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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익수 Mar 08. 2024

죽음을 배우는 시간

김현아

이 책의 저자는 내과 전문의로 30년을 의사 생활에서 준비 없이 맞이하는 죽음이 모두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수 없이 지켜본 경험을 이 책에 담았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인문학적인 글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극히 현실적인 죽음의 모습을 의사의 시각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의사이면서도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죽음을 이해하려는 저자의 글은 용기있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앞만보고 달려가기 빠쁜 현대인의 생활과 죽음조차도 돈으로 해결하려는 자본주의가 서로 얽히면서 죽음이 우리 주변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서로 알면서도 죽음을 못본척하는 위선적인 상황이 만들어졌다.

비극적인 모습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알릴 힘이 없고,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고, 살아 있는 사람은 잘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살아간다.

누구나 예외없이 맞게 되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단계로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좋은 죽음을 맞이하려는 웰다잉(Well-Dying)은 삶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잘 살기(Well-Being) 위해서라도 반드시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오랜 옛날부터 20세기 후반까지도 사람들은 자신이 마지막까지 살던 집에서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 곁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았다. 연로하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머지않아 곧 돌아가시게 될 것을 가족들이 알아 차리면 온 가족이 노부모의 임종을 맞이 할 준비를 했다. 불과 몇백전 전만 해도 죽음은 항상 사람들 가까이에 존재했다. 전염병이 창궐해서 도시 인구의 절반이 죽어 나가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죽는 사람도 언제나 있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항상 등장하는 존재였고, 항상 승리하는 존재였다. 긴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 철학, 문학, 예술은 항상 죽음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고 알려 주었다.

현대 의료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마치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착각과 함께 ‘노화에 의한 자연사’라는 만고의 진리가 옛 이야기처럼 간주되는 시대가 되었다. 언젠가 부터 상황이 바뀌어 사람들은 집 대신에 병원에서 죽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더 이상 가족들이 아닌 의료 장비와 의사들이 지키게 되었다. 이러면서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죽음을 직접 목격하는 일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 결과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할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죽음을 수용하고 준비하기 보다는 현대 의학 기술의 위대한 발달로 인간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는지, 예전 같았으면 죽었을 사람이 극적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이제는 죽음이 집에서 병원으로 떠넘겨진 사회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가족이 맡아오던 죽음을 병원에 외주맏겼다고도 할 수 있다.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장소이다. 당연히 병원에서 모든 죽음은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간주된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나타나는 노화 현상 조차도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치부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병원은 노화로 인하여 죽는 자연사도 치료의 대상으로 본다.

병원에서 노화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사건이 되었고,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고 맞이하는 자연사는 안락사 내지는 살인과 혼동되기까지 한다. 병원에서는 죽음이 의료의 실패로, 의료가 싸워서 이겨야 할 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대의 병원에서는 환자의 죽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어나면 안되는 일종의 사고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환자가 사망하면 병의 경과를 떠나서 의료진은 환자의 보호자로 부터 질책당할 일이 없는지 먼저 살피고, 환자의 사망이 병원 평가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지까지 따져야 한다. 이러한 의료 시스템은 의사들이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 환자는 물론 환자의 가족에게 고통스러운 상황이라 할지라고 어떻게든 죽음을 늦추려는 시도를 할수 밖에 없는 경우를 흔히 본다. 거의 도움이 안되는 수액이라도 맞다가 죽어야 정상인 것처럼 오인하는 사회 분위기까지 조성되고 있다.

나이가 많이들어 쇠약해진 노인이 생의 거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임종에 이르는 몇가지 과정이 있다. 근력 약화에 의한 활동력 저하 -> 식이 섭취 부진 -> 영양실조 및 탈수에 의한 장기 기능 저하 -> 인두근 약화에 의한 흡인과 폐렴 -> 사망 이라는 과정을 격는데, 이 모든 단계가 병원에 입원하는 순간 치료 해야하는 질병으로 탈바꿈된다.

노인의 사망진단서에는 더 이상 노환이 사망 원인으로 명시되지 않는다. 심부전, 폐렴, 각종 감염증 등, 모든 사망에는 의학적인 진단과 병병이 붙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환자실의 모습을 의사로서 리얼하게 표현한다. 호흡을 돕기 위한 산소 마스크의 착용까지는 문제가 안된다. 어렵고 곤혹스러운 상황이 인공호흡기 착용 시점부터 시작된다. 숨이 막혀 고통받는 환자의 호흡 곤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손가락 굵기의 기도삽관을 연결한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게 된다. 기계로 숨을 불어 넣는 인공 호흡은 자연 호흡과 리듬을 맞추기 어려워서 환자가 의식이 있는 경우 몹시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강력한 진정제를 투여해 환자를 의식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자발 호흡을 죽인 상태에서 시행된다. 인공호흡기를 장착한 대부분의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에게 시술되어졌다고 해서 유명해진 체외막산소요법 에크모(ECMO: 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는 더 드라마틱하다. 심장의 기능이 정지된 환자의 정맥에서 뽑아낸 혈액에 인위적으로 산소를 공급하여 다시 환자의 몸에 주입하는 첨단 의료 장비이다. 엄청난 의료비를 지불하면 심장이 멈추어도 법적으로 사람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대 의학은 살아있는 이해 당사자의 필요에 따라서 죽음의 속도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인공호흡기와 에크모(ECMO)는 한번 환자의 몸에 장착하면 법리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떼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명치료 의료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는데 비하여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윤리적, 철학적 논의가 성숙되기도 전에 법리적 결정이 우선해 버린 결과이다.

대형 병원의 중환자실은 일시적인 문제로 생명이 위독해진 환자들이 의학적인 시술의 도움으로 위험한 시기를 넘기고 다시 건강한 몸으로 돌아기기 위한 특별한 치료 목적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이 현대 의료에서는 빈번히 깨진다. 죽음을 말하기 싫어하는 의사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환자 가족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중환자실은 임종을 맞기 위한 장소로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 누구도 ‘이제 그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 입원을 안 시킬 경우, 심한 경우 의료 소송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정말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중환자실에 입원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넌센스는 환자와 가족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연장할 뿐만 아니라 큰 경제적 손실을 입게하고, 국가 차원에서는 제한된 의료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다. 반드시 중환자실 치료가 필요한 환자의 치료 기회를 박탁함과 동시에 의료 비용의 천문학적 증가를 초래한다.

우리나라에서 80세 이상 고령자의 중환자실 입원율은 2002년 7.3%에서 2013년 23.1%로 증가했고 현재는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환자실이 노인들이 몸에 무언가를 많이 주렁주렁 달은 상태로 삶을 마감하는 장소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다. 노화로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가족과 작별할 수 있는 부모를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억지로 육체만 세상에 붙들어 놓았다가 보내는 상황이 만들어 진다.

2018년 미국의 의료 보고서에 따르면 중환자실에 입원한 평균 연령 67세 이상의 환자 중 어차피 생존할 사람은 중환자실 연명치료와 무관하게 생존한다.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중환자실 치료는 단지 사망에 이르기 까지의 시간을 얼마간 더 연장하는 연명치료일 뿐이다.

노년의 부모가 건강할 때 자식을 포함한 가까운 가족에게 ‘조용히 죽겠다’, ‘아파도 병원에는 절대 안 가겠다.’라고 말했어도 막상 노년에 죽음이 닥치면 그런 뜻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인 문제로 이어 질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노화로 인한 임종을 지켜보는 일도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이 살인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임종 문화의 총체적인 혼란상에서 비롯되는 어이없는 비극이다.

이러한 혼란은 병원과 의료인의 입장뿐만이 아니라 환자의 가족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이 관여하면서 점점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나라는 2018년 부터 만 19세 이상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향후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연명의료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향을 명시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를 도입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막연한 웰다잉(Well-Dying) 준비가 아니다. 현대 의료 시스템에서 준비되지 않은 모든 죽음은 개인에게는 물론이고 사회적 재앙으로까지 이어진다. 노환으로 사망한 환자에게도 마지막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살인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은 시행하지 말 것에 대한 요청서)를 포함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은 결과는 때로 참혹하다.

보건의료 통계를 보면 한 개인이 사망하기 한달 전에 쓰는 의료비가 그 이전 평생에 걸쳐 쓴 의료비보다 더 많다고 한다. 선진국에서 이러 불합리하고 불행한 결과를 막기 위해 완화의료(Palliative Care)를 중심으로 하는 죽음의 질 향상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완화의료는 반드시 임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만 시행하는 치료가 아니다. 병으로 하루하루가 힘겨운, 누가 보아도 임종이 눈앞에 닥친 사람에게만 완화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혈압, 당뇨, 중풍 등 노년에 닥치는 온갖 만성 질환들의 후유증으로 신체의 정상적인 기능을 잃고 침상 생활을 하면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환자는 언제 임종이 올지 알기는 어렵지만 남은 삶을 좀더 편안하게 해주는 치료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죽음의 모습을 스님들의 예에서 찾는다.

큰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 곡기를 끊고 죽음을 재촉했던 이야기, 옆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바치며 애원해도 듣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마주하는 스님들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죽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본다고 한다. 곡기를 끊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은 삶을 구차한 영양제나 수액 따위로 연장하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럽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동적인 죽음을 자살 내지는 자살 방조로 보고 생의 무게에 힘겨운 환자에게 강제로라도 급식과 영양 주사라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은 대부분이고, 이러한 믿음을 병원의 치료 시스템이 받치고 있다.

평화로운 임종은 죽음의 불안함에서 벗어나고, 혼자서 임종하지 않고, 가족과 아이들과 함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조건이다.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접촉조차 매우 어려운 중환자실에서의 죽음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병원은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장소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심하게 표현하면 연명치료를 위한 복잡한 기계 장치가 갖추어진 병원이라는 시설로 부모를 고려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인다. 그 옛날 죽을 부모를 내다 버리는 자식의 심정은 슬프고 비통했겠지만, 대형 병원에서 부모의 임종을 맞게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 격게되는 죽음과 슬픔을 병원이라는 커튼 뒤로 숨겨 버렸다.

저자는 이 책의 끝에서 의사의 입장에서 죽음에 대하여 취하는 자세를 말한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 죽음에 준비된 의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의사는 최선을 다할 때와 이제 그만 놓아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알고, 가족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는 노화로 인한 거의 모든 증상을 병원의 일로 만들었고, 가족들은 노화를 곁에서 함께 지켜보는 대신에 열심히 노동하고 돈을 벌어 치료비를 대고 남아 있는 삶을 살아 나간다. 이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겠지만 어수 없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이 좋은 죽음일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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