스트사이드에서도 펼쳐졌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방대한 컬렉션에 압도당한 후 센트럴파크에서 숨을 고르며 다시 걸었다. 숲길과 연못을 지나 서쪽으로 향해 영화 유브갓메일 장면 속 장소 카페 랄로와 만났다. 조와 캐슬린이 이메일만 주고받다가 드디어 만났던 그곳. 고풍스럽고 우아한 카페 랄로에서 영화 속 조와 캐슬린이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 순간의 감정을 상상하며 한참을 머물렀다.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정말 사랑에 빠지고 싶었나 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에 올라 화려한 뉴욕의 밤을 감상할 때도 내 마음에 함께한 건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영화가 없었다면 길 위의 나, 뉴욕을 누비는 나도 없었을지도. 영화가, 책이, 음악이 혹은 예술 작품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가? 이곳으로 오라면서 말이다. 이곳은 뉴욕이거나 런던이거나 베를린이거나 도쿄일지도 모르겠다. 못 이기는 척 가보시라. 아니, 일제히 감각을 깨워 열정을 불태우는 심정으로 발걸음 해보시라. 그러고 나서 내가 나 자신에게 선물한 도전의 짜릿함과 감동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거다. 그렇게 채워지고, 열리고, 충만해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거다. 


살아보지 못했기에 더 향수 짙은 어느 시절 속 도시가 있다. 그곳은 바로 오스트리아 빈. 찬란하게 빛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을 19세기말 빈을 걸어보고 싶다. 살아본 적 없는 세기말의 시기에 빈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과 변화가 그립다. 그리움이라니, 비현실적이고 생경한 감정이다. 오늘날의 빈을 만날수록 그 옛날의 빈을 향한 애정이 커져만 간달까. 예스럽고 아담한, 우아하고 고상한 빈을 걷는 건 역사와 이야기 속을 걷는 느낌이다. 저항과 혼돈의 시기를 지나 열띤 교류와 문화로 혁신을 일으킨 ‘오래된 미래’를 걷는 것 같달까. 도시의 공기는 곧 예술의 숨결이 되어 내 호흡을 통해 내 정신으로 들어온다. 아름답고 우아하기만 한 것 같은 겉모습의 베일을 벗기면 예술과 학문을 향한 실험 정신으로 가득했던 곳이다. 클림트와 코코슈카와 쉴레의 미술,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정신분석학과 철학, 말러와 쇤베르크,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오토 바그너와 아돌프 로스의 건축까지. 


과거로 가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우디 앨런 감독이 세기말 빈을 배경으로 혁신과 변화의 주인공들을 영화로 소환해 주셨으면 좋겠다. 제목은 ‘All day at a coffee house’ 어떨까.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카페에 모여 온종일 환담과 교류를 나눴다고 하니 말이다.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을까. 어떤 질문과 통찰이 공간을 가득 채웠을까. 빈을 더 많이 만나고, 역사와 이야기에 더 깊이 들어가야 풀어낼 수 있는 미스터리겠지. 적잖은 사람들이 대체 빈을 왜 계속 가는 거냐며, 의아함 섞인 질문을 건네올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빈은 걸으면 걸을수록, 알면 알수록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저 웃는다. 아직은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다. 아니, 실은 영원히 나만 몰래 빈의 껍질을 한 겹 씩 벗겨내고 싶은 욕심이 그득하다. 


어느새 세 번의 진한 만남을 가진 빈에선 구글맵 없이 걸어갈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서 합스부르크 왕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마지막 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을 바라본다. 마주 보고 있노라면 내 어깨가 더 펴지고 기개가 충전되는 것만 같아 아침을 여는 기분이 꽤 짜릿하다. 느릿느릿 호프부르크(Hofburg) 왕궁으로 넘어가 왕궁 정원을 천천히 감상하며 산책을 한다. 왕궁 생활의 동선을 밟아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괜히 정신이 우아해지는 것 같고. 푸르름을 한껏 충전하고 나면 괴테의 길(Goethegasse)을 지나 알베르티나 미술관으로 향한다. 옛 왕실이었던 미술관 입구로 올라가 아름다운 빈 국립 오페라극장을 전망 삼아 잠시의 순간을 만끽한다. 볼 때마다 설렘이 피어오르는 오페라극장의 애플그린색 지붕을 바라보며 모든 감각을 일제히 깨워 빈과 나의 만남을 시작한다. 그 마음속 결의는 차라리 숭고할 지경이다. 


오페라극장 방향으로 5분 남짓 걷다 보면 140년의 역사를 지닌 카페 게르스트너(Gerstner K. u. K. Hofzuckerbäcker)를 만난다. 멜랑즈를 마시며 아몬드 케이크를 먹고, 세계 최고의 맛이라 칭하고 싶은 초콜릿을 몇 개 엄선해 하나씩 까먹으며 다시 길 위로 향한다. 낭만이 가득한 트램 정거장을 지나 도심의 뒤편으로 걸어가 본다. 왠지 끌리는 저쪽으로 그냥 한 번 가볼까 싶은 마음으로 그저 걸었는데 오토 바그너의 칼스플라츠 구 역사를 만났다. 계획했던 곳을 무작정 걷다 만나니 반가움이 배가 됐다. 기차역으로 쓰였던 흔적과 빛바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색, 장식과 문양을 지닌 이곳은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의지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빈을 거닐수록 오토 바그너의 건축에 익숙해지는 게 즐겁다. 계속해서 쌓아가고 싶은 익숙함이다. 


걷고, 발견하고, 느끼는 경험을 하면서 더 세밀히 감각하며 디테일 속 지혜와 미를 발견하는 것이 흥미로워졌다. 19세기말 수많은 예술가들이 밖으로 나와 운동을 일으키면서까지 설파하고 싶었던 게 오늘날까지 계승된 예술의 힘 아닐까. 장식적이고 형식적인 예술에서 벗어나 자연을 모티브로 삼은 실용성과 자유를 반영한 예술. 예술의 진화와 그 역사, 그 서사는 직접 도시를 두 발로 거닐고 노닐며 감상하고, 감동하고, 때론 비판하고 해석할 때 훨씬 높은 차원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바그너를 뒤로하고 푸르른 잔디밭을 지르밟으며 칼 광장(Karlsplatz)으로 들어섰다. 마침 주말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따스한 가을의 햇살과 한가로움을 한껏 누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는 길, 익숙한 방향에서 살짝 벗어나보니 어쩌면 지나쳤을지도 모를, 잠재의식은 강렬히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곳에 이르렀다. 


걷는다는 건 우리네 삶처럼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리는 행위다. 아니 그보다는 점을 찍고, 선을 긋고, 채색을 하다가 붓질을 덧대고, 점과 선을 연결하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는 추상화를 그리는 것일까. 걷는다는 건 축복이다. 그리고 나를 향한 사랑과 존중이다. 끊임없이 자문자답하고, 생각을 꺼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나를 달래다가도 각성시키는 길 위의 배움이다. 현기증 나도록 아름다운 세상과 사람과 온갖 산물을 온몸과 마음으로 감각하는 것이 바로 걷는 것이다. 걸을 수 있기에, 걷고 싶기에 나는 도시로 떠난다.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걸음을 이정표 삼아, 그들의 예술과 철학을, 그들의 생각과 지혜를 주워 담기 위해 도시로 향한다. 삶이 정처 없어 힘들다가도 정처 없는 여행이 삶을 지탱해 준다. 이 선순환의 고리 안에서 계속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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