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마코비츠
1994년에 출판된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유명한 책이 있었다.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한 공부 천재들의 이야기려니 생각하고 굳이 읽지는 안았지만, 이 책의 영어 원제목인 ‘능력주의 덫(The Meritocracy Trap)’이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는 신호였고 이후 26년만에 이 책이 나오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이었다.
이 책을 출간할 당시 저자는 노력과 실력으로 예일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된 미국 사회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저자는 미국사회의 심각한 병을 분석하고 진단한 이 책을 20년간에 걸쳐 썼고, 이 책이 폭로하는 엘리트 능력주의가 만든 불평등한 사회의 산물이자 행위자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고 느끼며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무기력해진 청년세대의 모습에서는 답이 쉽게 안보인다. 우리들 모두가 느끼는 병이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모습 같아서 안타깝다.
이 책은 미국 사회를 진단했지만 마치 한국 사회를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이다. 저자가 미국의 교육 양극화를 심각하게 설명할 때 역시 심각하다고 비교한 유일한 해외 사례가 ‘한국 서울의 부자동네’이며, 한국은 개인 과외비가 가계지출 총액의 12%에 해당한다고 기술했다. 우리사회의 비교적 엘리트 계층인 ‘강남 좌파’가 정치의식은 진보이면서 경제논리는 보수를 표방하는 배경도 이 책을 읽으면 잘 이해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 군정하에 건국한 대한민국은 사실상 미국의 경제.사회.문화 전반과 깊숙히 동기되어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지금에 이르렀다. 미국의 DNA가 후천적으로 유전된 한국사회를 분석할 때, 이 책이 지적하는 미국의 문제가 나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때문이다.
중세 봉건시대 귀족제도(Aristocracy)에서 귀족은 출생으로 결정되었고, 귀족제도를 지탱하는 최대 부의 원천은 토지였다. 근대시대에 들어 오면서 귀족제도는 귀족 덕목에 대한 실망, 개인의 자유의지 중시, 창의력과 기회의 균등의 가치에 밀려 소멸의 길을 걸었다.
20세기에 들어 오면서 귀족주의를 대체한 능력주의(Meritocracy)는 공정하고 호의적이며 개인의 이익과 공익을 조화시키고 모두의 자유와 기회를 촉진하는 이념으로 설명되었다. 능력주의는 기회의 평등과 결합되고 보완하는 요소로 받아들여 졌다. 능력주의에서는 부의 최대 원천이 엄청난 기량과 근면성을 갖춘 상위 엘리트 노동자의 노동력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상위 엘리트는 사회 전부문에서 상위 1% 이내를 의미하며, 좀더 확대한다면 소득상위 5% 전후를 포함한다.
귀족제도의 선천적인 귀족신분과 달리 능력주의 시대의 엘리트는 후천적으로 만들어 진다. 능력주의 세계에서는 엘리트 신분을 계속 자녀에게 물려 주고 싶은 부모들이 차별화된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여 목표를 달성한다. 능력주의 시대의 유능한 엄마는 양육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자신의 경력을 희생하고 자녀 교육에 재산뿐 아니라 기량과 에너지를 솥아 붓는다.
과거의 부모들은 어른들의 사회를 중심으로 한 가정생활을 영위했지만, 오늘날의 부모들은 가정생활의 초점을 자녀 교육에 맞춘다. 과거의 어린이들은 아무런 근심없이 현재에 충실했지만,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초조하게 양육되고 준비한다.
일류 대학의 학생회를 구성하는 대다수는 부유층 자제이다. 오늘날 능력주의 대학교육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엘리트 계층의 목표를 충족하는 도구가 되었다. 엘리트 대학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계층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를 벌일 수 있도록 양육될 뿐 아니라 교육되고 지도되고 형성되며 포장된다. 능력주의 교육은 어김없이 공허하고 파괴적인 교육경쟁을 낳으며 궁극적으로 그런 경쟁은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승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세기 중반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능력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은 노동에서 자본으로의 소득 이전 때문이라기 보다는 중산층 노동직업에서 상위 엘리트 노동직업으로의 소득 이전 때문이다. 능력주의 톱니바쿼가 한차례 돌아갈 때마다 소득과 기회의 불평등은 가차없이 확대되고 심화되고 있다. 실력과 근면성으로 무장한 능력주의 시대의 엘리트들은 중간 숙련 근로자인 중산층을 소득경제 구조에서 배제하거나 망가뜨리는 과정을 통해 지위를 얻는다.
포퓰리즘(Populism)은 능력주의가 소득양극화라는 증상으로 민주주의에 일으킨 질병이다. 2015년에 도널드 트럼프는 엘리트 능력주의가 발생시킨 빈부격차라는 질병을 자신이 치료할 수 있다고 정치계에 나섰고 2016년에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나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이 좋다."라고 공언하며 능력주의 시대의 엘리트를 대놓고 비난했고, '블루칼라 억만장자'로서 능력주의로 인한 백인 중산층의 불만을 선거운동에 이용했다. 트럼프는 중산층 분노의 흐름을 일으켰다기 보다는 그 흐름에 편승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교육수준이 높은 엘리트 집단은 힐러리 클린턴을 받아 들이고 트럼프를 어설픈 어릿광대 정치인으로 깍아 내렸다. 반면에 중산층은 힐러리의 휘황찬란한 학력과 경력에 반감을 품었고, 엘리트 교육을 거부하는 트럼프에게 깊이 공감했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성공했다는 자기논리에 사로잡힌 부유하고 고결한 엘리트층은 중산층의 고충과 분노를 알지 못했다. 선거유세 기간에 힐러리가 트럼프 지지자의 절반을 가리켜 '한심한 패거리’라고 지칭한 것은 미국 엘리트 전반이 중산층에 대하여 은밀하게 품고 있던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엘리트 부유층과 중산층은 탄생, 교육, 결혼, 직업, 사회활동, 소비, 취미, 여가 등 사회전반에 걸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인간의 삶 전체가 등급별로 분리된 여객기 좌석의 형식으로 재형성되는 추세이다. 요리에 대한 취향을 예를 들면, 상위 엘리트들은 직업적인 인맥을 확충하려는 생각에서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신기한 요리를 대접해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한다. 반면에 중산층은 익숙한 음식을 가족이나 오랜 친구에게 대접한다. 대화를 예를 들면, 부유층은 형식적이고 정치적인 대화를 나누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중산층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화법에 자부심을 느낀다.
능력주의로 양극화된 노동시장에서 번지르르한 엘리트 직업이 경제적인 역활을 다하려면 교육을 통해 엄청난 기량을 쌓아야 하고, 과로를 꺼리지 말아야 하며, 일이 바쁜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사회적으로도 고된 노력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능력주의는 교육과 일에 대한 경쟁, 평가, 성취, 보상의 복합체를 통해 실행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인간(Human)이 아니고 인적자본(Human Capital)이고, 회사에서 인사부는 인적자본관리부로 명칭이 바뀐다. 능력주의는 이제 특권과 부의 집중, 세습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자 엘리트 계층제도를 유지하는 논리가 되었다. 능력주의는 엘리트의 지적능력으로 지탱되는 새로운 귀족제도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엘리트와 중산층은 공통되고 상호 파괴적인 경제적.사회적 논리에 갖혀 있다. 이들의 부담감과 고통은 상반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능력주의라는 공통된 질병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 애초에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삶을 택했다가 근근히 정상 부근에 올라가서 절벽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사람은 절벽 가장자리에서 갑자기 떨어질 때 그전에 떨어진 사람보다 더 극심한 충격을 받는다. 이런면에서 상위 엘리트 근로자는 ‘세상의 절대자(Master of the Universe)’라기보다 계층만 높은 징집병에 가깝다. 과도한 근무시간에서 탈피하려는 ‘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주장은 더이상 직업이 천직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천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이런 능력주의의 해악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능력주의는 공정하고 호의적이며 개인의 이익과 공익을 조화시키고 모두의 자유와 기회를 촉진하는 이념이다.”으로 설명되는 마력 때문이다. 이 마력 때문에 해악의 배후에 능력주의가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찰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능력주의의 덫에서 빠져 나가기가 매우 어렵다.
지구상에 인구가 5천만명 이상이면서 1인당 GDP가 5만불 이상인 나라는 미국과 독일이다. 저자는 미국 능력주의에서의 ‘교육의 집중’에 대한 대안으로 독일의 ‘교육의 분산’을 설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독일은 사실상 사립학교나 사립대학이 없다. 예를 들어, 베를린은 시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무료로 어린이집을 제공하고 고급 어린이집을 불법화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독일은 엘리트주의의 가치 보다는 사회통합의 가치를 더 추구하면서 사립교육에 의한 엘리트 교육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금지하였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다분히 사회주의적이지만 독일은 분명히 우리나라 보다는 기회균등과 사회통합의 측면에서 훨씬 앞선 나라이다.
이제 능력주의는 오히려 기회평등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사회계층간의 이동을 촉진하기 보다는 억제하는 요소에 가깝다. 능력주의는 단순히 불평등하기보다 정당하게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지금 사회에서 능력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덕목이 아니라 능력주의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불평등의 결과물이다. 엘리트에게 막대한 소득을 안겨주는 능력주의의 엄청난 생산성과 이것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의 산물이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사회의 연대를 저해하고 민주주의적인 자치를 타락시킨다.
실체를 잘 알 수 없지만 양쪽 계층 모두에게 타격을 주는 좌절감, 중산층이 느끼는 전례없는 분노와 엘리트가 느끼는 헤아릴 수 없는 불안감은 같은 강물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로 같은 흐름에서 어둠의 에너지를 얻는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 때문에 모든 사랄들이 소외된다. 일류학교를 나와 일류 직업에 종사하며 점점 더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최고의 엘리트는 예외이다.
봉건사회의 귀족제도는 귀족 개인의 도덕심, 덕목, 능력이 부족하여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귀족이라는 ‘선천적 특권’을 근대시민사회가 정당하지 않다고 규정하면서 몰락하였다.
저자는 ‘능력’이라는 개념은 엘리트의 이념적인 자만이고, 근본적으로 경제적으로 부당한 이익분배를 눈속임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능력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개인을 비난하는 접근방식으로는 안되며, 능력주의를 지탱하는 ‘능력’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해야하는 사회적인 세력은 누구이어야 하는가 하는가?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저자가 내부자 폭로를 했는데, 이제 문제 해결의 주체는 누구이어야 하는가?
나는 저자가 이 책에서 무었을 말하려는지 의도는 이해가 된다. 나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기업인으로서 인사가 만사이고,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엘리트의 능력주의는 기본 덕목으로 믿어 왔다. 그러면서도 통합된 사회에서 각자 위치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데, 솔직히 지금의 상황에서 모든 것을 깔끔하게 만족시키는 모범답은 안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함께 행복한 삶에 도움되는 답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려고 한다.